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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세월호 생존자들, 국가배상소송 나선다

2021.04.12 06:00 입력 2021.04.12 09:35 수정

세월호 참사 당시 학생 20여 명을 구해 ‘파란 바지의 의인’으로 알려진 화물기사 김동수씨가 지난 2019년 4월2일 제주 제주시 사려니숲길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세월호 참사 당시 학생 20여 명을 구해 ‘파란 바지의 의인’으로 알려진 화물기사 김동수씨가 지난 2019년 4월2일 제주 제주시 사려니숲길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김동수씨(56)는 매일 저녁 항우울제, 수면제를 포함한 10개 이상의 알약을 입에 털어넣는다. 김씨는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소방 호스를 몸에 감은 채 승객들을 구조해 ‘파란 바지의 의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운송작업을 위해 자신의 화물차와 함께 세월호에 탑승했다가 참사를 겪었다. 그가 구조한 승객은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해 스무명이 넘는다.

‘의인’ 이전에 그가 ‘세월호 생존자’라는 사실은 조명되지 못했다. 그가 구조한 사람의 한편엔 구하지 못한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생사가 갈리는 최전선에서 구조 작업을 벌인 만큼 그는 사람이 목숨을 잃는 장면도 목격해야 했다. 참사 이후 불면, 우울, 죄책감, 분노조절 장애, 자해충동 등 증상이 생겼다. 2016년 세월호참사 배상 및 보상 심의위원회가 김씨를 상대로 배상금 지급을 결정했지만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단원고 학생들과 같은 나이인 작은딸이 성년이 되던 날, 그는 병원 화장실에서 자신의 팔뚝에 ‘죄인’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었다.

국가가 지급한 돈은 생계를 해결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누군가는 김씨가 억대 배상금을 받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그가 참사로 잃은 화물차 가격만 해도 1억원에 달했다. 그는 참사 이후에도 물에 잠긴 화물차의 할부금을 갚아야 했다. 정신질환으로 화물차 운전을 다시 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일 못하는 아빠 대신 참사 직후 기준 20대 초반, 고등학생이던 두 딸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는 2017년 3월부터 제주도 사려니숲길 탐방소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과거 화물차 운전으로 벌던 돈에 한참 못 미치는 수입을 거두고 있다.

11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세월호 참사 7주기를 앞두고 김씨를 비롯한 제주도에 거주하는 세월호 생존자 15명이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진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도 세월호 생존자를 지지하는 모임이란 이름으로 모인 이들은 지난 2015년 3월 마련된 4·16 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 피해지원법)에 의거해 배·보상을 신청하고 일정한 금액을 국가로부터 지급받은 바 있다. 국가배상청구 소송에 나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시 세월호 피해지원법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원 신청 기간이 법 시행일로부터 6개월 이내로 한정돼 2015년 9월29일까지 급하게 신청을 진행해야 했다. 자신의 병증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채 배·보상 수준을 산정해야 했다. 그 이후 발현한 병증 등의 피해는 제대로 구제받지 못했다. 세월호 피해지원법 제16조는 “심의위원회의 배상금, 위로지원금 및 보상금 지급결정에 대해 신청인이 동의한 때에는 국가와 신청인 사이에 민사소송법에 따른 재판상 화해가 성립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한다. 배상 신청 이후에야 정신질환이 나타나거나 신청 당시보다 정도가 심해지는 등 날이 지나 드러나는 괴로움이 있지만 추가적 배·보상은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일부 생존자는 자신의 정신적 괴로움과 경제적 어려움이 가족에 피해를 끼치는 것 같다며 이혼을 선택하고 혼자 살아가고 있다.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는 2015년 6월 김씨의 후유장해진단서에서 “외상사건으로부터 약 1년1개월 경과한 시점에서 증상이 고정되지 않아 장해 추정에 어려움이 있다”고 적었다. 증상이 전부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진단을 내렸다는 뜻이다. 다른 생존자의 진단서도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피평가자의 증상이 더 이상 호전되지 않고 고정되었다고 판단하는 시점, 즉 외상 후 최소 2년 이상이 경과한 후에 판정하는 것이 원칙이나 현 시점은 외상 후 1년4개월이 지난 시점이므로 (판정이) 적절하지 못하다.”

부족할 것이 뻔히 예상되는 배상금인데도 김씨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당시 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의 생계 대책 마련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한 생존자는 참사 이후 병원을 찾았다가 곧바로 정신과 진료를 받지 못한 채 건설업종에서 일했다. 입원하지 못하고 병원을 자주 찾지 못한 만큼 그가 국가에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입증할 근거는 부족했다. 김씨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자녀 때문에, 회사에 다녀야해서, 당장 돈이 급해서…. 생활상 이유로 배·보상금 산정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 많다. 이후 이들은 정신적 문제 등을 겪으면서 후회하고 있다”면서 “괴로운 사람들에게 국가가 차분히 상처를 들여다볼 시간을 주지 않고 강압적으로 밀어붙였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들을 대리하는 최정규 원곡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당사자들 대부분은 한시장애, 노동능력 상실 등을 사유로 배상액이 결정됐는데, 참사 이전 수입의 30% 정도를 4년 남짓 지급받는 수준에 그쳤다”면서 “당시 배상 결정은 피해를 불완전하게 평가한 채 이뤄졌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김씨처럼 지금도 트라우마 치료를 받는 등 피해는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리인단은 또 세월호피해자지원법이 장해 평가기간을 너무 짧게 잡아 피해자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점에서 위헌소지가 있다고 보고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도 고려하고 있다. 김씨 등 15명의 생존자는 13일 오전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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