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포르노’란 무엇인가

2022.11.17 16:23 입력 2022.11.20 21:11 수정

서구 자선단체 비판에서 출발

가엾은 이미지에 가려진 착취

“기부자 대신 옹호자 되라”

빈곤 이미지를 전시하는 과정의 문제를 담은 사진/비정부기구 공정개발컨설팅(Fair Development Consulting)

빈곤 이미지를 전시하는 과정의 문제를 담은 사진/비정부기구 공정개발컨설팅(Fair Development Consulting)

흑인 어린이들이 소 여물통처럼 생긴 빈 그릇에 팔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긁어내고 있다. 앙상한 팔다리와 부풀어 오른 배, 갈비뼈가 드러나 있다. 표정은 넋이 나가 있거나 울기 직전이다.

영국의 자선단체인 ‘재난비상위원회’가 1980년대 초 에티오피아 대기근 구호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사용한 이미지이다. 광고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이 단체는 1980~1984년 동안 2300만달러를 모았다. 다른 구호 단체들도 앞다퉈 비슷한 이미지를 내걸었다. 서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 아프리카 기근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이는 1985년 마이클 잭슨 등 유명 가수들의 ‘위 아 더 월드’ 뮤직비디오 제작이나 자선 콘서트 ‘라이브 에이드’ 참여로도 이어졌다.

가엾은 아이들을 내세운 이미지는 논쟁도 불러일으켰다. 이미지가 인종주의적 편견을 부추기고 동정의 대상이 된 사람들의 존엄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빈곤 포르노(poverty porn)’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중 김건희 여사가 캄보디아 심장병 어린이와 찍은 사진을 놓고 ‘빈곤 포르노’라는 비판이 나오자 이 표현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사실, ‘빈곤 포르노’는 이미 오래전 확립된 개념이다.

자선 열풍이 부추긴 무분별한 전시

영국 자선단체 재난비상위원회가 1980년대 초 사용한 모금 광고

영국 자선단체 재난비상위원회가 1980년대 초 사용한 모금 광고

덴마크의 한 원조단체 대표인 외르겐 리스너는 1981년 굶주리는 어린이들의 이미지를 모금 캠페인에 사용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사회적 포르노(social pornography)’라는 말을 사용했다.

리스너는 잡지 <뉴인터내셔널리스트>에 기고한 ‘불행을 파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글에서 포르노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경건함 없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벌거벗은 상태로 전시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며 “굶어서 배가 부풀어 오른 아이들을 광고에 공개하는 것은 포르노”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이미지가 당사자의 몸, 비참함, 슬픔 등을 무분별하게 전시한다고 봤다.

리스너는 자선단체가 내세우는 사진은 ‘물질적 풍요가 삶의 질의 핵심’이라는 관념을 더 탄탄하게 만들면서 불평등, 인종차별, 환경오염 등의 문제는 비서구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빈곤의 구조적 원인은 가려지고 풍요로운 서구인과 대조적인 불쌍한 아프리카인이 부각된다. 이런 이미지를 보고 모금을 하는 과정이 “다시 한번 서구 문명과 가치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형태가 돼 버린다는 것이다. 리스너는 이 같은 이유를 들어 “굶주린 아이의 이미지는 비윤리적”이며 “포르노에 가까울 정도로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리스너의 기고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모금을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반론도 있었지만, 1990년대가 될 무렵에는 자성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진에 찍힌 이들의 인권과 존엄성을 침해한다는 사진기자들의 고백도 나왔다. 병원이나 구호시설을 찾아가 “가장 불쌍한 아이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거나 더욱 비참해 보이도록 연출하는 행위 등이다.

유럽 비정부기구(NGO) 총회는 구호 기관이 다수의 세계를 묘사할 때 ‘애처로운 이미지’나 ‘편견을 부추기는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강령을 채택했다. 이 강령은 2007년 ‘국제 개발 NGO에 의한 미래의 모든 의사소통은 인간의 존엄성, 존중, 진실성의 핵심 가치에 기초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발전됐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 비슷한 강령이 잇따라 도입됐다.

영화·광고 비평 거치면서 개념 정착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한 장면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한 장면

‘빈곤 포르노’라는 말은 영국 언론 더타임스 칼럼니스트 앨리스 마일즈가 2008년 개봉한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비판하면서 사용했다. 이 영화가 영국을 비롯한 제1세계 관객들의 즐거움을 위해 인도의 가난을 오락거리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를 빈곤 포르노로 볼 수 있는지는 영화 팬과 평론가 사이에서 논쟁이 됐다. 하지만 빈곤 포르노는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적절하게 타인의 가난과 비참함을 재현하는 방식을 일컫는 개념으로 정착됐다. 콜린스 코빌드 영영사전은 현재 ‘포르노’의 뜻을 1. 포르노그라피(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성적 행위를 묘사하거나 보여주는 책, 잡지, 영화) 2. 특정한 주제에 대해 건강하지 않거나 관음증적 관심을 드러내는 출판물 또는 방송이라고 정의하며 2번의 예로 ‘빈곤 포르노’와 ‘푸드 포르노’를 들고 있다. 푸드 포르노는 음식이나 음식을 먹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담은 사진이나 영상을 말한다.

콜린스 코빌드 영영사전의 porn 검색 결과

콜린스 코빌드 영영사전의 porn 검색 결과

국제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의 2013년 TV모금 광고는 전형적인 빈곤 포르노에 해당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힘겹게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라이베리아의 영아의 모습을 담은 영상에 “이 나라에서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죽는다”는 자막을 넣었다.

지양하기로 한 1980년대 스타일의 자선 광고가 2010년대 다시 유행한다는 우려가 불거지던 가운데 이 영상을 둘러싼 논쟁은 특히 뜨거웠다.

빈곤 포르노라는 비판을 받은 세이브더칠드런의 2013년 모금 캠페인 광고

빈곤 포르노라는 비판을 받은 세이브더칠드런의 2013년 모금 캠페인 광고

미 공영라디오방송 NPR의 2015년 보도에 따르면 빈곤퇴치운동을 하는 영국 자선단체 ‘워 온 원트(War on Want)’ 활동가 존 힐러리는 “어린이를 타락한 방식으로 다룬 이미지”라고 비판했고, 네덜란드 활동가 프랭크 반 데 린데는 “유럽 NGO 활동강령을 위반했다”고 말했다. 미국 조지타운 대학에서 강의하는 개발전문가 제니퍼 렌틀러는 “개발도상국의 사람들은 능력이 없거나 수동적으로 구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간다 출신 작가 테디 루그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극단적인 사례를 찾아 가장 일반적인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 빈곤 포르노”라고 말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이러한 이미지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전 세계 취약한 어린이들이 직면한 문제를 피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세이브더칠드런도 비판을 받아들여 광고 영상을 삭제했다. 이후 연출된 사진을 사용하지 말고 절망적 상황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이미지를 피한다는 자체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가난에 대한 더 나은 시선으로

2017년  ‘최악의 자선광고상’을 수상한 영국 가수 에드 시런의 광고 영상 화면

2017년 ‘최악의 자선광고상’을 수상한 영국 가수 에드 시런의 광고 영상 화면

노르웨이 학생과 연구자들이 운영하는 국제지원재단(SAIH)의 지원을 받는 단체 라디에이드는 2013년부터 해마다 ‘최악의 자선 광고상(녹슨 난로상·Rusty Radiator Award)’을 선정했다. ‘빈곤 포르노’라고 비판받는 이미지는 국가·인종 간 불평등 문제라고 보고 경각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2017년에는 영국 유명 가수 에드 시런, 배우 톰 하디, 배우 에디 레드메인이 각각 참여한 광고가 수상작이 됐다. 해당 광고들은 백인 유명인이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의 구세주 역할을 하는 것처럼 묘사해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을 재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잠비아계 영국인 찬주 음완다는 “어린이를 포함해 수백만명이 가난하게 살며 직면하는 현실을 전 세계인이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백인 남성이 영양실조에 걸린 흑인 노숙자 어린이 두 명이 잠든 모습을 선 채로 지켜보는 장면을 촬영할 필요가 있느냐”고 블로그 플랫폼 미디엄에 실린 기고에서 말했다. 이듬해부터는 수상작이 나오지 않고 있다.

옥스팜의 2014년 광고

옥스팜의 2014년 광고

빈곤 포르노의 비판자들은 가난한 나라와 사람들을 돕는 방식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고 주문한다. 가엾은 이들을 내세운 모금보다 현지인들이 외국 정부나 다국적 기업, 자국 정부를 상대로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하는 것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므완다는 “빈곤의 해결을 위해서는 기부자가 아닌 옹호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은 2014년 “아프리카를 배고픔 아닌 장엄한 풍경으로 유명하게 하자”는 문구와 함께 아프리카 대륙의 아름다운 자연을 강조한 광고로 눈길을 끌었다. 캠페인 책자에도 현지인들이 환한 표정으로 직접 음식과 의약품을 보여주거나 확성기를 들고 있는 사진, 정의와 권리를 강조하는 문구가 주로 실리고 있다.

옥스팜의 2015년 2월 캠페인 소식지

옥스팜의 2015년 2월 캠페인 소식지

이런 광고에도 과도하게 희망적 모습에 집착하고 이를 연출한다는 비판이 있다. 논쟁을 거듭하면서 미디어나 구호단체 등이 다른 지역이 겪는 어려움을 표현할 때 현지인을 존중하고 현지의 다면적 모습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합의만큼은 전 세계에서 뿌리를 내려 가고 있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부 여성학협동과정 교수는 “빈곤 포르노는 제3세계를 묘사하는 사진 저널리즘의 타자화된 시선을 비판하기 위한 용어”라며 김 여사의 사진으로 불거진 논란 역시 “한국도 빈곤국을 타자화하지 않고 다른 문화와 인권을 존중하는 관점을 가질 수 있는지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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