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지켜본 성범죄 재판…판사들은 방조자와 다름없었다

2020.04.20 06:00 입력 2020.04.20 07:28 수정

성폭력 피해자 수사·재판 지원 활동가 ‘마녀’ 인터뷰

[성범죄법 잔혹사]수년간 지켜본 성범죄 재판…판사들은 방조자와 다름없었다

한국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를 대하는 방식을 한 단어로 표현해달라는 질문에 ‘마녀’(트위터 활동명·@C_F_diablesse)는 “동상으로 있으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 ‘우리가 필요하면 갖다 쓸게,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 박혀 있어’라는 거죠. 동상이길 거부하면 공격받아요. 사회가 생각하는 ‘순결한 피해자상’에 피해자가 맞지 않으면요.”

n번방 사건에 대한 시민들 분노가 분출되던 지난 11일 마녀를 만났다. 마녀는 성폭력 피해 당사자로서 수사·재판을 경험했다. 그 후 수사·재판 과정을 겪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했다. 10년의 시간이다. 마녀라는 이름은 성폭력 피해자가 당하는 ‘마녀사냥’에서 따온 것이다. 증인으로 나가는 피해자들의 신뢰관계인으로 법정에 동석하거나 재판을 방청하면서 성폭력 범죄를 둘러싼 형사사법 시스템의 문제점을 속속들이 알게 됐다.

신뢰관계인으로 동석해보니
피해자보다 가해자 중심 법정
사법시스템 문제 절실히 느껴

마녀는 지난해 말 판사들을 만났다. 법원 내 젠더법연구회 판사들이 인터뷰단을 만들어 활동하던 중 마녀를 인터뷰이로 초청했다. 판사 인터뷰단은 법원 내부통신망에 게재한 마녀 인터뷰 자료에 “법정 밖에서 성폭력 피해 생존자와 판사들이 만난 최초의 기록”이라고 썼다. 그만큼 이례적인 일이었다. “처음에는 ‘진짜인가?’ 하다가 판사들이 피해 당사자나 연대자를 만나고자 한다면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내 이야기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다른 피해자 이야기도 같이 전달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피해자 설문조사를 해서 전달하겠다고 제안했는데 (판사들이) 좋다고 했고, 점점 일이 커진 거죠.” 피해자 64명 설문조사가 여기서 나왔다. 피해자 설문 문항을 짜는 과정에서 판사들이 궁금해하는 부분도 포함했다.

법원 젠더법연구회 초청으로
현직 판사들과 ‘법정 밖’ 대화
피해자 입장 전한 뜻밖의 기회
더뎌도 나아질 것 기대하게 돼

피해자들의 설문 답변을 보면 수사와 재판을 거치며 피해가 회복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악화되는 현실이 드러난다. 마녀는 “예상대로였다”고 했다. “피해 당사자가 절차와 제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상황, 그로 인해 사법 시스템을 밟아서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많이 고민하는 모습들. 가슴이 정말 아프죠. (피해자들이) 어떤 심정으로 글을 써내려갔을지 눈에 선하기 때문에 속상하기도 하고요.”

성폭력 범죄의 수사·재판 과정과 낮은 형량의 판결은 연결돼 있다. 수사·재판에서 피해자 목소리가 배제된 결과 법원이 낮은 형량을 선고하고, 이런 판결들은 성폭력이 중범죄가 아니라는 신호를 사회에 준다. “어떤 메커니즘으로 범죄가 발생하고 피해자가 겪는 피해가 어떠한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가해자 중심으로 재판이 이뤄져요. 피해자가 (법정에) 나오기를 거부하거나 어려운 경우, 또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범죄의 경우 결국 피고인 중심으로 재판이 돌아가니까요.”

신종 범죄인 디지털 성범죄에서는 피해의 심각성과 형량의 차이가 극대화돼 나타난다. “수사기관과 법원은 디지털 성범죄보다는 직접적인 신체접촉이 있는 성폭력을 중한 성폭력으로 인식해왔어요. ‘그냥 (동영상) 한 번 찍은 건데’와 같은 인식은 판사 개인에게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형사사법 절차의) 전 과정이 결합된 결과물이에요. 벌금 얼마만 내면 된다는 인식이 성범죄자들 사이에 너무나 만연했어요. 이런 시그널을 준 게 법원 판결이죠. 최근에야 겨우 (징역형을 선고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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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제도·절차 필요하지만
제대로 알려서 활용하게 해야

어떻게 해야 할까. 마녀가 강조하는 것은 전시성으로 새로운 제도나 절차를 만드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새로 만드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만큼) 지금 있는 제도, 혹은 앞으로 만들 제도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설명하고 활용할 수 있게끔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절차가 있음에도 피해자에게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상황이에요. 피해자들은 모르고 있고, 피해자가 알더라도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이를 무시하죠. 보호 절차를 만들어놓고도 운영을 소홀히 하게 되면 시스템을 이용해 권리를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포기하게 돼요.”

마녀는 한국 사회가 더디긴 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했다. 익명의 성폭력 피해 생존자가 현직 판사들과 대화한 것, 이 자체가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나아질 거라는 신뢰와 기대, 희망이 있어요. 법원과 언론 다 달라졌어요. 지난해만 해도 기사 헤드라인이 아동 ‘음란물’이었는데 ‘성착취물’로 바뀌었어요. 이번에 판사들이 법정 밖 피해자의 얘기를 듣겠다고 시도한 것도 견고하고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사법 시스템이 변화하려는 움직임인 것 같고요. 바뀔 것이라는 기대를 놓지 않고 계속 기록하고 감시하다보면 바뀌겠죠.”

마녀는 요즘 ‘연대자 D’(@D_T_Monitoring)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한다. n번방 사건 재판을 쫓아다니며 모니터링하고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한다. “피해자의 말·시간·자리를 지킵니다.” 마녀 트위터의 소개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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