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공분실에 차오르는 여자들의 말

2020.09.12 03:00 입력 2020.09.13 10:06 수정

‘박종철’과 ‘김근태’의 방만 따로 크게 꾸며져 있던 남영동 대공분실 5층 긴 복도 양편에, 여자들 11명의 방이 각각 만들어졌다. 고애순, 권명희, 김은혜, 김정숙, 배지윤, 안소희, 유가려, 유해정, 정순녀, 유숙렬, 양은영의 말이 차있는 방이다. 복도 바닥에는 붉고 굵은 글자가 적혀있다. “나의 말이 세계를 터뜨릴 것이다.” 전시회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의 한 장면이다. 코로나19 사태로 휴관이 이어지면서 남영동 대공분실의 새 이름 ‘민주인권기념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모든 전시를 온라인으로 관람할 수 있다. 같은 제목의 책을 ‘오월의 봄’에서 출간했다. ‘공백과 부재’로 남아있던 국가보안법 체제 속 여성들의 삶,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속 여성들의 위치와 조건을 통해 국가보안법을 ‘다시 다르게 말하자’는 것이며, ‘여성의 시선으로 기억과 역사를 새롭게 구성’해 국가보안법과 그 시절과 지금을 낯설게, 하여 새롭게 만나자는 거다.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한편 그 방들 바깥에서 국가보안법에 붙들린 채 각자의 고난을 함께 견디며 살아낸 수많은 “다른 여자들”도 떠올려보자. 3세, 6세 두 아이를 키우며 1987년 천주교 사회운동을 시작한 내게 첫 의제는 국가보안법이 되어버렸다. 빨치산과 ‘남파간첩’으로 30~40년의 독방 감옥살이를 하던 비전향 장기수들의 후원활동을 하면서, 자식과 서방을 국가와 법에 빼앗기고 오만 군데를 쫓아다니며 싸우는 ‘민가협 어머니들’을 쫓아다니게 된 거다.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국가보안법 사범의 아내로 민가협 활동을 하던 내 또래 한 여자에겐 5세, 7세, 9세 된 아이들이 딸려있었다. “가족이 잡혀간 것도 아닌데 머 한다고 이런 델 쫓아다니냐?”며 따지듯 부러워하던 그녀는, 살던 동네를 떠나고 친정과 시댁과도 멀어진 채 새끼들의 밥과 마음과 공부를 챙기며 밥벌이와 투쟁을 떠맡았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무너진 것들을 짊어지고 폐지 싸움까지 쫓아다녀야 하는 게 너무너무 억울하다”던 그녀를 쫓아다니느라 내 부부 싸움의 주제는 늘 국가보안법으로 뻗어버렸고, ‘애 엄마가’ ‘여편네가’ ‘살림하는 여자가’ 등 남편 입에 붙어있는 비난을 같이 운동하는 천주교 남자들에게서도 들었다. 엄마 따라 가끔 시위현장을 다닌 내 두 아이 중 하나는 한때 제복 입은 남자들을 보면 오줌을 흘리는 증세를 보였고, 친정과 시댁 사람들에게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쁜 엄마였다. 그러다가 서방이 만기 출소했고, 아빠로나 서방으로나 무능해져버린 남자와 살면서 그녀는 “솔직히 나 하나로만 치면 차라리 서방이 빵에 들어앉아 있을 때가 훨씬 낫다”고 쑥덕였다.

들어앉아 고수하고 사는 사람은 그렇다 치고, 밖에 팽개쳐져 무너진 삶과 세상에 부대껴야 했던 숱한 여자들. 30여년의 감옥살이를 한 비전향장기수의 어머니는 늙은 아들이 출소한 그해 겨울 당신 생일날 장독대에 올라, 하얀 눈 위에 검붉은 피를 쏟고 명을 끝냈다. 한국전쟁 때 의용군으로 월북해 1967년 남파 체포되어 30여년 감옥살이를 한 큰아들을 기다리며 살았던 ‘골수 빨갱이의 에미년’은 1998년 출소해 48년 만에 만난 아들을 2년 만에 그의 조국 북조선으로 보냈다. 북송 후 1년 만에 아들이 죽었고, 이듬해 그녀가 95세의 생을 마쳤다. 나로선 여러모로 동의할 수 없는 그들을, 그럼에도 옹호하며 쫓아다녔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피해와 투쟁을 훈장 삼는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살아 583명이 입건되고 41명이 기소되었다. 모든 정권은 ‘국가보안’을 핑계 삼아 권력을 강화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운동을 하다 중간에 나가서 기회를 얻은 사람들은 잘도 사리사욕을 챙기는데, 무식하게 끝까지 버티고 있는 사람들은 지난 삶이 경력이 되지도 못하고 역사가 되지도 못하고 이렇게 낙인이 되어 사는 것 같다” 양은영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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