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서

2020.05.03 20:35 입력 2020.05.03 22:42 수정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생명의 서’). 2013년 2월 상명하복 조직문화를 바꾸려다 좌절하고 정직 4월 강제휴가에 들어갈 때, 읊조렸던 시구절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일회성 항명인 과거사 재심사건 무죄구형 강행과는 달리, 징계취소소송은 조직과의 장기전이라 보복이 두려웠지만, 고민 끝에 결행했습니다. 위법한 지시를 한 간부가 아니라, 법대로 한 검사가 징계받는 악선례를 남길 수 없으니까요. 척박한 검찰에 검사로서의 양심을 지켜줄 버팀목 하나 세울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 싶었습니다.

[정동칼럼]생명의 서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그리움’). 5년에 걸친 징계취소소송 끝에 징계를 취소하긴 했는데, 검찰은 까딱 않더군요. 위법한 지시를 하고 징계권을 오남용한 간부들에 대한 문책을 요구했었습니다만, 대검은 그들에게 잘못이 없다며 징계를 거부했습니다. 지시가 위법하다는 판결도 검찰공화국 성벽을 감히 넘어서지 못합니다. 궁리를 거듭했지요. 무엇을 해야 하는가. 5개년 계획을 다시 수립했습니다. 위법한 지시를 한 간부, 지시대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해서는 안될 일을 저지른 검사를 처벌한 선례를 만들어보기로. 상명하복에 주눅 든 검사의 용기를 받쳐줄 지지대 하나 세울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싶더군요. “천 번의 헛된 시도를 하게 되더라도 천한 번의 용기로 맞서리니” 시구절을 읊조리며 결기를 다졌습니다.

수사지휘권과 기소독점권은 검찰의 ‘절대반지’입니다. 수사하지 않으면 증거가 없어 기소할 수 없고, 증거가 있어도 못 본 척하면 그만이니, 검찰은 치외법권이지요. 예외적으로 법원이 기소를 명령하는 재정신청 제도가 있긴 한데, 기소명령을 이끌어낼 증거를 검찰은 찾지 않을 테고, 경찰은 검찰 방해로 찾을 수 없을 테니, 웬만해선 재정신청 해봐야 소용없지요. 하여, 저는 사실관계가 대부분 드러나, 증거가 아니라 법리가 주된 쟁점인 사례를 골라 고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검찰이 검사들의 공연한 범죄를 요란하게 덮어버린 사건 중 외력에 떠밀려 뒤늦게 기소한 사건들이 마침 있었지요. 서지현 검사의 ‘미투’로 서울남부지검 김모, 진모가, 시민단체 고발로 공문서 등을 위조한 부산지검 윤모가 뒤늦게 법정에 세워져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검찰이 당시 사실관계를 다 조사하고도 징계와 형사처벌 없이 명예퇴직과 의원면직을 허락했음은 유죄판결 기록에서 드러났으니, 징계와 형사입건하지 않은 검찰 조치의 적법성 여부가 쟁점인 사안. 징계와 형사입건 기준은 법령과 행정규칙에 상세히 나와 있고, 전직 대법원장, 민정수석, 경찰, 교장 등 여타 직업군들의 유사사례를 처벌한 실무례가 쌓여있지요. 하늘이 검찰을 아직 버리지 않았구나 싶어 고발장을 작성하며 감사했습니다.

너무도 뻔한 사건이지만 무소불위 검찰이라, 2018년 5월 전직 검찰총장 등을 고발하며 수사결과를 예상했었습니다. 속칭 ‘정책미제’로 검사실 캐비닛에 방치되어 있다가 공소시효 완성되기 직전 불기소할 테니 2020년 4월쯤 재정신청할 거란 걸. 까마득하게 보이던 2년이 쏜살같이 지났네요. 지난달 말, 뉴스로 불기소 결정을 접했는데, 이유를 바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검찰의 추한 민낯을 보고 싶지 않은, 내부자로서의 슬픈 방어기제지요. 결국 확인했고, 예상대로 고통스러웠습니다. 2013년 6월 친고죄 폐지 후 무관용 원칙에 따라 성폭력사범들을 엄벌해온 검찰이 정작 내부 성폭력에 대하여는 “친고죄 폐지는 피해자 보호 취지를 반영한 것일 뿐 피해자 의사에 반해 의무적으로 형사입건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우기고, “검찰 수뇌부가 피해자 의사 존중 원칙, 2차 피해 우려 등을 감안하여 가해자들의 형사입건 및 감찰을 하지 않은 것이니 정당하다” 등의 궤변으로 가득 찬 불기소 이유를 읽고 있자니, 검찰을 되살릴 수 있을지 아득하고 막막해집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복’). 2019년 8월 울산으로 부임한 후 매달 우체국에 들러 참고자료를 발송했습니다. 수사의지 없는 검찰이라, 탐문수사와 법리 검토는 제 몫이지요. 결국 검찰이 불기소했기에, 지난주 계획했던 대로 우체국에 들러 검찰을 되살릴 생명의 서, 재정신청서를 띄웠습니다.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새로이 펼쳐진 길, 감사한 마음으로 계속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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