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살아도 괜찮아…내 인생은 틀린 게 아니다”

2020.10.24 06:00


백수들이 출근하는 회사 ‘니트 컴퍼니’ 운영하는 비영리단체 니트생활자 박은미·전성신 공동대표. 우철훈 선임기자

백수들이 출근하는 회사 ‘니트 컴퍼니’ 운영하는 비영리단체 니트생활자 박은미·전성신 공동대표. 우철훈 선임기자

멈춤의 시간, 우린 이렇게


설치미술 작가 송호준씨는 ‘무업(無業) 기간’ 우울증을 앓았다. 6개월간 준비했던 프로젝트가 엎어진 뒤였다. 코로나19가 불러온 고립이 더해지자 그 후폭풍이 컸다. 송씨는 곧 ‘살아보고 싶은 삶’을 발견했다. 그는 “지하 작업실에서 벗어나 바다로 가고 싶다”고 했다. 비용을 마련하려고 소유물을 전부 내다 팔았다. 송씨는 “이 과정 자체가 즐겁다”고 말했다.

여행작가 겸 프리랜서 해외여행 인솔자 박건우씨는 코로나19 사태로 ‘여행업 실업자’가 됐다. “복귀에 대한 희망조차 들을 수 없는 상황”이다. 좌절 대신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미니멀리즘(최소주의)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박씨 부부는 가진 물건을 줄이고 줄여 총 40㎏의 이삿짐을 만들었다. 이들은 제주를 시작으로 “집 없이 계절에 따라 옮겨 다니며 살아가는 삶에 도전”했다.

박은미·전성신씨는 백수 회사 ‘니트컴퍼니’를 차렸다. 사원들은 오픈 채팅방에 출퇴근 도장을 찍는다. 명함도 판다. 업무는 필사하기, 만보걷기 같은 것들이다. 한양도성 걷기 같은 사원 모임도 종종 한다. 사훈은 ‘뭐라도 되겠지’다.

장난 같아 보이는 이 가상 회사의 설립 취지와 목표는 진지하다. 직장 동료였던 두 사람은 무업 청년들에게 삶의 의지를 불어넣고, ‘내가 원하는 삶’을 찾을 기회를 주고 싶어한다. ‘느슨한 연대’를 추구한다. 이들은 “누구나 무업 기간을 맞이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이 기간 고립되지 않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어제까지 우리가 알던 세상은 이제 없어.” 어느 게임광고 문구처럼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오늘, 내일을 가늠하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항공·여행·공연은 물론 업종을 가리지 않고 한파가 몰려들었다. ‘안정적 일자리’ 개념도 뒤집혔다. 누구나 무업 기간이 찾아올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불황이 삶을 지배할 때 ‘다른 삶’에 눈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만의 길을 찾아 걷는 사람들이다. 멈춤을 기회로 저마다 다른 속도,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비우고 판 돈으로 중고 요트를 사서 세계일주를 해보고 싶어요”

설치미술 작가 송호준, 하늘 꿈 내려놓고 ‘새 꿈’ 찾아 바다로

미디어 아티스트 송호준이 12일 서울 망원동 작업실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미디어 아티스트 송호준이 12일 서울 망원동 작업실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바다로 가기 위해, 인공위성 팝니다

코로나로 프로젝트 줄줄이 취소
‘세계 최초 개인 인공위성을 쏜 사람’
이 타이틀 만들어준 작업실 정리 중
“용두사미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서울 마포구 망원동 설치미술 작가 송호준씨(43·사진)의 132㎡(약 40평) 작업실은 직진으로 다섯 걸음 이상 걷는 게 불가능했다. 5층 상가 건물 지하 작업실 바닥엔 오래된 카세트테이프가 어지럽게 쌓였다. 선반과 테이블마다 각종 전자부품과 전자기기가 빼곡했다. 10년 전 상수동에서 이곳으로 이사 올 때 가져온 짐만 1t 트럭 10대, 5t 트럭 2대 분량이었다.

“10년이 지났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짐이 2배는 더 불었을 거예요.” 지난 12일 오전 물건을 밟지 않기 위해 현관으로 휘적거리며 다가온 송씨는 이렇게 말했다. 월세 80만원의 이 작업장에서 그의 삶이 보였다. 플라스틱 수납장 안에 쌓인 부품 더미는 그간 설치미술 작업의 노고와 애환, 성취를 보여주는 듯했다. 수납장엔 낚시용품과 자전거 등 취미용품도 쌓였다.

‘세계 최초 개인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사람’이란 수식어가 이 작업실에서 나왔다. 송씨는 2008년 “티셔츠 1만 장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개인 인공위성을 만들어 쏘겠다”며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송씨는 오픈소스를 활용해 청계천 세운상가 일대를 돌며 구한 부품으로 무게 1.33㎏, 가로·세로·높이 10㎝의 인공위성을 만들었다. 프로젝트 시작 5년 만인 2013년 4월19일 카자흐스탄에서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인공위성을 러시아 로켓에 싣는 데만 1억2000만원이 들었다. 인공위성의 통신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최근 인공위성 프로젝트에 이어 두 번째 ‘선언’을 했다. 송씨는 “가진 물건을 전부 팔고 작업실을 떠나겠다”고 했다. 실제로 작업실 한편에는 물건을 담으려는 종이상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인공위성 프로젝트 당시 만든 티셔츠부터 캠핑 가방, 애플 컴퓨터 등을 팔았다. 이날까지 200만원을 모았다.

송씨는 “저를 수집광으로 아는 지인들은 애착이 있는 물건들을 정말 팔 수 있겠냐 묻는다”며 “신기하게도 지금은 내려놓을 수 있는 상태가 된 것 같다. 당장은 가진 걸 다 비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비워야만 다른 걸 채울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고 말했다.

송씨가 삶의 방향을 튼 데는 코로나19 영향이 컸다. 전시장은 줄줄이 문을 닫았다.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가 장기간 지속되며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여러 차례 취소됐다. “최근 6개월간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엎어진 뒤엔 우울증이 세게 왔어요. 사람들과의 대화로 영감을 얻는 사람이었는데, 고립이 생긴 거예요. 이렇게 하다간 지하에서 해가 뜨는 것도, 지는 것도 보지 못하고 살겠구나. 이렇게 살지 말자 생각했어요.”

송씨가 당장에 선택한 대안은 작업실을 떠나 바다로 나가는 것이다. 그는 “3억원대의 중고 요트를 사서 세계 일주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지난 6월 예능 프로그램 <요트원정대>(MBC에브리원)를 통해 원정을 나간 경험이 있다. 북위 33도 아래 남십자성을 보려고 출항했다. 폭풍우 탓에 7일 만에 뱃머리를 돌렸던 당시 경험은 “실패”였다. 언젠가 다시 도전하고 싶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았다.

송씨는 “지금 같은 현실에선 바다에서의 경험이 더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고립되더라도 육지나 도시가 아니라 바다에서 고립되고 싶어요. 시국이 시국인 만큼 ‘왜 저래?’라며 비난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당장은 ‘좋아서’라고 답하고 싶어요.” 중고거래를 결심하게 된 건 돈 때문이다. 3억짜리 요트는커녕 자동차를 살 돈도 없다. 인공위성 발사 이후 뉴스, 예능 등 방송에 얼굴을 비추거나 ‘청년들의 멘토’를 찾는 강연장에 불려 다녔다. 그는 “유명한 데 비해 가진 게 참 없다”고 말한다.

설치미술 작가 송호준씨가 지난 12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인공위성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설치미술 작가 송호준씨가 지난 12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인공위성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돈은 버는 족족 인공위성 발사 비용을 마련하며 진 빚을 갚았다. 취미생활을 하는 데도 열심히 썼다. ‘노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게 신조다. 작품은 팔아본 적도 없다.

송씨는 “직장도 없고, 4대 보험도 없으니 은행에서 빌릴 수 있는 돈은 마이너스 통장 300만원이 전부였다”며 “가진 돈이 있다면 (물건을) 버리거나 기부하겠지만, 지금은 팔아서 돈을 모으고 비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세상은 송씨를 ‘별종’ 취급한다. 한때 제도권 안에서 치열하게 살았다. 고려대 전기전자전파공학부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공학대학원을 중퇴했다. 그는 “학창 시절엔 공부만이 제가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기 싫어서 공부를 놓지 못했죠. 대학에 가서는 나는 다르게 살 거야, 자퇴할 거야 노래를 불렀으면서 결과적으론 자퇴도 안 하고 대학원까지 갔어요. 모범생이었죠. 나가려면 진작 뛰쳐나갔을 텐데요.”

‘다르게 살겠다’는 바람은 대학원을 자퇴하며 이뤄졌다. “사실상 쫓겨났는데 그렇게 되니 그토록 꿈꾸던 무업자로 살 게 되더라고요. 작가나 예술가로 불리는 건 어쩌면 놀기 위한 핑계일지 몰라요. 대학원에서 나올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거든요. 나는 이제 구렁텅이에 빠지는구나. 근데 나와보니까 웬걸. 세상에 할 게 너무 많고, 대학 안 가고 사회에 바로 뛰어든 사람도 정말 많고. ‘어, 난 왜 이런 사람들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볼 기회가 없었지?’란 생각이 들었어요.”

송씨의 삶은 두 번째 전환을 맞았다. 그는 “당장엔 물건을 내다 팔고 있는 지금이 너무 즐겁다”고 했다. 그는 7년 전 만들었던 인공위성과 동일한 방법으로 만든 ‘쌍둥이 인공위성’을 2억원에 내놨다. 원가는 약 30만원이다. 아마존에서 35달러에 산 우라늄 원석으로 만든 작품 ‘방사능 목걸이’는 9억9999만9999원에 내놨다. “안 팔려도 재밌고, 팔려도 재밌잖아요. 그냥 소풍 가기 전날과 같은 설렘으로 이 시기를 보내는 거예요. 좌절하거나 우울감에 빠지는 대신 몰두할 일이 있으니까요.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괴로운 질문이나 후회의 순간을 맞닥뜨려도 금방 잊을 힘을 얻는 것과 같다고 봐요.”

그는 “요즘 같은 때일수록 용두사미로 살아도 괜찮은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7년 전 쏘아 올린 인공위성이 통신에 실패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만약 성공했다면 제 인생은 제가 컨트롤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을 거예요. 오히려 용두사미가 좋은 것 같아요. 용두사미가 어때서요? 거창하게 시작해 미약하게 끝나더라도 끊임없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요. 저도 많이 실패해보니 이제 알 것 같아요. 거창한 영웅담보다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해요.”

■“사람 속이는 일만 아니면 돈은 벌면서 살 거예요…단, 을의 자세로는 말고요”

여행작가·가이드 박건우, 코로나 실직에 더 굳건해진 ‘미니멀리즘’

[커버스토리]“다르게 살아도 괜찮아…내 인생은 틀린 게 아니다”

가진 것을 줄이니 버티는 힘이 생겼다

요즘 나의 직업은 ‘여행업 실직자’
낙담 대신 제주서 새롭게 살아보기로
이삿짐은 아내 것까지 합쳐서 40㎏
삶의 부피를 줄이며 버티는 힘 찾아

여행작가 겸 프리랜서 해외여행 인솔자인 박건우씨(36·사진)도 코로나19로 삶의 전환점을 앞당겨 맞이했다.

10년 넘게 여행 인솔자로 일한 박씨는 1년에 절반만 노동했다. 4월에서 11월까지 여행사에 소속돼 인솔자로 일했다. 남은 6개월은 겨울의 추위를 피해 따뜻한 곳을 찾아다니며 쉬었다. 박씨도 속수무책으로 확산하는 코로나19의 영향을 피해갈 순 없었다. 그는 요즘 자신의 직업을 소개할 때면 ‘여행업 실직자’라는 표현을 쓴다.

최근 거리 두기가 2단계에서 1단계로 완화됐다. 여행업계는 회복세를 보이지 못한다. 박씨는 “(업계가) 좋지 않은 수준을 넘어 모든 게 중단됐고 복귀에 대한 희망조차 들을 수 없다”며 “해외여행은 자가격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미래를) 가늠하기 어렵다. 종사자들이 모두 떠났거나 남은 사람들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예년 같으면 한창 바쁘게 일할 추석연휴를 처음으로 무업 상태로 보냈다. 예정된 인솔 업무는 이미 지난 3월 모두 취소됐다. 그는 좌절하거나 낙담하는 대신 삶의 방식을 바꿔보기로 했다. 가지고 있던 짐을 줄이고 또 줄였다. 박씨와 아내의 짐을 다 합쳐 위탁 수하물 가방 하나, 기내용 가방 두 개 총합 40㎏의 ‘이삿짐’을 만들었다. 그는 코로나19 이전부터 불필요한 물건은 최대한 사지 않고, 짐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미니멀리즘’ 생활방식을 추구했다. 코로나19로 미니멀리즘 강도를 높였다.

박씨 부부는 이 짐을 가지고 지난달 28일 제주로 내려갔다. 16일 박씨와 통화했다. 그는 “우리 짐을 모두 가지고 이동한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고 했다. 제주에 마련한 거처는 말 그대로 임시 주거공간이다. 그는 “계절에 따라 옮겨 다니며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의 삶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제주에 왔다. 향후 몇 년간은 집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버티는 힘’은 “미니멀리즘에서 찾았다”고 했다. 코로나19를 예측하고 산 것은 아니었지만, 부피를 줄이며 살았던 게 ‘요즘’을 버티는 힘이 된 셈이다.

고정 비용은 보통의 직장인 부부보다는 적은 편이다. “유지할 것도, 사야 할 것도 없는 상태예요.” 각종 공과금을 포함해 주거비는 60만원 선에 맞췄다. 통신비를 내기 시작한 지는 막 한 달이 지났다. 해외에선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심 카드를 쓰거나, 1년에 2만~3만원 정도의 선불폰을 사용했다. 지금은 통화 100분·문자 100건·6GB 알뜰폰 요금제로 월 7600원을 낸다고 했다. 물건은 꼭 필요한 것만 샀고, 불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남에게 주거나 버리는 식으로 삶의 작은 부피를 유지했다.

박씨가 번 돈은 지난해 1월 시작한 유튜브 채널에서 나온 수익이 전부다. 미니멀리즘 생활방식을 소개하는 채널인 만큼 “소비를 부추기거나 불필요한 물건을 생산하는 등 신념에 맞지 않는 광고 제의는 다 거절한다”면서도 “유튜브 수익이 있기 때문에 여행업에 종사하는 다른 분들보다 분명히 사정은 나은 편”이라고 했다.

일이 모두 끊긴 지난 4월 950만원을 기록한 통장 잔액은 6개월 후인 이달 1100만원이 됐다. 마이너스도 아니지만, 크게 늘지도 않았다. 이마저도 곧 절반으로 줄어든다. 박씨는 “이 시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며 “환경보호와 관련된 콘텐츠를 만들고 영어 자막을 추가하려고 500만원을 투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미니멀리즘 영향으로 4년 넘게 샴푸를 사용하지 않는 ‘노푸(물만으로 머리 감기)’를 실천 중이다. 최소주의 삶을 공유하는 아내 미키는 지난 1월부터 삭발한 머리를 고수한다. 그는 “불필요한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취향과 취미나 꼭 필요한 것마저 포기하는 것이 미니멀리즘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정말 필요한 일에는 돈을 쓰는 게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박씨는 중학교 때부터 록음악을 하며 20대 중반까지 밴드 생활을 했다. 하고 싶은 음악이 생계로 이어지지 않았던 경험은 그를 좌절시켰다.

“상업 밴드에 속해 행사를 뛸 때는 20대 초반에 만지기 어려운 돈을 벌기도 했어요. 30대였다면 시키는 대로 했을 거예요.

코로나19 이후 박건우씨 부부는 제주로 갔다. 이삿짐은 40㎏. ‘집 없이 떠도는 삶’을 선택했다. 박건우씨 제공

코로나19 이후 박건우씨 부부는 제주로 갔다. 이삿짐은 40㎏. ‘집 없이 떠도는 삶’을 선택했다. 박건우씨 제공

일이라 생각하고 감사하게 여겼을 텐데 그땐 젊고, 기고만장하니까 자리를 잡았다 착각하고 팀을 나왔어요. 하고 싶은 음악을 했는데 결과는 너무 안 좋았죠. 남들이 가진 것들을 같이 갖고 싶었고, 주류를 좇으려는 열망도 크다 보니 매일매일이 불행했어요.”

그러던 중 2009년 태국의 한 여행자 숙소에서 9세 연상의 아내를 만났다. 맨몸으로 해외여행을 다니는, ‘다른 결’의 삶을 사는 아내를 만난 뒤 박씨 인생도 180도 바뀌었다. 결혼하고 여행업에 종사하면서 물건을 비우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미니멀리즘으로 연결됐다. “물건이 적어질수록 저 자신에게 집중하게 됐어요. 아, 그동안 내 능력으론 절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갖고 싶어 했었구나. 정말 질투, 시기, 열등감이 엄청났거든요. 근데 비워보니까 그렇게까지 많은 물건 혹은 관계가 필요 없더라고요.”

박씨는 여행사들의 정규직 제안을 거절하고 프리랜서로서의 삶을 유지했다. “정규직을 제안한 모든 곳이 제게 머리를 자르라고 요구했어요. 업무 능력을 인정해 일자리를 제안하면서 손님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는 제 긴 머리를 문제 삼는 게 이상했어요. 부조리한 걸 납득할 만큼 제 삶을 맞출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씨는 “여행업에 종사하면서 만난 사람 중에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 분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다들 저에게 부럽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다들 견뎌야 하는 상황이 있고, 유지해야 하는 생활이 있으니 저처럼 살 수는 없다고요. 유지해야 할 집, 자동차, 인간관계 대신 자유로운 삶을 택한 셈이에요. 주류에서 조금 떨어졌지만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는 삶을 살다 보니 돈이 그렇게 필요한지도 잘 모르겠고요. 이렇게 말하면 많은 분들이 공감을 못하시긴 하지만요.(웃음)”

박씨 부부의 삶은 분명 평범하지 않았다. 박씨는 “우리의 방식을 남에게 강요하지도, 강요할 수도 없다”며 “다만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저희 노후를 걱정하는 분들이 많아요. 제가 반문하고 싶은 건 ‘왜 우리가 노후에도 돈이 없을 거라 생각하느냐’는 것이에요. 일은 언제든, 가리지 않고 할 거예요. 다만 지금처럼 자의 반, 타의 반 쉬어갈 때도 있겠죠. 사람 속이는 일, 무분별하게 뭔가를 생산하는 일만 아니라면 일은 언제든 할 것이고 필요한 만큼의 돈은 벌면서 살 거예요. 단, 을의 자세로는 말고요.”

박씨는 21일 제주 거처를 한 번 옮겼다. 제주 생활 이후의 계획을 묻자 “계획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제주에 올 땐 짐이 40㎏이었는데 지금은 더 줄었어요. 차도 마셨고, 비누도 썼으니까요. 저도 이런 생활이 처음이긴 한데 어디든 가면 되니까 불안하지 않아요. 코로나19가 끝날 때까지, 그리고 겨울이 지날 때까진 상대적으로 따뜻한 남쪽으로 옮겨 다니며 지낼 계획이에요.”

송호준·박건우씨 사례는 ‘다른 삶’의 다양한 형태 중 하나다. 삶의 지향점이 비교적 뚜렷했다. 이를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주변인이 존재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일이 줄어들면서 고민 끝에 대안의 삶을 선택했다. 이들의 선택엔 ‘왜 그래’라는 질문이 따라붙지 않았다. 다수의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답을 모른 채 치열하게 살아간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기도 쉽지 않다. 멈춤은 기회보다는 사회와의 단절, 좌절과 고립으로 인식될 확률이 높다.

■“혹시 백수가 돼 돌아오면, 그분들 다시 여기 입사할 수 있도록 최대한 버티는 게 목표”

‘니트컴퍼니’ 대표 박은미·전성신, 우린 백수가 아니라 ‘생활자’

‘니트컴퍼니 서울역점’에서 직원들이 업무회의를 하고 있다. 전성신·박은미씨가 운영하는 니트컴퍼니는 백수들이 다니는 ‘가짜 회사’다. 박은미씨 제공

‘니트컴퍼니 서울역점’에서 직원들이 업무회의를 하고 있다. 전성신·박은미씨가 운영하는 니트컴퍼니는 백수들이 다니는 ‘가짜 회사’다. 박은미씨 제공

‘뭐라도 되겠지’ 우리는 백수 대표입니다

백수들이 다니는 가상의 회사 운영
‘멈춤 = 뒤처짐’이라 여기는 청년들
고립되지 않게 소속감·성취감 부여
일의 공백기 때 사회가 안정감 줘야

박은미씨와 전성신씨는 ‘멈춤이 곧 뒤처짐’이라 생각하는 청년들의 불안감을 덜어주는 일을 한다. 정확히 설명하면 백수들이 다니는 가상의 회사 ‘니트컴퍼니’를 운영한다. “월급 빼곤 다 줄 수 있어요.” 지난 14일 종로구 혜화동에서 만난 박씨와 전씨가 웃으며 말했다. 니트컴퍼니는 무업상태에 놓인 청년들이 고립되지 않고 이 기간을 전환의 시간으로 보내도록 돕는 걸 목표로 한다. 사훈은 ‘뭐라도 되겠지’다. 니트컴퍼니에 입사하면 자유롭게 소속부서와 직함을 정할 수 있고, 명함·명찰 목걸이도 지급받게 된다. 지난 6월부터 9월까지 3개월은 사무실을 얻어 ‘서울역점’을 운영했고, 현재는 온라인점을 운영하며 90여명의 ‘직원’을 관리 중이다.

니트컴퍼니의 시작은 2019년 1월 박씨가 만든 블로그 ‘니트생활자’였다. 박씨 역시 6번째 퇴사를 하고 막 백수가 된 참이었다. 박씨가 마지막으로 다닌 회사 동료였던 전씨도 8개월 뒤 퇴사해 니트생활자에 합류했다.

박씨는 니트생활자란 이름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제 상태를 따져보니 그냥 백수보다는 니트(NEET·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청년 무직자)가 더 맞아요. 근데 사전적 뜻만 보면 일하기 싫어하고, 의욕도 없고 부정적이기만 했어요.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일 뿐 의욕은 많은데…. 오해다 싶었죠. 니트인 한편 일상을 즐겁게 열심히 살고 싶은 사람이란 의미로 ‘생활자’를 덧붙여 이름을 지었어요.”

한 달에 1~2회 한양도성 걷기, 미술관 관람, 북한산 등반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백수 모임’을 가졌다. 참가자가 늘고 참여 의사를 밝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난 3월 니트컴퍼니 온라인점이 문을 열었다. 오픈 채팅방에 모인 100인은 출퇴근을 알리고, 100일간 매일 자기 업무를 인증했다. 계단 오르기, 이불 개기, 필사하기, 만보걷기 등 업무는 다양했다. 어떤 사람은 칫솔 치약짜기를 업무로 정했다. 어떤 업무든 목표한 바를 수행하고 인증하면 격려와 칭찬의 말이 뒤따랐다. 박씨와 전씨는 채팅방을 관리하며 출근하지 않는 사람들의 안부를 챙겼다. 온·오프라인 통틀어 지금까지 약 300명의 백수 청년들이 니트컴퍼니를 거쳐갔다.

청년들이 니트컴퍼니에서 얻는 건 성취감과 소속감이다. 박씨는 “설문조사를 했더니 백수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돈 다음에 고립과 외로움이었다”고 말했다. “소외감을 느끼면 더 밖으로 안 나오고 악순환이 이어져요. 낮과 밤이 바뀌어서 몸도 망가지고, 아등바등하다 어쩌다 취업하더라도 열악한 처우에 퇴사를 반복하게 된 사례도 많이 봤고요.” 서울역점은 채용공고를 통해 지원서를 받았고, 고립 위험도가 높아 보이는 순으로 6명을 선발했다. 전씨는 “적어도 여기선 위아래가 없고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었다”며 “너 백수? 나도 백수!” 하면서 서로 위로를 받았다. 비록 가상이지만 소속과 이름이 쓰인 명함 한 장이 가져온 변화는 놀라웠다. “하루는 은행에 다녀온 참가자가 명함을 써봤다며 좋아하는 거예요. 사실 백수 신분으로 은행에 가면 위축되거든요. 명찰 목걸이를 하고 갔는데 은행원이 ‘근처에서 일하시나 봐요?’라고 물어보는 그 한마디가 너무 좋았대요. 사실 이런 명함이 없더라도 사회 구성원으로 소속감을 느끼면 좋을 텐데 그게 안 되니까요. 이런 경험도 너무 소중한 거죠.”

오랜 기간 니트 청년들을 지켜본 이들은 “무업 상태에 놓인 청년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씨는 “코로나19 확산과 니트컴퍼니 운영 기간이 겹치면서, 누구나 무업 기간을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저희를 찾는 분들이 늘어난 데는 사회 변화도 무관하지 않다고 봐요. 상황이 이런데 무조건 백수는 사회문제, 놀고먹는 한심한 사람들이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직장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고민해야만 하는 사람도 있고요. 무조건 취업해라, 돈 벌라고 말하는 건 근본적인 해결법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박씨는 “마지막 회사를 나오면서 직장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처음 3번은 제 성장을 위해 회사를 옮겼어요. 그런데 ‘옮김’이 3번을 넘어가면서 이력서에 쓰인 제 삶이 마이너스처럼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직도 많이 했고, 학벌도 별로죠. 여자에다가 나이도 많았어요. 조직에서 싫어하는 조건만 갖췄더라고요(웃음). 저 자신을 낮춰 입사했지만, 부당해고를 목격하거나 가임기 여성이란 이유로 계약연장을 거절당하기도 했어요. 내가 원하는 직장을 갈 수 없다면 직장 바깥에 다른 삶이 있지 않을까. 이력서를 더는 쓰지 않게 됐어요.”

진짜 회사든 가짜든 100여명이 드나드는 ‘백수 공동체’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일은 녹록지 않다. 운영 비용은 카카오, 아름다운재단 등 기업과 공익재단의 지원으로 충당했다. “안정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이들은 현재도 끊임없이 사업 제안서를 쓰며 ‘비빌 언덕’을 찾는다. ‘불안하지 않냐’고 묻자 박씨가 되물었다. “기자님은 불안하지 않으세요? 직장이 있어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잖아요(웃음).” 전씨가 맞장구를 쳤다. “불안감도 적응하면 돼요. 처음 백수가 되면 진짜 불안하거든요. 하지만 반복되면 ‘뭐라도 되겠지’ 생각하면서 불안감을 안고 살게 돼요.”

오늘도 니트컴퍼니 구성원들은 돈이나 사회가 정한 목표가 아닌 자신만의 꿈을 찾아 달린다. 얼마 전엔 한 참가자가 발달장애 아동 취업을 위한 사회적기업을 만들었다는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그들이 찾아낸 미래가 무엇이든 박씨와 전씨에겐 그 자체로 동력이 된다.

박씨가 말했다. “니트컴퍼니를 거쳐간 사원들이 이런 말을 해요. ‘내가 다시 직장에 들어가도 전처럼 불안하진 않을 것 같다. 퇴사해도 돌아올 곳이 생긴 기분’이라고요. 저희 목표는 그들이 혹시 돌아오게 된다면 다시 여기 입사할 수 있도록 최대한 버텨보는 거예요.” 전씨의 말이다.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정말 빨리 변하는 사회인데 사람들의 불안지수도 높고요. 굳이 저희가 아니더라도 사회 자체가 사람들에게 일의 공백이 생겼을 때 안정감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게 안 되는 사회이니까 그 사회에 균열을 내보는 게 저희 목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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