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교수 “역사는 승자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2008.05.01 18:47 입력 손제민기자

“그이는 한국 근현대사가 낳은 호걸입니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이정식 교수가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경희대 교수사택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강윤중기자>

한국 근현대정치사 연구의 국제적 권위자인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겸 경희대 석좌교수(77)가 최근 820쪽에 달하는 ‘몽양 여운형’(서울대출판부)을 펴냈다. 정치사 연구에 본격 투신한 지 50년된 노학자는, 자신의 연구 역량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심혈을 기울여 써내려간 역작에 대해 뜻밖에도 소박한 탈고의 변을 내놨다.

지난달 29일 경기 남양주시에 자리한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교수사택에서 만난 이 교수는 “몽양은 너무나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한국 현대사의 거인”이라고 했다. 그가 고심 끝에 붙인 몽양의 호칭은 “사상과 시대를 초월한 융화주의자”다.

몽양은 우파로부터 ‘빨갱이’라는 평가를, 좌파로부터는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교수는 “이러한 평가는 지나친 양분론적인 측도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을 가리켜 ‘불가사의하다’ ‘헤아릴 수 없이 이상하고 야릇하다’고 했던 관점과도 다를 바 없다”고 했다. 그는 이 같은 양분론이 ‘위정척사’로 대표되는 교조적이고 독선적인 한국의 정치문화와 관련있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몽양은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알고 대화를 좋아하고 남에게 배우는 것을 즐긴, ‘비한국적인 한국 사람’ ‘일찍부터 세계화한 사람’ ”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수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국내에서 5년간 기독교 전도사를 했고, 중국 상하이 한인교회에서도 3년간 전도사를 했던 것을 보면 유물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저 제국주의에 반대했던 겁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연설한 것을 보면 미국에도 반대했고, 소련도 스탈린 집권 후 제국주의로 변질했다는 점을 간파했죠.”

몽양은 경기 양평의 산골에서 동학운동을 했던 조부 밑에서 자란 영향으로 자기 집의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고, 기독교 전도사로 8년을 보낸 뒤 독립운동가로 변모했다. 이 교수는 이러한 몽양의 일대기에서 “전통사회의 근대화 내지 서양화 과정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또 해방 후 몽양이 주도했던 좌우합작이 결국 실패로 끝난 것에 대해서는 “소련의 변질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해방 직후 근로인민당 당수 여운형(오른쪽)이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번 전기에서 이 교수가 새롭게 제기한 것은 박헌영 계열에 의한 몽양 암살설이다. 최근 한국어로 번역된 ‘쉬티코프 일기’라는 소련 문서들을 분석한 결과다. 이 문서에는 몽양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 나눈 대화가 담겨 있다.

“여운형은 자신의 인민당을 박헌영이 남로당에 흡수하려는 것을 알고 분노했습니다. ‘정치적 강간을 당했다’는 말까지 나왔죠. 그런데 김일성을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니 ‘박헌영이 한 게 아니고, 소련이 시킨 거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거기서 말 한 마디라도 아차 잘못하면 집으로 못 돌아갈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로당 합당에 협조하겠다고 말하고는 남으로 내려와서 영영 ‘굿바이’했죠. 이 장면은 소련이 제국주의로 변질했음을 몽양이 체감했던 순간이었고, 이후 펼쳐질 한국사에 영향을 준 상당히 중요한 장면입니다.”

또한 이 교수는 몽양이 3·1운동을 촉발한 주역이라고 강조했다. 1918년 전도사로서 상하이 교민친목회 총무로 있으면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것이라든지, 2·8독립선언 주동자들을 움직인 장덕수를 일본에 잠입시킨 것에는 몽양의 역할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가 몽양을 처음 접한 것은 1957년이었다. 버클리대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의 연구조교로 있으면서 접한 ‘조선사상운동자료 2집’이라는 일제 문헌 속에 담긴 안창호와 여운형의 신문조서에서였다.

“두 분이 일제 관헌과 문답을 나누는 모습이 26세의 박사과정생에게 민족적 긍지를 갖게 했어요. 존경심과 더불어 호기심도 갖게 했지요. 그들의 무대가 너무나 넓었고, 활동이 눈부셨고, 신문을 받는 태도가 너무나 의연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몽양이 ‘신문’이라기보다 ‘질의문답’을 즐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이 교수는 스승인 스칼라피노 교수와 함께 쓴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1~3’ 등으로 1974년 미국정치학회의 최우수저작상인 ‘우드로 윌슨 파운데이션 어워드’를 수상했으며, 김규식, 이승만, 서재필 등 한국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전기를 집필한 바 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를 퇴직한 뒤 2000년부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이 교수는 한국현대사를 연구하며 깨닫게 된 진리 중 하나를 “역사란 성공한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니라는 점”이라고 했다. 그는 한 일본인 기자가 자신의 ‘조선노동당 소사’를 번역하며 붙인 역자의 말의 한 부분을 자신에 대한 최고의 찬사로 여긴다고 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김규식, 여운형 등 해방 후 조국에 돌아온 비운의 선각자들을 애도하는 이정식씨의 글에는 엄밀한 학문적 추구 속에 과거 좌경 반일 투쟁을 하다가 중도에 넘어진 자, 좌절한 자, 실패한 자에 대한 연민이 묻어난다. 이들은 북에서는 사이비 혁명론자, 남에서는 이단자로 취급받으며 분단이 지속되는 한 계속 소외돼 역사 속에서 잊혀졌을 사람들이었다.’

‘몽양 여운형’ 출판기념회는 오는 6일 오후 6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 자리에는 스칼라피노 교수를 비롯해 이홍구 전 총리, 김용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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