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벼랑 끝···동아줄은 없었다

2023.03.08 06:00 입력 2023.03.08 20:09 수정

피해자들이 말하는 ‘진짜 대책’

당장 저리대출 필요한 세입자에
예방 초점 맞춘 정부안은 ‘미흡’
피해자들 “개인 무지 아닌 재난”

지난 6일 인천 미추홀구 주안역 인근에서 전세사기 피해자 A씨의 추모식이 조촐하게 열렸다. 가족과 왕래가 끊겨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한 A씨를 위해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에서 마련한 자리였다. 길거리를 지나던 시민들은 헌화하고 촛불을 들며 고인의 마지막을 기렸다.

추모식 한쪽에서 피켓 시위를 하던 강성호씨(45)는 “부고를 듣고 너무 자괴감이 들었다. 우리들도 매일 더는 못 버티겠다 생각했는데 그는 방에서 혼자 얼마나 외롭고 슬펐겠나”라며 “대책위가 희망이었는데 그 희망마저 무너졌다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강씨는 A씨 생전에 대책위 활동을 함께했다. A씨가 지난달 28일 남긴 유서에는 “나라는 제대로 된 대책도 없고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지난달 2일 정부 차원의 ‘전세사기 피해근절 종합대책’이 발표됐지만 피해자들이 느끼는 체감도는 턱없이 낮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미가입자들이 보증금을 일부라도 회수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경매가 유일하다. 하지만 임대인 체납 세금이나 근저당으로 인해 경매가 열리지 못하거나, 열려도 보증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부가 발표한 전세사기 대책은 예방에는 일부 효과가 있으나 이미 사기를 당한 피해자를 위한 구제책으로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지원책은 사실상 ‘긴급 저리대출’과 ‘긴급 주거’밖에 없다.

문제는 저리대출에 허점이 많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해 9월 대책을 발표하면서 전세사기 세입자들이 이사를 갈 경우 저리대출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임차인들은 전세계약 만료 이후에도 ‘대항력 유지’를 위해 기존 집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지난 2월 정부는 기존 주택에 거주해야 하는 이들에게도 저리대출이 가능한 상품을 5월 중 출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저리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은행으로부터 기존 전세대출을 먼저 연장받아야 하는데, 전세계약이 만료된 상태라면 대출연장을 받을 수 없다. 세입자는 전세계약 갱신을 해야 하지만 집주인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됐을 경우는 계약 갱신이 불가능하다. 숨진 A씨도 최근 시중은행에 대출연장을 문의했으나 집주인이 연락두절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선순위 근저당이 보증금보다 커…경매로도 회수 불가능

정부의 긴급 저리 대출 지원
가이드라인 없어 안내 제각각
전세보증금 6500만원 넘으면
최우선 변제권도 받지 못해

미추홀구 전세사기의 ‘몸통’이라 할 수 있는 건축업자 B씨(62)는 현재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지만 50~60명에 달하는 바지 임대인들은 대부분 잠적했다.

A씨는 국회 토론회, 전세사기피해지원센터를 찾아다니며 대책을 문의했으나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대책위 관계자는 “A씨는 최근 직장을 그만둔 상태였다”며 “형사고소, 민사소송, 경매 절차를 밟으며 대책위 활동까지 하느라 제대로 된 구직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비단 A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긴급 저리 대출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어 시중은행마다, 담당자마다 안내가 제각각이다. 피해임차인 대책위에서 활동 중인 이철빈씨(30)는 “계약일이 남아 임차권등기를 설정할 수 없는데, 피해자들에게 임차권등기 서류를 요구하는 등 은행의 모순적인 요구가 반복되는데도 정부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고 말했다. 대출연장이 거부돼 원금과 이자부담을 떠안고 신용불량자가 되는 피해자들도 속출하고 있다.

피해자들 중에서는 거주하는 집의 선순위 근저당이나 체납 세금이 보증금보다 큰 경우가 많다. ‘최후의 수단’인 경매로도 보증금의 일부조차 회수할 수 없다는 뜻이다.

미추홀구의 경우 남씨가 주택 약 2700채를 짓는 동안 받은 선순위 근저당이 문제가 되고 있다. 임대차보호법에는 거주하는 집이 경매에 넘어가면 소액 임차인에 한해 전세 보증금 일부를 최우선 변제해주는 제도가 있다. 하지만 A씨는 불과 500만원 차이로 최우선 변제권을 못받았다. A씨는 2021년 보증금 7000만원에 임대차계약을 맺었다. 주택에 근저당권이 설정된 건 2011년인데, 당시 인천지역 소액임차인 기준이 전세보증금 6500만원이었기 때문이다.

대책위에 따르면 1월 기준 전체 피해 가구(3107가구) 중 27.5%가 최우선 변제권이 없다. 현재 경매가 진행 중인 가구도 임차인들이 경매에 참여하려 하지만, 입찰 경험이 많은 ‘꾼’에 밀려 낙찰받지 못하는 사례도 생겨나고 있다.

피해자들은 전세사기가 개인의 무지가 아닌 구조적 실패이자, 사회적 재난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안상미 미추홀구 피해대책위원장은 “ ‘애초에 왜 근저당 있는 집에 들어가냐’고 하지만 근저당과 보증금을 합쳐도 시세보다 낮으니 안전하다는 것이 부동산 중개업소의 설명이었다”면서 “중개업소와 임대인·감정평가사까지 모두 한패였다”고 말했다. 그는 “대출을 받아 집을 구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임차인과 임대인이 알 수 있는 정보가 불균형한 현재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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