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루 피플]은 ‘See the world Through People’의 줄임말로, 인물을 통해 국제뉴스를 전하는 경향신문의 새 코너명입니다.
미국 쇠퇴한 공업지대(러스트 벨트) 백인 노동자들의 고난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베스트셀러 <힐빌리의 노래>의 저자 제임스 데이비드 밴스(37)가 고향 오하이오주에서 공화당 상원의원 경선에 도전하고 있다. 미국의 ‘합리적 보수’ 인사로 호평받았던 밴스는 본격 선거 운동에 들어가면서 ‘반트럼프 과거’ 지우기에 나섰다. 그의 출마로 오하이오주의 공화당 상원 경선 구도가 들썩이고 있다.
밴스는 지난 1일(현지시간) “이 나라의 지배 계급 엘리트들이 우리를 맹목적으로 강탈하고 있다”면서 오하이오주 공화당 상원 경선에 출사표를 던졌다. 2022년 11월에 열릴 상원의원 선거를 위한 공화당 경선 레이스가 벌써 시작된 것이다. 정치 신인인 그에게는 든든한 뒷배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던 억만장자이자 페이팔의 공동 창립자인 피터 틸로부터 지난 3월 정치자금 1000만달러(약 111억원)를 후원받았다.
밴스는 1984년 오하이오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2016년 발간한 자전적 수필 <힐빌리의 노래>에서 ‘트럼프 현상’을 가능하게 한 백인 노동자들의 박탈감을 섬세하게 분석해 호평받았다. 힐빌리란 미국 중부 애팔래치아 산맥에 사는 ‘시골 촌뜨기 백인’을 뜻하는 별칭이다. 그는 자신을 주류 잉글랜드계 백인들에게 차별받아온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계 출신이자, 대학 교육을 못 받은 수백만 백인 노동자의 자손”으로 규정한다. 그는 힐빌리의 감성과 문화를 잘 이해하지만, 온전한 힐빌리는 될 수 없는 회색지대 인물이기도 하다. 할머니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예일대 법대를 졸업하고 실리콘밸리에서 벤처사업가로 성공했다.
정치 경험이 없는 밴스의 출마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판해온 합리적 보수 인사로 꼽히기 때문이다. 2016년 대선 당시 밴스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문화적 헤로인”으로 규정했다. 특히 멕시코 국경장벽 건설이 일자리 부족의 대안이 될 수 없다면서 “트럼프 신자들은 약간의 기분은 좋아질지언정,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가 백인 노동 계급을 매우 어두운 곳으로 이끌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밴스는 출마 선언 후엔 “과거 트럼프 비판을 후회한다”고 말을 바꿨다. 그는 지난 5일 폭스뉴스에 출연해 “트럼프가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람들을 위해 많은 좋은 결정을 내렸다”고 해명했다. 그동안 트위터 계정에 올린 트럼프 전 대통령 비판 글도 모두 지웠다. 올해 초엔 플로리다주 팜비치에 있는 마러라고 리조트를 찾아가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까지 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오하이오주 웰링턴에서 퇴임 후 첫 대규모 유세를 벌였을 때도 참석했다.
반트럼프 인사도 트럼프 전 대통령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하이오주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때 오하이오주에서 8%포인트 차이로 승리하며 미국의 핵심 경합주였던 오하이오를 공화당 우세지역으로 바꿔놨다. 81.3%에 달하는 이 지역 백인 인구 상당수가 트럼프 지지로 돌아섰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결국 승리했지만 미국에서 오하이오의 지지를 받지 못한 대통령이 탄생한 것은 1960년 이후 60년 만에 처음이다.
러스트 벨트를 휩쓴 ‘트럼프 현상’에 대해 밴스는 2016년 CBC 인터뷰에서 “정치적 리더십에 너무 굶주린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인식해주는 누군가에 대해 꽤 낮은 기준을 갖게 된다”고 분석했다.
밴스의 과거 지우기 노력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이미 밴스를 향한 낙선 운동을 벌이고 있다. CNN은 1일 오하이오주 공화당원들 사이에서 ‘밴스는 반트럼프 인사’라는 문자 메시지가 돌고 있다고 전했다. 밴스는 지난달 26일 트럼프 전 대통령의 유세장까지 찾아갔는데도, 다른 경선 후보들과는 달리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호명받지 못하는 굴욕을 당했다.
오하이오주 경선은 밴스의 출마로 혼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CNN은 “밴스는 일종의 와일드카드처럼 상원 경선에 참여했다”고 분석했다. 그전까지는 제인 팀켄 전 오하이오주 공화당 의장과 조시 만델 전 오하이오주 재무장관의 양강 구도였다. 워싱턴포스트는 7일 밴스가 정치 신인인데도 공화당 자체 여론조사에서 두 거물급 후보의 뒤를 이어 3위를 차지했다고 전했다.
후발 주자인 밴스는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복원”을 내걸고, 문화적으로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포퓰리즘 정책을 일부 수용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는 부자 감세가 일자리를 늘린다는 보수의 전통적인 주장을 거부하고 임금 인상을 지지한다. 대신 트럼프 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의제를 계승하고 페이스북 등 빅테크 기업 비판에 가세했다.
오하이오의 경선 결과는 공화당 내 트럼프주의의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하다. 공화당 경선 후보들은 친트럼프 인증 경쟁을 벌이고 있다. ‘트럼프 복심’을 자처한 만델은 주요 경쟁자인 팀켄이 지난 1월 미 하원의 트럼프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침묵했다고 비판했다. 공화당 의장을 지낸 팀켄을 반트럼프 인사로 규정한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밴스의 반트럼프 이력도 당선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