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오늘과 내일

(15) 日流 연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

2007.05.11 15:02 입력

-따듯한 사랑, ‘회복’ 을 노래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소설은 현대 일본문학과 한국문학의 흐름을 이해하는 풍향계이다.

문학이 널리 읽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거나 하는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종말을 고한 듯 생각되었던 일본의 1970년대 후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등장은 일본 출판계와 독자층 모두에게 가히 충격적이라 할 사건이었다. 쉽고도 경쾌한 문체와 참신하고도 친근한 표현이 전혀 색다른 느낌을 자아내며 강한 흡인력을 발하는 그의 소설에 출판계는 긴장했고 독자들은 열광했다. 문학 평론가들만은 그의 소설이 너무 쉽게 읽힌다는 점을 이유로 그 몰사상성을 지적하며 논평의 가치조차 인정치 않은 채 일과성의 유행을 예고했지만, 그의 소설은 이후에도 꾸준히 읽혀졌을 뿐 아니라 세계적 규모의 독자층을 확보하면서 80년대 이후 일본문학의 신기원을 여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

80년대 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한국에 소개되자 한국에서도 일본에서와 흡사한 반향이 일었다. 독자들은 그의 소설에서 현대인의 감수성을 대변하는 새로운 표현과 형식을 확인하고 환호하면서 일본 소설에 대한 관심을 넓혀갔고, 출판계는 독자들의 환호에 놀라며 새로운 문학의 전기를 예감했다. 한편, 동시대 일본작가가 한국의 독서계에 무시못할 존재감을 드리우며 붐을 조성한다고 하는 이례적인 현상에 대해 해명의 의무를 느낀 일부 평자들은, ‘60, 70년대 미국 대중문화에 토대한 작가의 감수성이 독자에게 제공하는 문화적 동질감’이나, ‘풍족하고 세련된 도시 문화가 안겨주는 감미로운 충만감’ 등의 피상적인 요소에서 그 인기의 원인을 찾곤 했다.

이후 15년 남짓의 세월이 흐른 현재, 일본 소설은 더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번역, 소개되어 인기리에 읽히며 한국 문화계에 번지는 ‘일류’현상을 주도하고 있다. 일본 소설은 결국 문학의 위기가 우려되어 온 한국의 독서계에 뜻밖의 문학열풍을 발생시킴으로써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어 스스로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류’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진지하고 냉철하기보다는 다분히 방어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현재의 일본 소설 인기의 원인 역시, 일본 소설이 갖는 ‘산뜻하고 쿨한 분위기’나 ‘아기자기한 스토리’, 혹은 ‘경쾌한 화법’이나 ‘개인의 감성과 관계의 중시’ 등과 같은 형식적 차원의 요소로 설명되고 때로는 오히려 일본 소설의 ‘사회적 문제의식의 부재’나 ‘사상과 문체의 부재’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것은, 위기에 처했던 문학이 온갖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발흥에도 불구하고 성황리에 읽혀지고 있다는 사실이며, 지금 일본 소설은 적어도 그러한 의미에서 문학 본연의 사회적 효용이 다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일본 소설이 문학에 대한 새로운 시대와 사회의 요청에 일정부분 답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할 터이다. 그렇다면 일본 소설 붐을 맞은 우리의 시대와 사회를 이해하고 일본 소설 수용을 통해 더욱 새로워질 우리 문학의 향방을 생각해보기 위해서도, 이제는 좀 더 신중히 일본 소설이 담고 있는 시대적·사회적 메시지를 헤아려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 않을까.

가령 이 모든 새로운 현상의 출발점에 위치한 작가, 하지만 뚜렷한 주장 없이 아련한 ‘상실감’을 노래한 작가로서의 강한 이미지로 인해 어쩌면 일본 소설에 대한 ‘사상부재’의 편견을 결정지었다 할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로 돌아가 그가 어떠한 메시지로써 새로운 문학의 시대를 열었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특히 그의 작품 ‘노르웨이의 숲’은 한국에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하여 그의 이미지가 ‘상실의 작가’로 정착되는 데 적잖은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검토 대상이라 하겠는데, 이 ‘상실의 시대’조차도 조금만 자세히 읽어보면, 막연한 상실감만이 부유한다기보다 뚜렷한 대립구도 하에서 생의 무의미를 상대로 한 주인공 와타나베의 조용하지만 진지하고도 치열한 대결이 펼쳐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스토리의 발단에 위치하는 사건은, 주인공 와타나베의 고3 시절 친구 기즈키의 자살이다. 기즈키는 와타나베와 함께 수업 도중에 빠져나와 그와의 내기 당구 게임을 내리 3판 이기고서 오늘은 지고 싶지 않았다는 말을 남기고 헤어져 자신의 집 차고에서 빨간색 고급 스포츠카의 카라디오를 틀어놓은 채 배기가스를 마시고 죽었다. 아무런 유서도 없이, 그러나 용의주도하게도 자동차 휘발유를 채워 넣고 배기파이프에 고무호스를 이은 후 창문 틈새를 빈틈없이 테이프로 막고서 이루어진 그의 자살은, 그가 생의 패배자로서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닌, 의미 없는 인생을 그 자신이 먼저 기꺼이 버려준 것임을 뜻한다.

기즈키가 무의미하다고 결론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대학에 입학한 와타나베의 기숙사 선배인 나가사와를 통해 형상화된다. 나가사와는 아무 어려움 없이 동경대에 입학한 대단한 수재로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외무성에 들어가 외교관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외교관이라는 직업에 그 어떤 의미도 두지 않으며 오히려 사회적 위계의 정점에 오르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쓸개 빠진 ‘속물’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그는 사회의 정점에 오르는 자들이 추구하는 사회적 성공, 경쟁에서의 승리가 진정한 생의 기쁨과 무관함을 알면서도 단지 그것을 누리기에 너무도 유리한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포기하지 못하여 이왕이면 ‘국가’라는 가장 큰 물에서 타인을 딛고 서는 승부게임을 벌이며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서 생의 희열을 찾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렇게 나가사와는, 철저한 차별적 서열화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타인보다 우월하고 유리한 지위에 서고자 치열하게 경쟁케 함으로써 우리의 생에서 인간다운 따스한 감정을 앗아가는 비정한 사회의 전도된 가치체계를 반영한다. 대학진학을 목전에 두고 있던 기즈키가 무의미하다고 거부한 생은 바로 그러한 비정한 사회에서의 경쟁적 삶이었다.

기즈키의 죽음은 주인공 와타나베의 가슴에 ‘희미한 공기덩어리 같은 것’을 남기며 ‘죽음은 생의 대극으로서가 아닌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준다. 와타나베는 기즈키의 죽음에서, 우리의 생에 파고드는 공허감, 즉 무의미함의 인식이야말로 우리의 생에 죽음을 낳고 죽음으로 우리를 포획해가는 실체임을 깨닫는 동시에 그러한 죽음의 인력을 감지하게 되는 내적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즈키와는 달리 생을 무의미하다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의 무의미에 포획되어 고통받는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가 생을 침입해오는 죽음의 기운과 맞설 의지를 굳혀간다. 그리고 사랑을 유일한 무기이자 목적으로 한 그의 싸움은 기즈키의 여자 친구였던 나오코가 머무는 정신요양원 ‘아미(ami·친구)’를 방문하면서 구체화한다.

나오코는 기즈키의 죽음으로 사랑을 잃은 후 생의 의미를 상실한 채 죽음의 인력에 사로잡히게 된 여자이다. 그녀는 룸메이트인 중년 여인 레이코와 함께 ‘아미’에서 생활하는데, 레이코는 나오코를 찾아온 와타나베에게 ‘아미’에서의 사귐의 법칙, 즉 상처입은 영혼을 회복케 하는 관계맺음의 방법을, 무엇이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타인과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 돕는다는 것이라 설명한다. 자신의 허영이나 실리를 위해 타인을 속이지 않으며 정직하게 자신을 열어 보이고 타인을 수용하면서 서로의 능력을 서로를 돕기 위해 발휘하는 것. 그것은 인간적인 만남과 관계를 위한 지극히 단순하고도 기본적인 사랑의 공식이라 하겠으나, 비정한 차별적 가치체계와 경쟁시스템에 의하여 훼손되고 소실당한 인간적인 능력이다. 와타나베는 ‘매일 마음의 태엽의 감으며’ 이 사랑의 공식을 성실히 실천한다. 그의 능력은 그렇듯, 사랑을 소망해서는 오히려 낙오되어버리기 쉬운 사회에서 흔들림 없이 사랑을 바라고 실천하는 힘에 있다. 와타나베는 그러한 자신의 능력으로, 삶에 참된 기쁨을 부르는 ‘따듯하고 친밀한 느낌’을 죽음에 포획된 이들과 나누며 그들을 생으로 이끌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와타나베와 동류의 내적 투쟁을 벌이는 인물이 그의 대학친구인 미도리이다. 그녀는 실리성과 가장 거리가 먼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호기심, 그리고 가식 없는 솔직함으로 사회의 권위적 가치체계가 낳는 위선과 왜곡된 욕망, 획일적 사고에 맞서 인간적인 만남과 관계를 위한 사랑의 가치를 지켜간다. 그녀가 띠는 풍요로운 생기와 개성, 그리고 강인한 의지는 그녀가 지키는 사랑의 가치가 얼마나 아름답고 강한 것인지를 말해주며, 때문에 그녀는 와타나베와 서로의 영혼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진정한 조력자가 된다.

와타나베의 사랑의 힘은 결국 나오코의 자살을 막지는 못하지만, 아름다운 그녀의 죽음은 삶에 무의미를 낳는 힘에 맞서려는 그의 의지를 강화시키고, 레이코는 와타나베를 통해 다시금 사회로 복귀하여 생을 긍정하며 살 용기를 얻으며, 와타나베 자신에게는 비정한 사회에서 사랑을 실천해갈 자신의 생의 동지가 되어줄 미도리가 남는다. 나오코를 잃고 힘겨워하는 와타나베를 애타게 부르는 미도리가 클로즈업되는 작품 결미는 앞으로 그들이 함께 확산시켜갈 사랑의 가치와 그로 인한 영혼의 치유, 그리고 만남과 관계와 생의 의미의 회복을 암시한다.

이렇듯 적어도 ‘노르웨이의 숲’을 보는 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작가’가 아닌 ‘회복의 작가’라 함이 옳을 듯하다. 또 그에게 사회적 문제의식이 없다거나 작가적 주장이 결여되었다는 비판도 옳지 않다. 그는 현대사회의 비정한 권위적 가치체계에 의해 왜곡되는 인간성과 그로 인한 인간의 불행, 소실되는 삶의 의미를 직시하고 있다. 그리고 상처 받은 영혼을 감싸는 따스한 사랑의 온기가 가능케 할 참된 인간적 관계 속에서 생의 의미와 행복을 회복하길 소망하고 또 주장한다. 단 사회의 권위적 힘에 맞서고자 인간적 사랑의 가치를 주장하는 그의 목소리는 결코 높거나 강압적이지 않다. 그는 쉽고 가벼우며 자유롭게 흐르는 반 권위적 문체로써 인간의 영혼에 스며드는 따스하고 친근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과 한국에서의 새로운 문학 현상의 출발점에 현대사회에서 훼손된 인간성과 삶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 나지막하고 부드럽게 순수한 사랑의 가치를 노래한 작가가 위치하고 있음은 중요하다. 그로부터 시작해 현재에 이어지는 일본소설 역시 사랑으로써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고 움직여가는, 그래서 저마다의 내면에서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조용한 혁명’을 문학적 과제로서 이어가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정아|광운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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