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통일을 지우자

2020.06.02 03:00 입력 2020.06.02 03:05 수정

통일이 ‘아편’이자 ‘종교’였던 시절이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념적으로 통일에 낚였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바람으로 통일운동이 급속히 확산되던 때가 그랬다. 그중에서도 1989년은 방북사(史)의 기념비적인 한 해였다. 황석영 소설가, 문익환 목사,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당시 의장이 임종석) 대표로 임수경, 그리고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문규현 신부의 ‘북한 잠입’이 모두 같은 해에 일어났다. 암울했던 시기에 통일운동을 향해 신앙과도 같은 열정이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시대와의 불화’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훌쩍 지났다. 그래서 묻는다. 우리의 소원은 여전히 통일인가.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올해 초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작년 12월 기준 국내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52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4.9%를 차지한다. 여기에다 출신국별 거주지가 형성되는 등 우리 사회가 빠르게 다문화공동체로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 대명사이며, 핵보유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질서 있는 통일’이 과연 가능할까.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2019년 ‘통일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20.1%가 통일이 “매우 필요하다”고, 32.9%는 “약간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이에 반해 “반반·그저 그렇다”라고 응답한 비율은 26.5%, “별로 필요하지 않다”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응답한 비율은 각각 15.7%와 4.8%였다. 통일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중은 53.0%로 2018년의 59.8%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든 반면,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고 답한 비율은 20.5%로 2018년의 16.1%에 비해 증가했다.

그리고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로 “같은 민족이니까”로 응답한 비중은 계속 감소 추세(2008년 57.9%에서 2019년 34.6%)인 반면, “남북한 간 전쟁위협을 없애기 위해”라고 응답한 비중은 꾸준히 증가(2008년 14.5%에서 2019년 32.6%)하고 있다. 이참에 우리의 소원이 여전히 통일인지를 두고서 성찰적 반성을 해봤으면 한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간 통일담론들이 다분히 감상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면 점차 고도화되고 있는 북핵은 실재하는 최대 위협이다. 핵을 두고서 평화적 통일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북핵을 건너뛰고 단숨에 통일을 노래하는 것은 마치 곶감에 분(粉)이 없다고 밀가루를 처바르는 격이다. 둘째, 한국은 더 이상 ‘단군의 자손’들로만 이루어진 순혈 공동체가 아니다. 국내 거주 외국인 수가 이미 대구(243만명), 충남(211만명)을 넘어섰다. 마지막으로, 북한이탈주민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의 민낯을 드러냈다. 통일이 되더라도 북한 ‘인민’을 편견 없이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미국과 중국이 전쟁 일보 직전까지 치닫고 있는 엄중한 상황에서 평화적 통일은 언감생심 환상이다. 평화적 공존이 최선책이다. 실제 이행하기가 어렵다는 점도 안다. 그럼에도 공존을 유지한 채 통일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어떻게 하면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을 훼방꾼이 아닌 협력적 동반자로 이끌 것인가에 더 깊이 고민했으면 한다. 동시에,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바람개비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흐름에 어느 때보다 더 예민해야 함은 물론이다.

사람들은 이제 통일에 ‘핫’하지 않다. ‘나쁜 결혼’(bad marriage)보다 ‘멋진 이혼’(good divorce)이 쿨한 시대에 더 맞다. 신뢰는 낮고 불확실성만 높은 현재의 ‘남·북관계’에서 통일(good marriage)을 논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통일 해법은 평화 ‘과정’ 속에서 찾아질 것이다. ‘남·북관계’가 최악(bad divorce)으로 치닫기 전에 지속적으로 평화를 이야기하고 그것이 곧 통일임을 깨달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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