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곤 소설, 잇단 무단인용…사생활 침해 이어 ‘창작윤리’ 도마에

2020.07.19 21:26 입력 2020.07.19 21:35 수정

첫 소설집 ‘여름, 스피드’도 지인 메시지를 오토픽션 재현

자전적 경험 넘어선 ‘타인의 삶’ 동의·안전장치 없이 작품에 담아

출판사 초기 대응 안일…작가들 투고 거부·독자들 보이콧 이어져

소설집 <여름, 스피드>와 <시절과 기분>

소설집 <여름, 스피드>와 <시절과 기분>

‘퀴어 서사’로 문단 안팎의 주목을 받아온 소설가 김봉곤(35)은 자신의 두번째 소설집 <시절과 기분> ‘작가의 말’에 “나는 나의 삶을 쓴다. 그것이 내 모든 것이다”라고 썼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오토픽션’을 주로 써온 그는 최근 지인과의 사적 대화를 소설에 무단 인용했다는 주장이 잇따라 제기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거센 비판 여론이 일자 출판사는 책 판매 중단을 결정했지만, 논란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논란은 소설의 사생활 침해뿐만 아니라 한국 문단의 창작윤리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김 작가가 올해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단편 ‘그런 생활’에 지인과의 카카오톡 대화를 무단으로 인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지 일주일 만에, 그의 첫 소설집 <여름, 스피드>에서도 지인이 보낸 메시지를 그대로 옮겨 썼다는 또 다른 피해자의 폭로가 나오면서 파문이 커졌다.

단편 ‘여름, 스피드’에 등장하는 인물 ‘영우’가 자신이라고 밝힌 ㄱ씨는 지난 17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려 김 작가가 동의 없이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소설에 그대로 인용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성적지향을 포함해 자신을 특정할 수 있는 개인적인 정보를 소설 속 ‘영우’란 인물로 재현해 원치 않게 성정체성이 공개되는 아우팅 피해를 두 차례 입었다고 했다.

커밍아웃을 한 퀴어 소설가인 김 작가는 이 소설을 포함해 대부분의 작품에서 성소수자의 삶과 사랑을 핍진하게 그려 한국 퀴어 문학의 대표주자로 불리며 문단의 호평을 받아왔다. 하지만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도 여과 없이 소설에 등장시키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앞서 김 작가는 ‘그런 생활’의 사생활 침해 논란이 일자 지난 16일 입장문을 내 “저 역시 오토픽션이 타인의 실재하는 삶을 함부로 가져다 쓰는 것에 대한 미학적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무엇보다 당사자에게 소설화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것은 작가가 반드시 거쳐야 할 윤리적인 절차이자 작가로서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고 해명했다.

소설가 김봉곤이 올해 젊은작가상 수상작 단편 ‘그런 생활’에 이어 첫 소설집에 수록된 ‘여름, 스피드’에서도 지인과의 사적 대화를 무단 인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출판사 문학동네와 창비는 지난 17일 문제의 소설이 수록된 책의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문학동네 제공

소설가 김봉곤이 올해 젊은작가상 수상작 단편 ‘그런 생활’에 이어 첫 소설집에 수록된 ‘여름, 스피드’에서도 지인과의 사적 대화를 무단 인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출판사 문학동네와 창비는 지난 17일 문제의 소설이 수록된 책의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문학동네 제공

ㄱ씨는 김 작가의 이런 해명을 보고 피해 사실을 알리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김 작가로부터 어떤 동의를 구하는 과정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었다는 것이다. ㄱ씨는 “오토픽션이라는 이름하에 행하고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의 갈취가 여전히 실재하는 인물들에게 가해가 되고 있다”며 타인의 삶을 함부로 소설화하는 창작 방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ㄱ씨의 문제제기에 문학동네는 <여름, 스피드>와 ‘그런 생활’이 수록된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김 작가에게 확인한 결과 작가가 관련 사실을 인정했으며, “피해자분께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도 했다. 출판사 창비 역시 같은 날 ‘그런 생활’이 수록된 두번째 소설집 <시절과 기분>의 판매를 중단했다.

하지만 출판사의 안일한 초기 대응이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런 생활’에 ‘C누나’로 등장하는 ㄴ씨가 사생활 침해 문제를 들며 출판사에 공식적으로 수정을 요청하자 문학동네는 6쇄부터, 창비는 3쇄부터 문제가 된 메신저 대화 부분을 수정했다. 그러나 김 작가의 젊은작가상 수상 취소와 독자들이 수정 사실을 알 수 있게 이를 공지해달라는 ㄴ씨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판 여론이 커지고 나서야 문학동네는 16일 수정 사실을 알리고 수정 전 판매본을 교환해주겠다고 밝혔고, 이튿날 추가 폭로가 나오자 판매 중단을 결정했다. 수상작품집에는 김 작가의 소설 외에 올해 대상을 수상한 강화길의 ‘음복’ 등 소설가 6명의 단편도 수록돼 있다.

젊은작가상을 함께 수상한 김초엽 작가는 “소설의 가치가 한 사람의 삶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출판사와 작가의 뒤늦은 대응을 비판했고, 장류진·이현석 등 다른 수상자들도 출판사에 유감을 표했다. 이현석 작가는 출판사가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다면 두 출판사와 출판 계약을 해지하겠다고도 했다. 계간 문학동네와 창비 가을호에 원고를 싣지 않겠다는 작가들의 선언, 독자들의 출판사 보이콧 선언도 이어졌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문단의 창작윤리를 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는 18일 성명을 내고 “출판사도, 문단의 관계자들도 창작윤리가 무엇이며 자정 작용이 어떤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행태를 보였다”며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타인의 인격을 모욕하고 사생활을 침해할 권리는 그 누구도 갖지 못하며, 이것은 기본적인 창작윤리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독립출판 문학잡지 ‘비릿’도 “지난 7일간 한국 문학의 독자와 작가는 의도치 않게 한 개인의 일상에 치명적인 가해를 입힌 공범이 된 기분을 느껴야 했다”고 비판했다. 이 사건 이후 창비에 출판물 계약 해지를 요청한 정소연 작가는 자신의 SNS에 “기본적인 윤리의 문제를 질문하고, 확인하고 걸러내지 못한 문단 비평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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