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여성 알쿠눈, ‘용감한 새 캐나다인’ 되다

2019.01.13 21:20 입력 2019.01.14 07:44 수정 노도현 기자

부모가 결혼 강요·폭력 → 호주 망명 위해 태국 경유하다 억류

→ 유엔기구 중재 → 가족 면담 거부 → 호주 ‘허가’ 머뭇…

‘망명 허용’ 캐나다 도착…SNS에 ‘내가 해냈다’ 글 올려

‘인권 운동가 억류 문제’ 갈등 겪던 양국 관계 악화 예상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라하프 무함마드 알쿠눈(왼쪽)이 12일(현지시간) 캐나다 토론토 피어슨공항에 도착한 직후 크리스티아 프리랜드 외교장관(오른쪽)과 취재진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토론토 | 로이터연합뉴스

“용감한 새 캐나다인, 라하프 알쿠눈입니다.”

크리스티아 프리랜드 캐나다 외교장관은 12일(현지시간) 캐나다 토론토 피어슨공항 입국장에서 옆에 서 있던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18세 여성 라하프 무함마드 알쿠눈을 이렇게 소개했다. 프리랜드 장관은 그러면서 “우리는 전 세계의 인권을 지지하며 여성의 권리 역시 인권이라고 강하게 믿는다”고 했다.

캐나다는 알쿠눈의 새 정착지다. 가족의 학대를 피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나선 지 일주일 만이다. 알쿠눈은 파란색 유엔난민기구 모자에 ‘캐나다’라고 쓴 회색 후드집업 차림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알쿠눈은 입국장에선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대신 트위터에 “내 삶을 구해주고 지지해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고 남겼다. 토론토로 향하는 기내 사진에 ‘내가 해냈다’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알쿠눈의 여정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알쿠눈은 지난 5일 쿠웨이트에서 가족들과 여행을 하던 중 빠져나와 태국으로 날아갔다. 가족의 학대를 벗어나기 위해 호주 망명에 나섰고, 태국은 경유지였다. 하지만 태국 방콕 수완나품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여권을 빼앗긴 뒤 공항 내 호텔에 억류됐다. 알쿠눈은 “사우디 대사관 관계자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고 태국 당국은 “태국 비자가 없어 억류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알쿠눈은 트위터에 “사우디에선 공부도 일도 할 수 없다. 난 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올렸다. 사우디로 송환되면 “우리 가족이 나를 죽일까봐 두렵다”고도 했다. 알쿠눈이 부모로부터 결혼을 강요당하고, 마음대로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이유로 방에 갇힌 적도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알쿠눈은 의자와 매트리스 등으로 호텔방 문을 막고 강제송환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이 알려지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라하프를 구하라(#SaveRahaf)’는 해시태그 달기 운동이 시작됐다.

억류 48시간이 지난 7일 유엔난민기구가 손을 뻗으면서 강제송환 위기를 넘겼다. 알쿠눈은 8일 아버지와 남자형제가 귀국을 설득하기 위해 방콕을 찾아왔지만 만남을 거절했다. 유엔난민기구는 알쿠눈을 난민으로 판단하고, 그가 가고자 했던 호주 정부에 난민 정착을 고려해달라고 요청했다.

호주 정부가 “비자 발급을 고려하겠다”면서도 즉각 답을 주지 않는 사이,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11일 “캐나다는 여성 인권을 옹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며 알쿠눈에 대한 망명 허용을 발표했다. 알쿠눈은 11일 오후 대한항공 편으로 인천공항을 거쳐 토론토로 향했다.

수라찻 학빤 태국 이민청장은 “호주를 비롯해 여러 정부가 알쿠눈을 난민으로 수용할 가능성을 놓고 유엔난민기구와 접촉했다”며 “캐나다행은 알쿠눈의 개인적인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필리포 그란디 유엔난민기구 최고대표는 성명에서 “난민 보호가 항상 보장될 순 없지만 알쿠눈과 같은 경우 국제 난민법과 인류적 가치가 우선한다”고 말했다.

캐나다가 알쿠눈을 받아들이면서 사우디와의 관계는 더 악화할 것으로 보인다. 두 나라는 지난해 8월 캐나다 정부가 사우디에 체포된 인권운동가들의 석방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면서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사우디 정부는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하며 자국 주재 캐나다 대사를 추방했고, 캐나다 내 사우디 유학생들에게도 철수 명령을 내렸다. 캐나다는 지난해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을 계기로 사우디에 대한 무기 수출 중단을 검토하고 있다. 사우디 정부는 알쿠눈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원문기사 보기
상단으로 이동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

경향신문 뉴스 앱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