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 기업들의 러시아 시장 철수가 잇따르고 있지만 일부 기업들은 철수 작업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복잡하고 불분명한 절차, 러시아 당국의 압박, 인수 후보 물색의 어려움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글로벌 담배회사 필립모리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지난 3월부터 철수 작업을 시작해 인수에 관심을 보이는 기업들과 협의를 진행해왔으나 3개월이 지나도록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있다. 필립모리스 측은 관련 절차를 담당하는 정부 기관이나 승인 절차가 불분명하다고 토로한다. 야첵 올자크 필립모리스 최고경영자(CEO)는 “짜증나게 복잡하다”면서 “혼을 쏙 빼놓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앞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맥도날드, 스타벅스, 나이키, 엑손모빌, 셸, 르노, 코카콜라, 펩시콜라 등을 포함해 다수의 글로벌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했거나 철수를 선언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름반도(크림반도) 강제병합 이후 부과된 제재와 정치적 제약 때문에 러시아는 대다수 기업의 주요 시장이 아니었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미국과 캐나다 주요 기업 1000개의 전체 매출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1% 미만이다.
필립모리스는 사정이 다르다. 1977년 당시 소련 국영 기업과 말보로 생산 라이센스 계약을 맺으면서 러시아 시장에 진출한 필립모리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생산공장이 있고 러시아 내 약 100개 도시에 영업소를 두고 있다. 2021년 러시아 시장은 전 세계 필립모리스 담배 및 가열식 담배 출하량의 약 10%를 차지했고, 필립모리스 순수익 310억4000만달러 중 6%가 러시아 시장에서 나왔다. 올해 초 러시아 내 필립모리스 직원은 3200명에 달했다. 3월말 기준 필립모리스 러시아 사업의 자산가치는 14억달러다.
러시아 당국의 압박도 서방 기업의 사업 철수를 어렵게 하고 있다. 러시아 검찰과 근로감독관 등은 서방 기업이 생산 감축이나 사업 철수 의사를 밝히면 곧장 해당 기업에 연락을 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WSJ은 “이 같은 방문과 경고장, 소환장에는 정부를 비판하는 현지 기업 대표들을 체포하겠다는 협박이 포함돼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 정부는 생산을 줄이거나 일정 숫자 이상의 정리해고를 단행한 서방 기업의 자산을 몰수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는 적대적인 국가로의 배당금 송환과 기계류 등 자산 수출을 금지한 상태다. 러시아 사업 매각을 추진 중인 세계 1위 컨테이너 선사인 머스크의 쇠렌 스쿠 CEO는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 사업을 중단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가 지속되면서 마땅한 인수 후보자를 찾는 데도 제약이 많다. 서방 기업들은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제제를 받는 기업에는 사업을 매각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르노는 지난달 러시아 자회사 아브토바즈의 지분 지분 68%를 러시아 국영 자동차연구개발센터(NAMI)에 단돈 1루블에 넘겼다. WSJ은 이는 르노의 선택지가 제한돼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러시아 시장이 세계 경제로부터 갑자기 단절되면서 러시아 내 사업의 적절한 시장 가치를 매기는 것도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은행 소시에테제네랄도 인수 후보를 찾는 과정에서 큰 손실을 감수했다. 소시에테제네랄은 지난 4월 러시아에서 운영하던 로스방크를 러시아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 재벌) 블라디미르 포타닌이 소유한 인터로스캐피탈에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정확한 거래 조건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소시에테제네랄은 러시아 사업 매각으로 수익이 30억달러 이상 줄어들 전망이다. 포타닌은 핵심적인 산업용 원자재 시장을 주무르는 ‘큰손’으로, 미국이 원자재 시장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제재 대상에서 그를 제외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포타닌이 러시아를 떠나는 해외 기업들의 자산을 헐값에 사들이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