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가 일깨워준, 있는데 잊은 것들

2020.05.21 03:00 입력 2020.05.21 03:01 수정

[김범준의 옆집물리학]‘틈새’가 일깨워준, 있는데 잊은 것들

늦잠에서 눈을 떠 일어나 커튼을 젖힌다. 눈부신 햇살이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면, 방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작은 먼지들의 경이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헤엄치듯 부유하며 햇빛에 반짝이는 먼지들의 멋진 운동을 넋 놓고 바라본다. 빛이 만들어낸 길의 밖으로 나간 먼지 입자는 감쪽같이 사라져 보이지 않고, 거꾸로 밖에서 들어온 입자는 이제 눈에 띄기 시작한다. 있던 먼지가 갑자기 소멸한 것도, 없던 먼지가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니다. 틈새와 균열을 통해 들어온 빛은 있지만 몰랐던 작은 존재들을 비춘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구름 잔뜩 낀 날 비가 그치면,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구름 사이의 틈을 뚫고 땅을 비추는 햇빛의 기둥이 갑자기 등장할 때가 있다. 산꼭대기 높은 곳에서 멀리 바라본 이 장면은 정말 장관이다. 척박한 일상을 살아가는 힘든 지상에서 고개를 들면, 때 묻지 않은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이 보인다. 많은 종교에서, 죽으면 간다는 장소인 천당의 지정학적 위치로 ‘하늘’을 지목한 이유다. 비가 그쳐 맑아진 대기를 뚫고 저 멀리 보이는 햇빛의 기둥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현실의 세상과 사후의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처럼 말이다. 여러 종교화에 표현된 승천의 이미지, 빛의 기둥을 따라 외계인의 우주선이 위로 올라가는 SF영화의 장면도, 비슷한 광경을 묘사한다.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빛은 직진해 경로 중간에 놓인 입자들을 만난다. 입자마다 모양도 방향도 제각각이니, 입자에 부딪힌 빛은 사방팔방으로 난반사한다. 온갖 방향의 반사광 중, 어쩌다 우리 눈의 방향을 향한 빛의 일부가 눈 속 망막에 도달한다. 그러고는 시각을 담당하는 세포에 전기신호를 만들고, 그 신호가 뇌에 전달되어 모이면, 우리 뇌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 늘 일어나는 과정이다. 창틈으로 들어온 빛의 경로가 경로 옆에 비켜선 우리 눈에 보이려면, 빛을 난반사하는 입자들이 있어야 한다. 구름 사이를 뚫고 진행하는 빛의 기둥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저 위, 흰 구름 떠다니는 하늘도, 우리가 사는 지상의 세상처럼 햇빛을 난반사하는 온갖 것들이 있는 불완전한 세상이다. 구름 사이를 뚫고 땅으로 내려오는 햇빛의 광선은 티 없이 완전한 하늘의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저 위 하늘과 우리 사는 땅 사이에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있지만 보지 못했던 온갖 티끌의 존재를 알려준다.

우주 공간에서 벌어지는 전함들의 전투 장면이 담긴 SF영화들이 있다. 전함이 파괴되어 폭발할 때, 효과음을 들려주는 것은 과학적인 오류다. 우주 공간에는 공기가 없으니 소리가 전달될 수 없다. 효과음뿐 아니라, 광선무기가 발사되어 적을 공격하는 영화 장면도 오류다. 진공인 우주 공간에는 빛을 난반사할 입자가 없으니, 빛의 경로에서 벗어난 관찰자는 레이저 광선을 볼 수 없다. 과학적 오류가 없는 영화라면 우주 전함에서 발사한 레이저 무기의 광선을 관객은 볼 수 없다. 두 전함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챌 수 없는데 갑자기 한 전함이 소리 없이 폭발하거나 파괴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긴박감이 느껴지지 않아, 아무리 치열한 전투도 좀 싱겁게 보일 것이 분명하다. 오류인지는 잘 알지만, ‘콰쾅’ 효과음과 함께 멋진 레이저 광선을 ‘숑숑’ 교환하는 영화 속 전투 장면을 필자는 더 좋아한다.

물리학의 발전 역사 곳곳에 ‘틈새’가 등장한다. 가는 틈새로 입사한 빛을 프리즘으로 굴절시켜 색색의 무지개 빛깔로 분해한 뉴턴의 광학실험도 유명하다. 색이 없는 햇빛이 다양한 색을 가진 여러 빛의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명확히 보인 실험이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나의 인생 책이다. 동명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본 인상적인 장면을 기억한다. 작은 틈으로 들어온 햇빛을 프리즘으로 굴절시켜 분해해 커다란 방 어두운 방바닥에 넓게 펼친 장면이다. 길게 바닥에 펼쳐진 빛의 스펙트럼에서 방바닥 중간의 일부에서만 무지개 색깔이 보인다. 이렇게 좁은 가시광선 영역을 벗어난 곳에도 분명히 도달하는 전자기파가 있는데 우리는 전혀 보지 못한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빛이 우리가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이, 이전의 세상에 비해 과연 달라질지, 달라진다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달라질지, 어느 누구도 아직 확실히 말하지 못한다. 그래도 분명한 것이 있다. 코로나19가 만든 우리 사회의 균열과 틈새는 이전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여준다. 이전에는 모든 면에서 본받아야 할 것으로만 보였던 서구 선진국의 맨얼굴에 실망하기도 했고,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우리의 자랑스러운 모습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많이 지치고 여전히 힘들지만, 매일 숨 쉬는 공기처럼 익숙해져 잊고 있었던, 일상의 고마움을 깨닫게 된 것은 소중한 경험이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의 우렁찬 함성, 콘서트홀에서 직접 듣는 생생한 음악이 그립다. 친한 친구 여럿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함께 나누던 왁자지껄한 대화, 동네 헬스클럽에서 땀 흘린 뒤의 샤워도 생각난다. 샤워하려고 운동한 것은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내가 정말 좋아했던 일상의 경험이다. 강의실을 가득 채운 학생들의 생생한 질문도, 수업 중 몰래 휴대폰으로 딴짓하던 모습도, 수업이 재미없는지 강의실을 살짝 빠져나가던 학생과 눈이 마주쳤을 때의 입가의 어색한 미소도, 무척이나 그리운 일상이다. 틈새로 들어온 빛은, 있는데 잊었던 작은 것들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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