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산드라’를 위한 변명

2021.01.12 03:00 입력 2021.01.12 03:02 수정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는 아폴로 신의 저주를 받아 불길한 일들을 정확하게 예언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자신의 예언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는 인물을 비유적으로 일컬을 때 수시로 호명되곤 한다. 카산드라는 정치권을 오가는 ‘폴리페서’보다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꾸준히 내면서 민감한 정치적 이슈에 뛰어들기를 마다하지 않는 ‘공공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이자 뉴욕시립대 폴 크루그먼 교수가 대표적 ‘21세기 카산드라’이자 공공지식인이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지금 이 순간에도 대참사를 예언하는 카산드라 군단들이 곳곳에 있다. ‘정책의병(政策義兵)’들은 트위터, 유튜브, 블로그, 논문, 그리고 각종 정책보고서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경고음을 발신하고 있다. 그러나 입법과 예산, 정책들을 다루는 정치인, 관료들은 대체로 경고음에 둔감하거나 애써 귀를 닫으려 한다. 직업공무원들과 여당 정치인들은 낙관적 인식과 긍정적 전망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코로나 백신과 중증환자 병상의 조기 확보가 중요함을 경고했던 의료전문 카산드라들이 많았음에도 실기(失期)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국가안보 제방이 무너지면 국가 존망과 직결될 수 있기에 국가안보 영역에서 카산드라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관료들은 여러 가지 상황 발생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 어떤 대책이 국가이익에 최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에 대한 우선순위가 있는 답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관료의 ‘예기적(豫期的) 책무’이자 ‘전략적 자기분석’이다.

하지만 사건이 터져야만 문제해결에 집중하는 공무원 사회에서 카산드라는 비관론자이거나 아니면 정부 비판에만 골몰하는, 이를테면 ‘삐딱선을 탄 사람’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짙다. 단기적 유용성에만 골몰하는 관료들이 보기에 장기 전략과 기획을 강조하는 카산드라는 예지자라기보다는 군걱정을 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전문성에 있어서도 자신들이 고급정보를 갖고 있어 카산드라들에게 뒤지지 않으며, 오히려 높다고 자평한다. 대신에 이따금씩 모이(정책과제)를 적당히 뿌려주면서 카산드라들을 관리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편견이자 오만이다.

나는 이를 관료 개개인의 탓이라기보다는 일을 만들어 (이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떠안게 될) 책임이 오히려 직무를 태만해서 받는 징계보다 큰 관료사회의 고질적 풍토와 이를 경험적으로 내재화한 짬짜미 때문일 거라고 추정한다. 여기에다 빈번한 보직변경 탓에 국제정세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통찰력 있는 해결책을 관료들에게 기대하기란 언감생심이다. 주관적 판단이기는 해도 관료들 다수는 국가 이익의 최우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에 대한 사유(思惟)와 고민이 치열하지도, 깊지도 않아 보인다. 남북 분단이 우리가 원해서 만들어진 응어리가 아니라는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기에 주변 강대국들의 동향에 명민한 혜안을 마땅히 지녀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책결정자들의 주체적이고 창의적 의제설정 의지가 빈약해서 제대로 된 국가안보전략을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코로나19 팬데믹에 이어 기후위기 현상은 인류가 전례 없던 재앙과 혼돈에 직면할 수 있음을 암울하게 예고하고 있다. 닥칠 재앙은 급변적이고 복합적일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피해의 범위와 파급력 역시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어 선제적 예방은 필수적이다. 지적인 긴장과 비판적 시선을 늘 유지하려는 카산드라들의 예언에 정책결정자들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근본적 이유이다. 그래야만 소수의 인원이 암실(暗室)에서 만드는 정책의 수준(質)을 격상할 수가 있다. 2021년이 관료사회와 정치권 모두 카산드라들의 불편한 진실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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