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멸종 위기' 처한 아이슬란드어의 운명은

2018.02.28 06:00 입력 2018.02.28 06:01 수정

아이슬란드어는 보수적인 언어다. 새로운 단어가 필요해져도 외래어를 그대로 들여오는 일은 드물다. 대신 고대 노르드어를 기반으로 한 고유어로 바꾸어 사용한다. 컴퓨터를 의미하는 단어 ‘tolva’는 숫자를 의미하는 ‘tala’와 예언자를 의미하는 ‘volva’를 결합해 만들었고, 웹 브라우저를 뜻하는 ‘vafri’는 ‘돌아다니다’는 뜻의 고대 노르드어에서 따왔다. 단어나 문법 상의 변화가 거의 없어, 현대 아이슬란드 사람들도 13세기에 쓰여진 북유럽 전설을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다.

그런 아이슬란드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디지털 생태계에서 신조어가 생산되는 속도가 너무 빠른데다, 정보기술(IT) 기업들도 사용 인구가 많지 않은 아이슬란드어 지원에 소극적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26일(현지시간) ‘아이슬란드어가 디지털 멸종 위협에 분투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아이슬란드어의 위기를 집중 조명했다.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시민들이 거리를 걷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시민들이 거리를 걷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온라인 상에서 영어는 이미 아이슬란드어를 대체했다. 페이스북, 유튜브, 넷플릭스 등이 다양한 언어의 콘텐츠들을 쏟아내는 상황에서, 이를 전부 고유어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구글 자동 번역 기능이 제공되긴 하지만, 기초적인 문장조차 오역이 심해 사용할 수 없는 수준이다. 애플, 아마존 등 주요 IT 기업들도 별도의 아이슬란드어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사용 인구가 34만명에 불과해 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슬란드인들은 스마트폰 기본 언어를 영어로 설정해 사용하고 있다.

젊은 층으로 갈수록 이같은 흐름은 두드러진다. 아이슬란드 최대 사립대학인 레이캬비크 대학은 2010년 학내 영어와 아이슬란드의 공동 사용을 전면 도입했다. 석사 과정 전체와 박사 과정 일부가 영어로만 진행된다. 가디언 보도를 보면, 현지 중학교 교사들은 15세 학생 정도면 영어로만 일상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아이리쿠르 뢴발데슨 아이슬란드대 교수는 “아이슬란드 젊은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영어로 된 디지털 환경에서 보낸다”며 “모국어 문법이나 단어를 익히려는 유인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 대학 학생들이 학내 도서관에서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다. 아이슬란드 최대 사립대학인 레이캬비크 대학은 2010년 학내 영어와 아이슬란드의 이중 사용을 전면 도입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 대학 학생들이 학내 도서관에서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다. 아이슬란드 최대 사립대학인 레이캬비크 대학은 2010년 학내 영어와 아이슬란드의 이중 사용을 전면 도입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아이슬란드어가 단기간에 사라질 것이라 전망하는 학자들은 많지 않다. 현재 아이슬란드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34만명이다. 학교나 법원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역시 아이슬란드어다. 최근 아이슬란드 정부는 향후 5년간 언어기술펀드에 예산 4억5000만 아이슬란드크로나(약 48억원)를 책정해 오픈소스 개발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언어적 전통을 지키려는 이같은 노력은 지난 1000년간 아이슬란드어가 거의 변화하지 않는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이슬란드어가 ‘디지털 멸종 위기’를 무사히 넘기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자율주행차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까지 디지털 환경에서의 변화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디지털 환경에서도 아이슬란드어를 구현할 수 있는 기술 기반이 마련되지 않는 한, 아이슬란드어는 일상생활에서도 영어에 이은 차선책이 될 수밖에 없다.

비단 아이슬란드만의 문제는 아니다. 2012년 유럽의 언어연구기관 메타넷(META-NET)이 유럽 국가 언어 30개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한 결과 70%에 해당하는 21개 언어가 ‘디지털 멸종 위기’에 처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슬란드어를 비롯해 라트비아어, 리투아니아어, 몰타어 등이 고위험군으로 꼽혔다. 해당 연구를 진행한 독일인공지능연구소(DFKI) 게오르그 렘 박사는 “다수 언어와 소수 언어 사이의 격차가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며 “자원이 부족한 국가들에서도 기반 기술을 잘 닦아놓지 않으면, 그 언어는 디지털 멸종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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