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와 망명, 진실게임의 진실은 ‘정보게임’

2010.07.20 17:35 입력 2010.07.21 01:46 수정
김진호 선임기자

미국 체류 제3세계 핵과학자들과 CIA의 관계는…

서로 100%의 사실을 꺼내놓지 않는 한 진실은 안개 속에 머문다. 안개는 시간이 지나면 걷히게 마련이지만, 그때쯤에는 아무도 그 진실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제3세계 핵과학자와 미 중앙정보국(CIA)의 숙명적인 진실게임 역시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세계의 창]납치와 망명, 진실게임의 진실은 ‘정보게임’

지난해 6월,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로 우므라 순례길에 나섰던 이란의 젊은 핵과학자 1명이 사라졌다. 이후 아미리(32)가 지난 15일 테헤란에 돌아올 때까지 13개월 동안 그의 실종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각국 언론의 단골 소재였다. 실종 당시 미국 ABC 방송과 이스라엘 하레츠 신문은 각각 “아미리가 해외 망명을 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 공식 입장과 자국 언론을 동원한 미국과 이란 정부의 승강이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실종된 사람은 테헤란 말레크 아슈타르 기술대학의 교수인 샤람 아미리이다. 공식적으론 의학용 방사능 동위원소를 전공한 학자이지만, 실상 이란 정부의 핵개발계획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도 주장은 엇갈린다. 알리 아크바르 살레이 이란 원자력에너지기구(AEOI) 책임자는 “아미리가 AEOI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서 이란 핵개발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 언론은 아미리가 말레크 아슈타르 대학에 개설된 미사일 프로그램을 비롯해 핵개발에 관여한 전문가의 한명으로 지목했다.

실종 직후부터 CIA의 개입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산 카슈카비 이란 외교부 대변인은 같은 해 10월 미국이 아미리의 실종에 관계돼 있다고 주장했다. 미 국무부는 물론 “이런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다”라면서 이란 측의 주장을 일축했다. 아미리의 실종은 이란 이슬람 정부의 우라늄농축프로그램 강행 여부를 놓고 이란과 미국 정부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던 시점에 발생했다. 특히 AP통신에 따르면 공교롭게 아미리의 실종 3개월 뒤 이란이 콤 시 주변에 새로 건설한 새 우라늄농축시설의 존재가 알려졌다는 점에서 아미리가 제공한 정보였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CIA가 이란과 북한의 핵 및 미사일개발 정보에 늘 배가 고프다는 건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핵확산금지조약(NPT) 바깥에서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두 나라의 핵시설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영국 선데이 텔레그래프지 보도에 따르면 CIA는 2005년부터 ‘두뇌유출(The Brain Drain)’이라는 작전명으로 이란 핵과학자들의 포섭에 나섰다. 아미리의 실종에 앞서 2007년 터키에서 사라진 알리 레자 아스가리 전 이란 국방부 차관 역시 두뇌유출 작전의 성과라는 것이다. AP통신은 미 정보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아미리가 실종 이전부터 CIA로부터 500만달러의 자금을 건네받으며 이란의 핵개발 정보를 제공해왔다고 전했다.


지난 15일 테헤란의 이맘 호메이니 공항에 도착한 샤람 아미리가 비행기 계단을 내려오면서 승리의 ‘V자’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오른 쪽은 하산 카슈카비 이란 외교부 차관(대변인)이다. 미국 정보당국에 의해 강제 납치돼 고문과 심리적 압박을 받았다는 그의 주장에 비춰보면 건강한 모습이다.  테헤란 | AP연합뉴스

지난 15일 테헤란의 이맘 호메이니 공항에 도착한 샤람 아미리가 비행기 계단을 내려오면서 승리의 ‘V자’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오른 쪽은 하산 카슈카비 이란 외교부 차관(대변인)이다. 미국 정보당국에 의해 강제 납치돼 고문과 심리적 압박을 받았다는 그의 주장에 비춰보면 건강한 모습이다. 테헤란 | AP연합뉴스

꼬박 1년 동안 미스터리로 남았던 아미리가 다시 뉴스의 전면에 등장한 건 지난 달이다. 인터넷을 통해 상반된 성격의 메시지를 보냈다. 6월7일자 이란 국영방송(IRIB)사이트에 화상도가 떨어지는 동영상에서 아미리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나와 “사우디 아라비아와 미국 정보당국에 의해 강제로 납치돼 고문을 당했으며 의도적으로 이란에서 망명토록 사주받았다”고 주장했다. 곧이어 나온 유튜브 영상에서는 반대로 “미국에서 자유로우며 내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 BBC에 따르면 두번째 동영상은 CIA가 반박용으로 만들었으며 아미리가 대본을 읽는 형식이었다. 두개의 동영상이 다시 점화시킨 진실게임은 일단 아미리가 같은 달 13일 미국 내 이란의 영사업무를 대행하는 워싱턴 주재 파키스탄 대사관으로 들어와 본국송환을 요구함으로써 이란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아미리가 자유의사에 따라 미국에 체류해왔으며, 떠날 자유도 있다”고 덤덤한 반응을 내보였다. 하지만 당혹감에 휩싸인 CIA의 대응은 보다 은밀했다. 주로 ‘익명의 당국자’ 이름으로 미국 언론에 이란 정부가 아미리에게 귀국하지 않는다면 테헤란에 남아 있는 7살배기 아들을 비롯한 가족들의 생명이 위태롭다며 위협했다는 사실을 퍼뜨렸다.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향후 이란 당국이 아미리를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실체를 짐작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지난 15일 테헤란 공항에 도착한 아미리는 “이슬람공화국에 돌아와서 기쁘다”면서 납치설을 거듭 강조했다. 공항 환영행사에는 이란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해 미국을 당혹케한 그의 귀국을 반겼다. 하지만 이란 외교부는 “우선 지난 2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면서 “그런 다음에 그가 영웅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것”이라고 공표, 내부검증을 예고했다.


아미리가 ‘납치설’을 주장한 동영상. | AFP연합뉴스

아미리가 ‘납치설’을 주장한 동영상. | AFP연합뉴스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을 요약하면, 아미리는 실종 이전부터 CIA와 관련을 맺어왔으며, 모종의 경로를 통해 미국 땅에 건너왔다. 이란 핵개발 문제를 가장 중요한 외교안보 이슈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CIA가 미국에 체류 중인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될 게다. 1년여가 지난 뒤 아미리는 가족 위협 또는 다른 이유로 귀국을 결심했을 수 있다. CIA가 외국 핵과학자에게 접근하는 이유가 꼭 유용한 핵정보를 얻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본인의 주장처러 아미라가 '일개 대학의 연구원'으로 이란 정부가 추진하는 농축우라늄프로그램의 핵심정보를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이란 핵개발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한껏 강조하기 위한 정치적, 심리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도 동원될 수 있다. 위협의 심각성이 극대화될수록 국내외의 여론조성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란 핵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적인 대화노력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 이란 제재 결의를 이끌어온 미국으로선 다소 정보가치가 떨어지더라도 이러한 정보를 건네줄 공급처가 필요한 상황이다. 아미리가 귀국 뒤 “나는 CIA에 의해 강도 높은 심리적 압박에 놓여 있었다. 그 주된 목적은 이란에 반하는 새로운 정치적, 심리적 게임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게 이를 보여준다.

국가안보를 위해 정보를 캐내는 것으로 밥을 버는 CIA에게 제3세계의 핵과학자는 매력적인 포섭대상이 아닐 수 없다. 각국 정보기관들이 모두 능력범위 안에서 벌이고 있는 활동이기도 하다. 비슷한 동기에서 과거 이라크의 핵과학자 모에르 사데크사바 알타미미는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뒤 이란으로 망명했으며 이후 미국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과 각을 세우면서 또 다른 이라크 핵과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북한의 핵과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호주 주간지 ‘위크엔드 오스트렐리안’이 2003년 4월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북한 핵개발의 핵심인물인 경원하 박사가 미국 또는 서방으로 망명했다. 아미리의 경우처럼 제3국(남태평양의 섬나라 나우루)을 경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 정부 당국자들은 “확인이 어렵다”는 말만 전할 뿐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있다. 일본 겐다이(現代)지는 2004년 북한 원자력총국 부설 38호(원자력)연구소의 김광빈 소장이 중국을 거쳐 제3국에 망명했다고 보도했다. 김 소장은 당시까지 북한이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던 무기급 고농축우라늄(HEU) 개발에 대한 핵심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분류됐지만 그의 망명 사실 역시 안개 속에 파묻혀 있다. 이처럼 각국의 정보기관이 은밀하게 진행하는 핵과학자 망명 또는 납치의 전모가 아미리의 경우처럼 비교적 상세히 드러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CIA의 외국 핵과학자 포섭이 재앙으로 끝난 경우도 적지 않다. 조지 부시 미 행정부가 이라크 침공을 결정하면서 활용했던 망명과학자가 대표적으로 실패한 경우다. ‘커브볼(Curveball)’로 명명된 이라크 망명과학자는 후세인 정권의 화생방 무기 개발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본인이 직접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라크 침공 뒤 확인한 결과 그런 시설이 나오기는커녕 직접 실험에 참여했다고 주장한 기간 동안 커브볼은 이라크 내에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커브볼의 정보에 대한 의문은 CIA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당시 지도부는 이를 묵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정보를 캐는 작업은 일종의 빈괄호 메우기와 비슷하다. 괄호를 하나하나 메우다가 어느 정도 사실이 완성된 뒤에야 정책적 판단의 근거로 사용된다. 하지만 정보의 특성상 잘못된 신호를 내보일 위험은 상존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CIA는 북한과 이란 출신 핵과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전하는 정보가 얼마만큼 실체를 밝혀줄 수 있을지, 또 100% 완벽할 수 없는 정보를 갖고 CIA가 어떤 판단을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미리의 경우는 미국과 이란 당국자들이 익명 또는 실명으로 진실게임까지 벌이면서 정보가 생산되는 과정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음을 보여준 희화적인 단면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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