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족보와 호주제(下)

2005.01.05 17:20

성씨제도와 족보가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니 가족제도도 부계(父系)의 가부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호적도 가부장 중심으로 작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호구단자(호적)는 고대국가부터 작성되었으며 고려 시기인 10세기 끝 무렵에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 시기 호구단자의 작성 내용을 보면, 먼저 호수(戶首, 호주와 같음)와 호수의 아내, 자녀, 동거인 등의 이름과 나이와 신분과 직역(職役)을 적고 호수와 호수 아내의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외조부모의 성명과 직역을 적었으며 본관도 기록했다. 이를 8조(祖) 호구 또는 4조 호구라 했다. 여기에는 부계만이 아니라 처계, 모계를 모두 적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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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을 남녀 구분 없이 상속을 받았으니 의무도 함께 주어졌다. 딸에게도 부모 봉양의 책임이 있었다. 장자만이 아니라 작은아들 또는 딸들이 돌아가며 봉양의무를 졌던 것이다. 제사도 아들·딸 구분 없이 돌아가면서 지냈다. 이를 윤행(輪行)이라 한다. 제사를 지내는 의식에도 아들·딸이 동등하게 참여했다.

또 친족범위도 부계와 모계를 가리지 않고 8촌 이내로 했다. 이렇게 친가와 외가를 동등하게 친족범위에 포함시키는 사회를 양측적(兩側的) 친족사회라 한다. 이렇게 여성 지위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또 호적의 기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규정의 근거자료가 되었다.

한편 혈통이 다른 아이를 어릴 적에 데려와 길러 양자로 들이게 하면서 호주의 성을 따르게 한 규정도 두었으며 경우에 따라 모계의 성을 따르게도 했다. 또 숙부와 조카가 혼인하는 따위의 근친혼의 경우 외가의 성을 따르는 관례도 있었다. 또 아내가 재혼하여 예전 남편에게서 낳은 아이를 데려오면 의자(義子)로 인정하여 재산상속을 받게 했다. 의자는 의부의 제사를 상속할 수도 있었다.

이혼의 경우도 동등한 조건을 달았다. 남편이 아내를 학대한다거나 아내가 부정을 저지른 경우 타당한 이혼조건이 된다. 남편이 일방적으로 이혼을 하거나 내쫓을 수는 없었다. 이혼했을 때 아내는 자신이 가져온 재산이나 노비를 다시 돌려 받아 가져갔다. 왕비도 이혼할 수 있었으며 이혼한 여자가 왕비가 된 경우도 있었다.

지아비가 아내를 버리거나 아내가 간통을 하면 처벌을 받았다. 부모의 양해가 없거나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관직에서 쫓겨나고 유배의 처벌을 받았다.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되었거나 이혼을 하고 나서 독신녀가 되면 재가를 허락했다. 재가 자녀를 관료사회에서나 가정에서 결코 차별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주자가례’에 따른 예식을 철저하게 시행하게 했다. 유교적 예교질서의 기초는 부계 중심으로 맞추어졌다. 이를 국가제도로 수용하기도 하고 관습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어쩐 일인지 초기보다 후기로 내려올수록 유교적 예교질서는 강화되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호적기재에도 부계 또는 아들 위주로 작성하고 모계는 소외시켰다. 남성 호주가 재산권, 혼인결정권 등 모든 가족내의 일에 권리를 행사했다. 따라서 호주는 가부장의 권위를 완전하게 보장했다. 호주가 죽으면 어린 아들이라도 호주가 되었지 아내는 호주가 될 수 없었다. 이혼도 거의 남편의 자의에 따라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재산과 제사 상속도 극히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아들들만이 누렸다.

따라서 상속의 제일 대상은 장자였으며 딸들은 거의 배제되었다. 장자 상속이 여러 대를 두고 계속되면 종가(宗家)를 형성했다. 종족은 종가 중심으로 움직였다. 자식이 없어 양자를 둘 적에도 철저하게 부계의 혈연 중심으로 결정했다. 조카가 없으면 먼 일가붙이라도 양자로 들였으나 외가 또는 처가의 혈족을 들이지 않았다. 곧 다른 성받이를 결코 양자로 들이지 않았다. 이를 성본(姓本)계승이라 부른다.

또 혼인할 경우에도 본관이 같은 일가만이 아니라 같은 성을 가졌더라도 혼인을 못하게 했다. ‘대전회통’에는 “관향이 다르더라도 성이 같으면 혼인하지 말라”는 규정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니 친족범위인 8촌 밖이라도 결코 혼인해서는 안되었다.

제사 상속에 있어서도 적장자가 승계하고 적장자에게 후사가 없으면 지차에게, 지차에게도 아들이 없으면 첩자가 승계하라는 규정을 두었으나 이는 사문이나 다름없었다. 가족의 관습은 다른 양자를 들여 제사를 승계시켰던 것이다. 서자는 결코 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없었던 것이다.

성씨와 족보는 이런 규정과 관습에 기초하여 절대적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족보의 기재방식에서 외손은 초기에는 3대, 2대를 기록했으나 후기에 와서는 사위로 한정되었으며 딸은 이름마저 기재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성(딸)들은 이름마저 쓰지 않고 이가 성을 가진 남자에게 시집을 갔을 경우 이실(李室)이라 불렀던 것이다.

갑오개혁 이후에 이루어진 근대 호적에도 이런 내용이 대부분 규정되었으며 일제시기인 1922년에 이루어진 ‘조선호적령’에도 반영되었다. 특히 해방 뒤인 1960년에 이루어진 ‘호적법’에도 가부장적 호주제는 폐지되지 않았다.

근래 들어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개정이 제의되었다. 그 개정안은 15대와 16대 국회에서 보류되었다가 다시 17대 국회에 올려져 있다. 그동안 유림단체와 호주제를 고수하려는 세력들이 완강하게 반대운동을 펼쳐왔다. 그런 속에서 17대 국회에서는 호주제와 동성동본 금혼조항을 폐지 또는 삭제할 것과 성을 바꿀 수 있는 양자제도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호주제를 포함한 가족법과 족보의 기재방식도 시대의 변화에 맞게 고쳐져야 할 것이다. 더욱이 남녀평등과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한 추세에 맞추어 묵은 봉건가치는 하나씩 사라져야 할 것이다.

-갑오개혁때 신분 철폐 불구, 호적엔 양반·백정등 기록-

우리나라에서 양반의 특권이 사라진 것은 1894년 갑오개혁때부터였다. 곧 벼슬을 얻는다든지, 군역을 면제받는다든지 등 양반이 얻는 권리가 박탈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적 신분평등의 출발이었다. 이 무렵 과거제도가 철폐되었다.

그러나 그 잔재는 일부 남아 있었다. 양반은 예전처럼 향촌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위세를 부렸고 족보에서 양반혈통임을 자랑하려 들었던 것이다.

1896년부터 이뤄진 호구조사는 국세조사에 그 목적을 두었다. 이에 따라 호적에 호주의 직업만을 기재하게 했다. 이것은 결국 전통적 신분을 밝히는 모양새가 되었다. 특히 1909년 새로운 민적법이 제정되면서 호적은 개인의 신분관계를 증명하는 공증문서로 바뀌어졌다. 이는 신분의 특권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리하여 호적에는 어김없이 호주의 신분을 밝히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당국은 식민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개인의 신상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 보기를 몇 가지 들어보기로 한다.

소설가 이광수는 평안도 정주사람이다. 호적에 기재된 그의 신분은 ‘양반’이었다. 이광수는 후기에 친일행각을 벌였는데 유난히도 신분상승의 욕구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서북출신들은 과거에서 차별을 받는 등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탓인지 그는 껍데기나마 ‘양반’의 후예임을 자부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안창호는 평안도 강서사람이다. 호적에 기재된 그의 신분은 ‘상민’이었다. 실제 상민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그 개인의 정서로 볼 적에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미국이나 국내에 살 때나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상대에게 늘 고향을 묻고 본관을 묻는 모습을 익히 보아왔다.

그리하여 그는 한 때 상대에게 본관이나 고향을 묻는 습관을 고치는 운동을 벌였다. 곧 본관과 고향을 따져 이른바 지역이나 신분차별을 갖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호적에 ‘상인’이라 표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많은 독립지사들은 나라를 찾자는 운동을 벌이면서도 양반, 상놈을 가리고 기호, 서북을 따졌다. 장지필은 이른바 백정의 아들이었다. 그는 일본에 유학을 하여 대학을 다닌 지식인이었다. 그가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관리시험을 보기 위해 호적등본을 떼었다.

그런데 그의 신분란에 ‘도한’(屠漢)이라 적혀 있음을 보았다. 물론 당시에는 제도로 도축업자의 사회적 차별이 철폐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 관습은 하나도 개선되어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도축업자의 자식이 학교를 다닌다든지 직장에 취업을 할 때 곧잘 거부를 당하거나 따돌림을 받았던 것이다. 심지어 백정의 자식과는 한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하여 동맹휴학을 하는 사태도 자주 일어났다. 장지필은 이런 현실을 목도하고 이런 관습을 철폐키 위해 ‘형평운동’(衡平運動)을 벌였다. 형평운동은 식민지 구조에서 실질적 신분해방운동이었다.

이런 호적의 신분 표기는 해방 뒤에야 완전히 사라졌다. 위의 사례들은 신분과 직업이 혼동을 빚거나 충돌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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