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사랑했던 나의 가게들"...홍석천의 이태원 18년

2021.05.01 14:30 입력 2021.05.01 22:07 수정

지난 4월 2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방송인 홍석천씨를 만나 폐업한 식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작업실엔 폐업 후 버릴 수 없었던 소품과 그림들이 쌓여 있었다.  이준헌 기자ifwedont@kyunghyang.com

지난 4월 2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방송인 홍석천씨를 만나 폐업한 식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작업실엔 폐업 후 버릴 수 없었던 소품과 그림들이 쌓여 있었다. 이준헌 기자ifwedont@kyunghyang.com

유난히 손 뻗으면 닿을 듯한 연예인들이 있다. 배우이자 예능인인 홍석천(50)도 그중 한명이다. 1990년대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의 ‘쁘아송’으로 큰 인기를 누렸던 그는 서른 살에 커밍아웃했다. 이후 약 3년간 방송계에 발 들이지 못했다. “집 현관 앞에 ‘더러운 새끼’라는 욕설이 쓰여 있는 것은 애교 수준”이던 시절이었다.

고난의 시기에 홍석천은 식당을 열었다. 그리고 ‘이태원 홍 사장’으로 인생을 다시 시작했다. 외식업에서의 성공은 재기의 발판이 돼주었다. 그러나 그의 식당 이야기는 그저 ‘성공했다’로 요약하기엔 모자라다. 홍석천에게 식당은 자신을 편안하게 드러낼 수 있는 ‘소통 창구’였다. ‘홍석천다운 것’들을 채워넣은 공간에서 손님들이 만족할 때 그는 존재감을 느꼈다.

지난해 홍석천은 18년간 지켜온 ‘이태원 홍 사장’이란 분신을 잠시 내려놓아야 했다. 그는 이태원·경리단길에서 한때 식당을 7개까지 운영했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따른 임대료 상승과 건강 악화로 하나둘 접다가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입었다. 지난해 8월 마지막 남은 식당 ‘마이첼시’까지 폐업하면서 홍 사장의 가게는 모두 사라졌다. 당시 동료 상인은 이런 현수막을 붙였다. “누가 뭐래도 당신은 영원한 이태원 전설입니다. 좋은 시절에 다시 만납시다.”

이태원에 ‘홍석천 로드’가 생겨날 만큼 가게가 많았던 그는 역설적으로 폐업도 많이 한 사장이다. 지난 4월 26일 서울의 용산구 이태원동 작업실에서 홍석천씨를 만나 이제는 없어진 ‘홍석천의 식당’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첫 식당 얘기를 꺼내자 그는 의외로 내밀한 인생사를 들려줬다. 커밍아웃과 함께 ‘다시 찾아온 사랑’ 이야기였다. 홍석천의 가게들은 그의 삶을 관통하는 ‘열쇠 말’ 같은 존재였다.

지난 4월 2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방송인 홍석천씨를 만나 폐업한 식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작업실엔 폐업 후 버릴 수 없었던 소품과 그림들이 쌓여 있었다.  이준헌 기자ifwedont@kyunghyang.com

지난 4월 2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방송인 홍석천씨를 만나 폐업한 식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작업실엔 폐업 후 버릴 수 없었던 소품과 그림들이 쌓여 있었다. 이준헌 기자ifwedont@kyunghyang.com

-첫 식당 ‘아워플레이스’를 열었을 때가 서른두 살이었지요. ‘청년 창업자’ 홍석천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 이야기를 하자면, 커밍아웃 시점의 얘길 할 수밖에 없겠네요. 스물다섯 즈음에 방송을 시작해 과분한 사랑을 받다가 커밍아웃을 했어요. 당시 저는 사랑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유명해지던 시기에 그 친구(연인)는 직장을 잃고 매우 힘들어하고 있었죠. ‘한국 생활을 정리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함께 뉴욕에 가서 살려고 했어요. 실제로 뉴욕에 갔고요. 그런데 정착자금이 부족해 저 혼자 한국에 돌아와 방송하며 돈을 벌어 부쳤어요. 그런데 6~7개월 사이에 그에게 딴 애인이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커밍아웃은 그 이후에 한 건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꼭꼭 숨겨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선 사랑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동성애자인 것을 알고 그걸 약점 잡아 저를 조종하려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더는 감추고 싶지 않았어요.”

-커밍아웃 이후 3년이나 방송을 쉬었어요.

“그렇게 오래 일을 못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한창 잘나갈 때 사둔 아파트를 처분하고 유학을 가려고 했죠. 도망치려고 한 거죠.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 시선에 힘들었으니까요. 그러다 어느 날 ‘게이바’를 가보자 싶었어요. 그때까지 제대로 가본 적이 없었거든요. 모자도 안 쓰고 얼굴 까고 당당하게 들어갔죠. 거기서 한국에 온 영어선생님을 만났어요. 다시 사랑이 찾아왔어요. 그때 유학 생각을 접었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 있는데, 나 혼자 외국에 갈 수는 없다. 싸워보자!”

-안 그래도 ‘아워플레이스’의 뜻이 궁금했어요.

“그 친구를 2년 넘게 만나다 보니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름이 ‘아워플레이스’였죠. 외국인 친구들은 홈파티할 때 ‘레츠 고 투 아워 플레이스’라고 하거든요. ‘우리 집’같이 편안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뉴욕에 가서 ‘게이 커뮤니티’들을 봤는데, 그들처럼 당당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2004년에 그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이제는 나 혼자의 공간이구나’라는 생각에 이름을 바꿨어요. ‘마이엑스(My-ex)’로요. 인테리어를 바꿔 분위기도 새롭게 만들었고요.”

더는 ‘아워플레이스’가 아니니 ‘마이엑스’로 식당 이름을 바꾸는 지독한 솔직함, 그게 홍석천이었다. 마이타이, 마이홍, 마이치치스, 마이첼시…. ‘마이엑스’ 이후부터 그는 식당 이름에 ‘마이’를 붙였다. 홍석천은 자신의 식당을 ‘자아’의 일부로 여기는 사장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던 ‘마이엑스’(아워플레이스)는 사실 “돈은 벌지 못한 가게”였다. 솜씨 좋은 쉐프를 어렵게 모셔오고, 발이 부르트도록 일했는데도 창업 후 3년 내내 적자였다. 나이트클럽 DJ 아르바이트로 직원 월급을 겨우 챙겨줄 수 있었다. ‘이태원에서 외식업을 시작해 성공했다’는 말에는 그가 청년 창업자로서 겪은 실패의 시간이 생략돼 있다.

지난 4월 2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방송인 홍석천씨를 만나 폐업한 식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작업실엔 폐업 후 버릴 수 없었던 소품과 그림들이 쌓여 있었다.  이준헌 기자ifwedont@kyunghyang.com

지난 4월 2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방송인 홍석천씨를 만나 폐업한 식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작업실엔 폐업 후 버릴 수 없었던 소품과 그림들이 쌓여 있었다. 이준헌 기자ifwedont@kyunghyang.com

-혹시 장사 소질은 없나보다 생각한 적도 있었나요.

“그런 생각도 했죠. 첫 가게는 나를 오해하고 있던 사람들을 한명씩 만나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라고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었어요. 그런데 계속 적자만 내고 있었으니까 나중에는 ‘아, 나도 돈을 벌어야겠다’ 싶었어요. 부모님이 청양에서 포목점을 40년 하셨는데, 내가 그렇게 장사 재능이 없나 싶었죠. 첫 가게는 ‘루프탑’을 시도하기 위해 옥상에 만들었으니, 접근성이 떨어졌죠. 테라스가 있는 1층 자리가 탐났어요. 봐둔 곳이 있었고, 꼭 그 자리에 들어가고 싶어서 2년을 기다렸어요. 그렇게 시작한 게 ‘마이타이’였죠.”

-2000년대는 태국음식이 낯설 때잖아요. 손님들이 태국음식을 어색해하진 않았나요.

“많이 혼났죠(웃음). 화장품 냄새가 난다, 신맛이 나는데 상한 것 아니냐 등의 얘길 많이 들었어요. 다시 해달라는 손님도 있었고요. 주방장님은 태국에서 어렵게 모셔온 분이었어요. 손님들 지적에 주방장님도 속상하니까, 저와 싸울 때도 많았고요. 끝나고 맥주 한잔하면서 풀고…. 6개월 지나면서 맛이 (한국인에게 맞게) 잡힌 것 같아요.”

-그때부터 ‘대박’이었던 건가요.

“아뇨, ‘마이타이’는 첫달부터 대박이었어요. 야외 테라스에서 햇살을 받으며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고, 당시엔 태국음식점도 많지 않았거든요. 핫플레이스로 등극했죠. 첫달 매출이 6000만원이었고, 한달에 2억원까지 팔아본 적도 있어요. ‘마이타이’는 외식업의 성공이란 걸 저에게 맛보게 해준 가게죠.”

이후 홍석천은 또 다른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연다. 그 식당이 지난해까지 붙잡고 있던 ‘마이첼시’다. “거기(첫 식당) 되게 맛있었는데 왜 한푼도 못 벌었지” 하는 아쉬움이 끝까지 그를 놔주지 않았다. ‘마이첼시’의 첼시는 뉴욕 맨해튼 남서부의 지역명이다. 이탈리안 이민자들이 많은 이 동네의 감성을 담았다. 그리고 ‘마이첼시’까지 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진정한 외식업자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홍석천은 이런 식으로 ‘나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키는 도전을 거듭하면서 식당 여러 곳을 잇달아 내게 된다.

지난 4월 2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방송인 홍석천씨를 만나 폐업한 식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작업실엔 폐업 후 버릴 수 없었던 소품과 그림들이 쌓여 있다.  이준헌 기자ifwedont@kyunghyang.com

지난 4월 2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방송인 홍석천씨를 만나 폐업한 식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작업실엔 폐업 후 버릴 수 없었던 소품과 그림들이 쌓여 있다. 이준헌 기자ifwedont@kyunghyang.com

-소통 공간으로서 식당이 주는 희열을 느껴봤잖아요. 공간을 살아 있게 만드는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늘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연극영화과 출신이잖아요. 가게 만들 때 작품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콘셉트, 분위기, 인테리어 하나하나 다 고민하고 만들어갔죠. 문 열기 전에 직원들에게는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너네는 이제 배우야. 여기서 우린 재미있게, 멋지게 놀아야 해. 그러려면 우리는 매력이 있어야 해.’ 손님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도 많이 했어요. 제가 먼저 가서 ‘저랑 사진 찍고 싶지 않으세요?’라고 묻기도 하고….”

-기억에 남는 손님도 있죠.

“그럼요. 첫 가게에 루프탑이 있으니까 야경이 좋아 커플이 잘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어느 손님이 ‘홍 사장님, 저희 여기서 첫 데이트하고 잘 돼서 결혼했고, 아이가 이만큼 컸어요’라면서 아기를 안고 오셨는데 너무 기뻤어요. ‘없어진 줄 알았는데 그대로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손님들 보면서 오래 가게하는 보람을 느꼈죠. 가게엔 음식만 있는 게 아니고 추억이 있잖아요. 그분들 추억을 내가 뺏지 않았구나 했지요. 그래서 문 닫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어요. 누군가는 기억해줄 것이고, 다시 찾아와 줄 텐데….”

홍석천에게 제2의 인생을 살게 해준 이태원의 식당들은 이제 한곳도 남아 있지 않다. 홍 사장 역시 여느 자영업자들이 겪었을 숱한 어려움과 맞닥뜨려왔다. 사람만 믿고 다 ‘퍼줬는데’ 동업자가 등을 돌려 실패를 자초한 적이 있다(그는 자신의 책에서 ‘동업은 서류다’라고 강조한다). 가게를 믿고 맡긴 매니저가 몰래 직원들을 데리고 나가 인근에 창업을 하기도 했다. 패혈증에 걸린 줄도 모르고 과로를 하다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는 스스로 몇몇 가게를 접기도 했다.

그러나 홍 사장을 마지막까지 괴롭힌 것을 꼽자면, 임대료 상승과 이태원·경리단길 상권의 몰락 징후다. 사람이 몰려 장사가 잘 되니, 임대인들이 임대료를 지속적으로 올렸다. 이곳의 독창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던 상인들은 하나둘 쫓겨나기 시작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된 것이다. 거리엔 어느새 사람이 뜸해졌다. 그렇게 3~4년이 흘렀다.

2019년 홍석천은 TBS <오 마이 로드>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경리단길 살리기 프로젝트’에 나섰다. 예능 속 ‘탑게이’가 아닌 절박한 자영업자 홍석천을 만날 수 있는 방송이었다. “한때 직원이 200명이었는데 그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 저는 모릅니다.” 제작발표회에서 그는 눈물을 흘렸다. 동료 상인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속내도 털어놨다. “내 가게도 (한달에) 1000만원, 1500만원씩 손해야. 그걸 방송에서 벌어 월급 주고 있거든. 2년째 적자를 메우고 있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는 이 방송에서 ‘세금 생각하면 더 올려야 맞다’는 임대인에게 이렇게 일갈하기도 했다. “본인들의 땅값 상승을 누가 했는지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청년들이 청춘을 바쳐 가게 만들어 잘됐습니다. 건물주들은 사실 한 게 없습니다.”

지난 4월 2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방송인 홍석천씨를 만나 폐업한 식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작업실엔 폐업 후 버릴 수 없었던 소품과 그림들이 쌓여 있다.  이준헌 기자ifwedont@kyunghyang.com

지난 4월 2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방송인 홍석천씨를 만나 폐업한 식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작업실엔 폐업 후 버릴 수 없었던 소품과 그림들이 쌓여 있다. 이준헌 기자ifwedont@kyunghyang.com

-이태원과 경리단길의 가게를 모두 접었는데요, ‘마이첼시’만은 계속 이어가고 싶어했던 것으로 압니다.

“월세가 950만원이었어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죠. 임대인에게 50만원만 깎아달라고 사정했는데…. 끝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울었죠.”

-다시 이태원·경리단길에서 가게를 낼 생각이 있나요. 연남동, 익선동 같은 곳도 있잖아요.

“저는 떠나지 못해요. 저의 모든 이야기가 이태원에서 시작됐거든요. 처음 자취한 곳이 경리단길 반지하방이었고요, 커밍아웃한 후에 절 받아준 곳이 이태원이었고요. 성공하기까지 오늘날의 저를 있게 한 고향 같은 곳인데 못 떠나죠.”

그는 코로나19가 지나가면, 이태원이나 경리단길에 로봇을 활용한 가게를 내고 싶다고 말한다. 지금은 ‘홍 사장’을 내려놓고 라이브커머스 ‘홍마담샵’을 운영하고 있다. ‘홍마담샵’은 소상공인들의 제품을 ‘큐레이션’해 SNS 방송으로 선보이는 브랜드다. 반려견을 위한 영양식 브랜드 ‘플라잉 퍼피’도 곧 런칭한다고 했다. 촬영 스케줄도 여전히 빡빡하다. 가게를 접은 후에도 그는 ‘비대면’으로 여전히 바쁘게 살고 있다.

게다가 일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다. 막다른 길에 내몰린 성소수자들, 폐업 기로에 선 자영업자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삶이 괴로운 이들의 상담 요청을 기꺼이 떠맡고 있다.

슬며시 궁금해졌다. 왜 이렇게 열심히 살까.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살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물었다. “첫 번째는 엄마예요. TV에 안 나오면 걱정하세요. 방송은 엄마한테 인사하는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는 책임감이죠. 저는 성소수자를 대표하기도 하고, 이태원을 대표하기도 하니까. 지켜나가야 할 것들이 있어요.”

인터뷰가 끝나고 약 5시간 뒤 홍석천의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다. 그는 한 소상공인의 게장과 식혜를 홍보하고 있었다. ‘홍마담샵’ SNS 방송을 예능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애쓰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방송 종료 10분 전, 예상치 못한 장면이 이어졌다. 한 누리꾼이 “삶이 너무 힘겹다”고 토로했다. “곧 방송 마치겠다”던 홍석천의 표정이 달라졌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느냐, 부모님과 얘기하며 울고 안아드려라, 언제든 여기 와서 수다 떨자, 나도 마포대교 몇 번 왔다갔다 했다.” 용기와 위안을 전해주기 위한 분투가 이어졌다. 머리는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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