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발한다, 또다시

2020.04.05 20:37 입력 2020.04.05 23:24 수정

2001년 2월, 검사로 임관했으니 어느새 20년이 되었습니다. 새내기들이 그렇듯, 저 역시 검찰의 흑역사는 옛날이야기이고, 선배들 말은 모두 금과옥조인 줄 알았던 때가 있었지요. 검찰이 비판받을 때면 제가 찔린 듯 고통스럽고 야속했습니다. 그러나 기라성 같은 줄 알았던 선배들 중 범죄자나 반면교사 삼아야 할 사람들도 적지 않고, 그런 이들이 걸러지지 않고 승진하는 인사시스템 결함을 깨닫는 데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더군요. 검찰의 속병이 깊어가는 걸 내부에서 지켜보는 건 너무도 고통스럽지요. 검찰에 뿌리내린 제 영혼도 같이 말라갑니다.

[정동칼럼]나는 고발한다, 또다시

많은 일을 보고 듣고 겪었습니다. 검사로서 수사하여 범죄자를 처벌하면서도, 정작 저와 제 동료들이 상관들에게 더러 당하는 성폭력 등 각종 봉변이나, 상급자들의 위법하거나 부당한 지휘와 업무처리를 보며 뒤에서 수군거릴 뿐 어찌할 바를 몰라 침묵했지요. 최상급 수사기관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틀어쥔 검찰은 김학의 별장 성접대 사건처럼 부실수사로 범죄를 덮을 수도, KBS 정연주 사장 배임 사건처럼 찍어내기 기소를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제기해봐야 상급자에 대한 감찰과 수사가 제대로 될지 의심스럽고, 괜히 찍혀 보복만 당할 듯하니 주저할밖에요.

2012년 12월,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어 상급자의 위법한 지시에 항명하여 감찰과정에서 무엇이 옳은지 따지기로 작심한 후 ‘징계 청원’이란 글을 검찰 내부망에 올리고 과거사 재심사건 무죄구형을 강행했습니다. “통제받지 않는 검찰권은 흉기다” “옳고 그름을 떠나 내부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조직원으로서의 도리다” 등의 비난 댓글을 읽으며, 외로웠습니다. 무법천지 검찰에 지옥으로 내몰린 건 과거사 재심사건 피고인과 유족인데, 법대로 한 제가 오히려 통제받지 않은 흉기인 양 비난하니 얼마나 억울하던지요. 검사는 상사의 명령이 아니라 법과 정의를 지켜야 한다는 대명제를 잊은 동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국회로 가서 법과 제도를 바꾸라는 충고도 제법 들었습니다만, 처벌규정이 없어서 검사들이 뇌물받고 추행하는 게 아닙니다. 법과 제도에 틈이 있기도 하지만, 검찰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괴물 프로크루스테스가 되어 사실관계와 법률 해석을 늘리거나 잘라 맞춤형 결론을 도출해 버리니, 실세 검찰간부들의 일탈이나 검찰의 조직적 일탈은 대개 수사성역이 되지요. 성역을 스스로 만든 검찰이 다른 사건인들 공정하게 처리하겠으며, 내부 부조리에 침묵하거나 방관한 검사들이 상급자의 위법한 지시에 이의제기할까요.

검찰을 바로잡으려면, 법과 제도를 더욱 촘촘히 만드는 것과 아울러 장식품이었던 처벌규정에 생명을 불어넣을 필요도 있지요. 하여, 검찰의 조직적 일탈에 가담하면 검사도 처벌받는다는 선례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2015년 서울남부지검 성폭력사건을 은폐한 김진태 전 검찰총장 등을 고발했습니다. 서지현 검사의 미투 이후 검찰이 성폭력사범들을 뒤늦게 기소한 이상, 검찰이 제 고발사건을 수사해주지 않더라도 “당시 대검 감찰1과 등에서 피해자들을 조사하고도, 성폭력사범들에게 명퇴금 등을 쥐여주며 무사히 퇴직시켜 사건을 은폐했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 고발인인 제가 증명할 수 있으니까요.

2018년 5월, 중앙지검에 고발장을 냈습니다. 앞으로의 일들이 그려지더군요. 우리 검찰은 공소시효 완성이 임박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불기소를 결정할 테고, 재정신청은 2020년 4월쯤 해야겠구나…. 20년 차 검사의 슬픈 관록입니다.

지난주 월요일, 언론을 통해 중앙지검의 불기소 결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감찰 중단으로 전 민정수석 등을 직권남용으로 기소한 게 불과 얼마 전이라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습니다만 역시 검찰의 이중잣대는 거침없습니다. 감찰권밖에 없는 민정수석은 그러면 안되지만, 수사권과 감찰권을 가진 검찰은 마음대로 덮어도 된다는 말이라, 예상하였으면서도 참담하네요.

검찰이 아무리 틀어막아도 진실과 정의는 오늘도 나아가고 있고, 검찰 역시 역사의 심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에, 저는 고발합니다. 이중잣대와 선택적 수사로 정의를 왜곡시킨 검찰을 고발합니다. 이런 검찰이라면 막중한 검찰권을 감당할 자격이 없습니다. 검찰총장 윤석열과 중앙지검장 이성윤을 고발합니다. 검사의 사명을 망각하고 검찰의 조직적 일탈에 면죄부를 준 그들은 검사의 자격이 없습니다. 검찰권을 검찰에 위임한 주권자 국민 여러분들이 고발인의 고발내용을 판단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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