아이들 육아·훈육마저 이벤트화...비뚤어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2020.04.03 16:33 입력 2020.04.03 20:29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 서당 체험의 현실 왜곡

지난 3월22일 방송된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서당을 찾은 다섯 살 윌리엄은 동생 벤틀리 대신 회초리를 맞겠다며 바지를 걷어올렸다. 그동안 이 프로그램 출연 아동 다수는 의무방어전을 치르듯 서당에서의 에피소드를 촬영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방송화면 캡처

지난 3월22일 방송된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서당을 찾은 다섯 살 윌리엄은 동생 벤틀리 대신 회초리를 맞겠다며 바지를 걷어올렸다. 그동안 이 프로그램 출연 아동 다수는 의무방어전을 치르듯 서당에서의 에피소드를 촬영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방송화면 캡처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믿지 않는 텅 빈 말이 있다. 지난 3월22일 방송된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이하 <슈돌>)에서 서당식 예절학교의 훈장 김봉곤이 샘 해밍턴의 아들 윌리엄에게 한 말들이 그렇다. 해당 에피소드에서 윌리엄이 식사 시간에 친분이 있는 하율에게 “매일 네 꿈 꿨어”라며 끌어안자 김봉곤은 “남녀칠세부동석”을 인용했고, 윌리엄은 자신은 5세니 괜찮다고 답했다. 정당한 반박에 김봉곤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지만 윌리엄이 7세라 해도 그가 ‘남녀칠세부동석’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윌리엄에게 아버지 이름을 이야기할 땐 ‘자’를 붙여야 한다는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본인도 외국인인 샘 해밍턴의 이름을 ‘샘자, 해자, 밍자, 턴자’로 호칭해야 한다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귀화하지 않은 그들에게 본관을 묻고 “KBS 본관이요” 같은 대답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합의된 롤플레잉에 가깝다. 아이들이 서당에 오고, 훈장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에 떨어진 유생 같은 제스처를 제공한다.

연례행사처럼 찾는 ‘서당’, 현대에 맞춰 발명된 가상공간에 가까워

아이가 사회화되고 예절을 익히는 지루하면서도 진 빠지는 과정을

훈장의 과잉된 이미지와 ‘텅 빈’ 말로 대체하며 현실의 문제는 회피

‘슈돌’ 육아는 ‘모델하우스’처럼 현실과 분리된 의도적 환상을 판다

TV를 통해 비친 서당이라는 공간의 의미란 그래서 앞서 말한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단어와 흡사하다. 텅 빈 말이 있듯, 텅 빈 이미지도 있다. 이곳은 전통이 시간의 변화와 교류하며 이어져온 실제 교육 공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대 사회에 맞춰 발명된 가상적 공간에 가깝다. 체험학습을 겸한 단기 예절학교로 기능할 수는 있겠지만 이곳이 유교의 위대한 전통의 마지막 보루라 믿는 이들은 없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슈돌>은 이번 에피소드를 비롯해 연례행사처럼 서당에 가는가.

지금까지 <슈돌>의 출연자인 송일국네 대한, 민국, 만세 세쌍둥이와 추성훈의 딸 추사랑, 최근까지 출연했던 박주호네 나은과 건후, 이번의 윌리엄과 벤틀리까지 영문도 모르고 의무방어전을 치르듯 서당에서의 에피소드를 촬영했다. 민국이는 붓으로 바닥에 낙서를 하다 혼나 울었고, 나은이는 자기 빼고 훈장 말을 안 들은 아이들을 변호하기 위해 윤리적 딜레마에 빠져야 했다. 이 부분을 콕 집어 비판하기란 어렵지 않다. 최근 경향신문이 ‘공포에 질린 아이 얼굴이 재밌습니까? - 육아 사라지고 산으로 가는 <슈돌>’이란 기사에서 이번 서당 에피소드에 대해 정당하게 지적한 것처럼, 서당 예절교육에 빠지지 않는 훈장의 호통과 아이들의 울음은 그 상황을 제작진이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정서적 학대로 볼 여지가 있다. 앞서 말한 합의된 롤플레잉이란 사실 어른들끼리의 합의다. 소위 ‘그림’을 위한 편의주의는 안일하고, 아이의 정서적 불안을 고의로 야기하는 건 윤리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이처럼 반복적으로 되풀이된 관성적 장면을 전체 프로그램 안에서의 일탈이나 실수, 오점처럼 접근해선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여기엔 어떤 필연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재와 분리된 가상적 이미지로서의 서당이란 공간의 성격과 <슈돌>에서 미화되어 그려지는 육아(와 유아)의 성격이 동근원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슈돌>이 지난해 KBS 연예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여전한 인기 장수 예능이라는 사실은, 그 내용적 구성물에 대한 분석을 차치하고도 어떤 위화감을 준다. 이토록 꾸준히 TV 속 유아가 사랑을 받고, 아버지의 육아가 응원을 받는 반면, 그 바깥에선 몇 년 동안 꾸준히 노키즈존과 그 옹호자들이 늘어가고, ‘맘충’이라는 혐오표현도 고착화됐다. 이 괴리를 보며 아찔함을 느끼지 않기란 어렵다. 물론 <슈돌>을 즐겨 보는 이들과 노키즈존의 옹호자가 동일한 인물들은 아닐지 모른다. 다만 이 두 가지 현상이 얇은 TV 화면을 사이에 두고 충돌 없이 또한 문제의식 없이 공존하고 있다는 게 비정상적일 뿐이다. 이 공존에 필요한 건 이중 잣대가 아닌 암묵적 평화협정이다. TV 속 편집된 가상의 흔적을 눈감아주겠다는 협정. 대중은 아이가 TV에서 떼를 쓰면 인자하고, TV 바깥에서 떼를 쓰면 엄해지는 게 아니다. TV 속 아이가 현실에선 전혀 있음직하지 않은 귀엽고 순하고 똘똘한 모습만으로 편집된 것을 현실로부터 분리된 이미지와 캐릭터로 소비하고, 아이들이 실제로 그러할 법한 모습으로 실재하는 것을 질색하는 것이다. 이 공존엔 그래서 모순이 없다. 단지 의도적 외면이 있을 뿐이다. 얼마 전 벌어졌던 <슈돌> 대본 논란이 흥미로운 해프닝인 건 그래서다. 이 논란에서 중요한 건 <슈돌>에 대본이 있느냐, 있다면 어느 정도 수준이냐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 쇼를 실재의 반영으로서 소비했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다. 네? 그렇다면 당신은 전통찻집에 놀러간 문희준이 네 살짜리 잼잼이에게 음료 주문을 부탁한 게 방송 대본 없이 실제 육아에서 벌어질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요? 카메라가 곳곳에 자리한 환경에서 인물들이 카메라가 없는 것과 동일한 삶을 보여주리라 기대했단 말인가요? 이것은 익숙지 않은 음료 이름을 아직 여물지 않은 발음으로 되뇌는 네 살 여아를 보며 귀여워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시청자가 건나블리(나은, 건후 남매)나 윌벤저스(윌리엄, 벤틀리 형제)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사랑하는 건 자유지만, 그것이 실재이길 욕망할수록 우리는 실재하는 아이들의 미성숙함과 육아의 디테일한 어려움들을 참지 못하게 된다.

현대의 서당이라는 공간과 <슈돌>의 미화된 육아는 이 지점에서 조우한다. 서당이 훈육의 가상적 이미지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그러하다. <슈돌>의 육아에서 절대적으로 보기 어려운 게 훈육이다. 말 안 듣는 아이와 한계에 달한 부모의 현실적 갈등과 훈육을 보는 건 시청자들에게 너무 부담스럽다. 학교에서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시청자는 <슈돌> 속 이미지가 실재를 대신하길 바라는 것이지 출연자들의 실재와 대면하고 싶은 게 아니다. 아이가 사회화되고 예절을 익히는 지루하면서도 진 빠지는 과정을, “남녀칠세부동석”을 말하는 상투 튼 훈장의 과잉된 이미지로 대체할 때, 시청자는 실재를 대면하는 부담을 피하면서도 아이가 훈육받는 과정을 즐길 수 있다. 공수 자세처럼 철저히 형식적인 예절이 강조될수록 훈육은 내면의 복잡한 문제가 아닌 가시적이고 심플한 이벤트가 된다. 그러니 왜 아이들을 서당에 보내 심리적 부담을 안기느냐는 질문은 온당하되 부차적이다.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은 왜 육아 예능에서 아이들에 대한 훈육마저 이벤트화되고 외주화되느냐는 것이다. 여기엔 공동체가 함께 나눠 질 무게에 대한 부담이 온전히 제거되어 있다.

[위근우의 리플레이]아이들 육아·훈육마저 이벤트화...비뚤어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이것은 그저 한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일 뿐일까. 하지만 사람들이 현실로부터 분리된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것이 가상과 현실의 상호작용 없는 완벽한 분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상은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모델하우스는 실제 집에 대한 환상을 팔기 위해 존재한다. 지옥도 모델하우스는 살 만하다. 마찬가지로 <슈돌>의 육아는 모델하우스가 그러하듯 현실의 자질구레한 맥락과 분리된 동시에 다분히 의도적인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가상적으로 구현한다. 중산층 이상에 한부모 아닌 환경에서 아이에게 자상하고 웬만하면 딸바보인 아버지가 매주 아이와 이벤트를 벌이는 갈등 없는 세계.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이상적 모델로 제시해서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을 말 그대로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문제다. 가상과 현실의 위계는 그렇게 뒤집힌다. 현실을 근거로 <슈돌>을 평가한다면 제작진이 가증스럽겠지만, <슈돌>을 근거로 현실을 평가하면 시끄러운 아이와 완벽히 제지 못하는 부모가 꼴불견이다. 자, 이 중 무엇이 더 합리적이겠나. (후자? 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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