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내리는 노동

남녀 차별에 굴절된 육아와 가사…‘모두의 돌봄권’ 인식 필요

2020.02.12 06:00 입력 2020.02.19 13:27 수정 정대연·심윤지·최미랑·손제민 기자

⑤ 가정 내 돌봄노동

이미지 크게 보기

‘요람에서 무덤까지.’ 1942년 영국 ‘베버리지 보고서’에 등장한 이 표현은 복지국가의 이상을 집약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자녀가 태어날 때부터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모든 가족에 대한 돌봄이 여성에게 떠맡겨진 현실을 꼬집는 뜻으로도 쓰인다. 돌봄노동은 인공지능(AI)이 대체하지 못할 ‘인간 최후의 노동’으로 꼽힘에도 남성 주도의 임금노동만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여전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노동’으로 남아 있다.

경향신문은 자녀가 있는 30~40대 여성들을 만나 ‘녹아내리는 노동’ 시대에 가정 내 무급 돌봄노동이 어떻게 변화할지 물었다. 전가된 돌봄 때문에 삶과 경력으로부터의 단절을 경험한 이들은 고립감과 우울증에 시달린 경우가 많았다. 남편은 나이가 들수록 경력이 쌓이며 사회적 지위와 임금이 올라가지만 자신은 경력을 인정받지 못해 변변한 일거리조차 얻기 어려운 상황에 무력감을 호소했다. 떨어진 자존감을 높이고 경력을 이어가기 위해 다시 사회생활에 나서지만 돌봄노동을 병행할 수 있는지가 최우선 고려사항이었다. 프리랜서, 자영업이나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는 회사를 택하는 이유다. 이들은 ‘여성에 한정되지 않는 전 사회적인 노동시간 단축과 근로형태 유연화 없이는 돌봄노동이 여성에게 전가되는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 ‘짧고 유연한 노동’ 가능해야

김수영씨(35)는 이달 초 약 1년간의 출산·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했다. 대구의 작은 회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는 김씨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점심시간을 빼고 하루 6시간 일하는 유연근무제를 사용한다. 그는 “회사에서 양해를 해줘 육아 걱정을 덜었지만, 아기 엄마가 저 혼자라 먼저 퇴근하는 게 눈치가 보인다. ‘개척자’가 된 상황”이라고 했다.

프리랜서로 시민단체 활동가 등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는 서진씨(36)는 둘째 아이를 낳을 때까지 경기 안산시의 마을만들기지원센터 직원으로 일했다. 첫째 출산 후에는 “원하는 분야에서 일을 다시 하는 게 행복해서” 육아휴직을 쓰지 않았지만, 둘째까지 친정어머니에게 부탁할 수 없어서 직장을 그만뒀다. 서씨는 “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정시 출퇴근을 하면 아이가 아플 때마다 일을 그만둘 위기가 찾아오고 매일 어린이집 등하원시키는 것도 쉽지 않아 프리랜서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육아 문제에서 워킹‘맘’이 부각되는 순간 문제 해결이 더 어려워진다”며 “남편들도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유연하게 일할 수 있어야 돌봄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했다. 정규직 중심의 고정적인 ‘9 to 6’ 근무와 잦은 야근을 해야 하는 환경에서는 돌봄 필요가 생기는 여러 상황에 대처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간 돌봄정책은 ‘워킹맘’의 육아를 지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점차 ‘일하는 아빠’들에게로 제도 적용이 확장되는 추세다. 그럼에도 육아 여성과 전문가들은 ‘양육자에게만 유연한 업무 환경이 주어진다면 낙인효과로 인해 직장 내 차별과 배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전지원 서울대 국제이주와포용사회센터 선임연구원은 “아이가 있는 사람에게 특혜가 가는 구조여선 안된다. 미·비혼인 사람도 자기 자신이나 부모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면 모두가 돌봄휴가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연한 업무 환경, 양육자 한정 땐
직장 내 차별로 이어질 가능성
“애 있는 사람에게 특혜 주는 대신
미·비혼의 가족 돌봄 등 넓혀야”

한국은 법에 보장된 남성의 육아휴직 기간이 1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약 8주)보다 많은 편이다. 제도는 마련돼 있지만 육아휴직자 중 남성 비율은 5명 중 1명(21.2%)에 불과하다. 남성에게도 일과 육아를 병행할 여건을 마련해주는 게 필요하다는 방증이다. 지난해 10월 서울대에서 열린 ‘돌봄의 가치와 포용사회’ 학술회의에서 엘리자베스 킹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더 많은 여성이 고용시장에 참여하길 바라지만 동시에 엄마, 아빠가 아이를 돌보는, 혹은 자녀가 연로한 부모를 돌보는 것이 유급돌봄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기 어렵다는 점도 안다”며 “각 사회와 가족마다 상황과 욕구가 다르기 때문에 답은 가능한 한 많은 가능성과 선택지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입증할 방법 없는 ‘경력’

여성들, 양육 위해 프리랜서 선택
일감 단위 노동, 경력 입증 어려워
플랫폼 종사자 늘어나는 시대에
‘이력 데이터’ 소유권 보장해야

여성들은 돌봄으로 경력이 단절된 와중에 틈틈이 일해 왔음에도 이를 입증할 수 없어 어려움을 겪는다. 프리랜서 애니메이터로 일하는 김유나씨(40·가명)는 소득을 입증하지 못해 맞벌이 조건으로 당첨된 시립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지 못했다. 김씨는 “한 업체가 어떤 프리랜서에게 준 일을 나눠 맡아 했지만 일한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일감 단위의 쪼개진 노동을 하는 육아 여성들이 자신을 증명하지 못해 겪는 고충이다.

육아를 하는 여성들이 비교적 쉽게 일거리를 찾을 수 있는 플랫폼 기술이 보급되면서 이 같은 문제가 더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 플랫폼노동자가 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노동 이력 데이터의 당사자 소유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지난달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플랫폼노동 종사자 인권상황 실태조사’에 참여한 윤애림 서울대 고용복지법센터 연구위원은 “플랫폼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들처럼 재직증명서를 떼는 등의 방법으로 경력을 입증할 수 없어 플랫폼을 옮기면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는 불이익을 당한다”며 “플랫폼이 관리하는 자신에 대한 평점, 과업 수행 이력 등 노동 이력 정보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해 노동자가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2016년 ‘노동과 사회적 대화의 현대화 그리고 직업적 경로의 보장에 관한 법’에서 이러한 내용을 규정했다.

■ 기술 발전이 돌봄 부담 덜어줄까

IT업계 재택근무 등 기술변화
독일 ‘노동 4.0’ 백서에서는 우려
“돌봄하던 여성은 부담 커질 수도”
남녀 구분 없이 ‘돌봄권’ 접근을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일하는 신미라씨(30·가명)의 현재 직장은 누구나 주 1회 재택근무가 가능하다. 신씨는 가족 돌봄이 필요할 때 이를 이용한다. 회의는 화상채팅 툴을 활용하고 자료는 클라우드시스템에서 확인한다. 개인 용무가 있을 때에는 공용으로 쓰는 구글 캘린더에 일정을 올려 공유한다. 회사는 개별 노동자의 시스템 접속·이용 기록 등을 확인해 성실히 일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신씨는 “어디서 일해도 상관없는 근무 환경이 구축돼 있기 때문에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같은 사태 때 전 사원이 재택근무를 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가 다른 기업의 입사 제안을 뿌리치고 이 회사를 택한 것은 가사·육아에 유리한 여건 때문이다. 신씨는 기술변화 덕분에 돌봄 문제로 인해 일터에서 밀려나는 일은 점점 줄어들 거라 믿는다.

반면 돌봄노동을 하던 사람에게 부담이 더 가중될 것이란 우려도 존재한다. 이다혜 서울대 고용복지법센터 연구위원은 지난해 법과사회 60호에 실린 ‘4차 산업혁명과 여성의 노동 : 디지털 전환이 돌봄노동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에서 “독일 ‘노동 4.0’ 백서에서는 ‘디지털화로 인해 상시 연락이 가능해짐에 따라 일·가정 양립이 증진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비롯해 가사 의무가 있는 사람의 부담이 더 커질 수도 있다’고 진단한다”며 “디지털화가 이런 결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유급 돌봄노동 영역에서 양질의 노동을 위한 제도를 설계하는 것은 물론, 가정에서 남녀가 무급 돌봄노동을 평등하게 분배할 수 있도록 전반적인 근로시간 단축, 남성 육아휴직제도의 실효성 제고가 함께 도모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세종공감활동가모임 함께’가 주최한 ‘자녀공감 워크숍’에서 엄마들이 자녀들과 함께 놀이를 하며 소통하고 있다. ‘세종공감활동가모임 함께’ 제공

■ ‘돌봄권’이 필요하다

여성들은 돌봄노동을 “숭고” “축복” “기쁨”으로 표현하면서도 “여성에게 전가되고 저평가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돌봄노동이 지닌 양면성이다. ‘부담’ ‘의무’ ‘고통’이 강조되는 현재의 돌봄 개념을 재구성해 ‘돌봄권’을 도입할 필요성이 거론된다. 돌봄 연구자들 사이에 돌봄권은 ‘돌봄을 줄 권리’와 ‘돌봄을 받을 권리’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육아로 따지면 아이가 한창 성장할 나이에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하는데, 회사가 노동자에게 잦은 야근을 시킨다면 부모와 아이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는 것이다.

도남희 육아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지난해 12월 ‘아동 돌봄의 사회·경제적 가치에 대한 인식 제고 방안’ 보고서에서 “돌봄을 기본적 인권의 문제로 인식하면 정부가 돌봄과 관련해 발생하는 불평등이나 부족함을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갈 의무와 근거가 마련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일하는 육아 여성들은 “신종 코로나로 인해 어린이집·유치원·학교가 문 닫는다는 뉴스가 나오면 혹시 우리 동네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한다”고 했다. 회사에 매여 있어야 하는데 아이들을 맡길 곳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돌봄권’을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세종시 엄마들이 만든 ‘세종공감활동가모임 함께’가 그 사례다. 이 단체는 지난해 ‘엄마마음 돌봄교실’을 통해 돌봄노동 과정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서로 위로하고 자녀, 부모 그리고 스스로를 돌보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박현숙씨(47)는 “부모, 자녀에 대한 돌봄이 의무로 다가와 너무 힘든 때가 있었다”며 “남성도 자신을 잘 돌보면 남을 잘 돌볼 여유가 생기고 돌봄은 모두에게 행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무급돌봄노동 가치, GDP의 28%…“유·무급 포함 경제 규모 측정해 재정투자 필요성 입증해야”

‘그림자 노동’에서 벗어나려면

가톨릭사제 출신 사상가 이반 일리치가 1981년 저서 <그림자 노동>에서 처음 쓴 조어인 ‘그림자 노동’의 대표적 사례는 여성이 집에서 수행하는 가사노동이다. 일리치는 “노동을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으로 나누는 경제학적 구분”이야말로 산업화에 저항하던 사람들을 임금 ‘권리’를 위해 파업을 벌이는 노동자로 바꾼 효과적인 수단이었다며 “그 최초 형태는 여성을 집 안에 가두는(인클로저) 조치였다”고 했다.

자급자족 사회 사람들을 산업사회의 ‘생산적 노동’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임금노동의 보완물이지만 급여를 받지 않고 가정에서 소비만 하는 무급노동이 그림자처럼 필요했다는 의미다. 18~19세기 서구 산업사회의 노동 개념에서 일어난 이 변화는 그 이후 여성 노동을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재생산’으로 보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해왔다.

최근 돌봄 연구자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며 당연시돼온 돌봄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돌봄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추산하려는 시도도 그중 하나다.

미국 아메리칸대 경제학과의 마리아 플로로 교수 연구팀은 2018년 베를린에서 열린 ‘돌봄노동과 경제’ 학술대회에서 자체적인 거시경제모델을 활용해 한국의 무급 돌봄노동의 가치를 2009년 3067억달러, 2014년 3902억달러로 잠정 도출한 결과를 공개했다. 이는 각각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34%, 28%에 해당한다. 이 수치를 하루 8시간 노동으로 계산해 급여를 지급한다면 1100만명의 유급 돌봄 노동자가 필요하다고 플로로 교수는 밝혔다.

오는 10월 서울에서 열릴 학술대회에서 정책 결정자들도 참여한 가운데 최종 발표될 이 연구는 돌봄이 비용이 아닌 투자로 인식될 때 돌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재정투입이 좀 더 정당화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뤄지고 있다. 플로로 교수는 지난해 10월 서울대에서 열린 ‘돌봄의 가치와 포용사회’ 학술회의에선 “돌봄을 비용이 아닌 투자로 인식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해서는 먼저 유·무급 돌봄부문을 모두 포함해 전체 돌봄경제 규모를 제대로 측정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통해 돌봄에 대한 공공투자와 고용창출, 보다 높은 생산성, 경제성장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국제노동기구(ILO)가 돌봄의 질 향상을 노동의 미래에서 해결해야 할 핵심과제라고 규정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ILO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일’ 보고서에서 “소득 상위 7개국이 GDP의 2%만 돌봄 경제에 투자해도 2100만개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다만 모든 돌봄노동을 유급화하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있다. 이다혜 서울대 고용복지법센터 연구위원은 “돌봄이 아주 많은 월급을 받고 정당한 가격이 형성된 상품이 된다고 하더라도 성불평등은 해결되지 않는다”며 “돌봄의 상품화가 계속될수록 남자들은 그냥 손 놓고 돌봄에 참여하지 않게 된다. 누군가 돈을 줘서 돌봄을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공평하게 분담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정대연·심윤지·최미랑·손제민 기자 hoan@kyunghyang.com>

원문기사 보기
상단으로 이동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

경향신문 뉴스 앱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