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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 모르냐?


가족처럼 지냈지만 사고로 뿔뿔이 흩어져 생사도 모른 지 3년. 고향으로 돌아온 춘자는 자신을 적대하는 진숙에게 묻는다. 열네 살 식모살이를 시작으로 어촌마을 군천에 이른 혈혈단신 춘자는 배우 김혜수가, 선장인 아버지와 함께 마을 사람들을 어우르고 이끄는 해녀 진숙은 염정아가 연기했다. 춘자의 “너 나 모르냐”는 깊은 애정, 서운함, 간절함이 담긴 말이다. 올 여름 최고 기대작 <밀수>는 뜨겁고 복잡다단한 관계를 가진 두 여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모두가 아는 얼굴을 가지고 새로운 인물을 연기한 두 사람을 이틀에 걸쳐 만났다.

해녀 춘자(김혜수·왼쪽)와 진숙(염정아·오른쪽), 다방을 운영하는 옥분(고민시·가운데)은 밀수 사건에 연루된다. NEW 제공.

해녀 춘자(김혜수·왼쪽)와 진숙(염정아·오른쪽), 다방을 운영하는 옥분(고민시·가운데)은 밀수 사건에 연루된다. NEW 제공.

김혜수가 말하는 춘자의 키워드 ‘생존’

“춘자의 키워드는 생존이죠. 홀로 떠돌이의 삶을 사는 여자예요. 정착을 한 듯 보여도 속으로는 ‘나는 정착을 할 수 없다’는 불안이 늘 존재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보통 두 종류로 나뉠 것 같아요. 존재를 무력화시키면서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 혹은 반대로 그렇지 않은 듯 겉으로 제스처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저는 춘자는 후자 쪽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생존’이라는 단어에서 출발했죠.”

진숙(염정아)네 가족과 함께 지내던 춘자(김혜수)는 군천에서 일어난 일 이후 서울로 올라와 보따리 장사를 한다. 그는 권 상사(조인성)를 만난 뒤 다시 군천으로 돌아온다. NEW 제공.

진숙(염정아)네 가족과 함께 지내던 춘자(김혜수)는 군천에서 일어난 일 이후 서울로 올라와 보따리 장사를 한다. 그는 권 상사(조인성)를 만난 뒤 다시 군천으로 돌아온다. NEW 제공.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혜수는 춘자의 캐릭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춘자는 “본능, 감각, 직관에 의존하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는 “권상사를 처음 만났을 때 춘자는 너무 무서웠을 것이다. 그런데 큰소리로 발악을 한다. 불안한 사람은 궁지에 몰릴 때 더 목소리가 커지지 않나”라며 “자기 수가 바닥났다는 걸 알면서도 임기응변으로 살아남으려고 한다. 순간 칼질을 모면하기 위해서 ‘군천’을 말한다. 자신이 어디로 피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캐릭터”라고 말했다.

오는 26일 개봉하는 류승완 감독의 영화 <밀수>는 어촌마을 군천에 사는 해녀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마을에 화학공장이 들어선 뒤부터 해녀들의 수확이 변변찮아 진다. 셈이 빠른 춘자를 필두로 해녀들은 밀수에 손을 댄다. 어릴 적부터 가족처럼 지낸 진숙도 함께 세관을 피해 바다에서 라디오, 바세린, 화장품, 옷 등 ‘외제 물건’이 담긴 상자를 건져 올린다. 그러다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며 춘자, 진숙을 비롯한 해녀들은 생이별한다. 3년 뒤, 춘자는 더 큰 밀수 건수를 들고 군천으로 온다. 진숙은 3년 전 사건의 배후에 춘자가 있다고 의심한다.

“춘자는 외롭고 불안정하잖아요.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생존하기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만 드러내죠. 그 순간 자신을 지키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요. 그건 춘자의 진심은 아니죠. 춘자가 진짜를 드러내는 건 단 한 사람 앞에서예요.” 김혜수가 말하는 ‘단 한 사람’은 진숙이다. 아무리 진숙이 춘자를 미워해도, 춘자는 진숙 앞에서만은 위장하지 않는다.

과잉된 행동으로 상대방을 홀리는 춘자와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 신중하게 행동하는 진숙은 상반된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김혜수는 “진숙의 아버지는 선장이고, 배도 가졌다. 많은 동네 사람들이 선장과 진숙을 의지한다. 부녀는 거기에 걸맞은 진중함과 책임감을 가졌다”라며 “반면 춘자는 늘 착취당하고, 얻어맞고, 들이받으며 고달프게 살아왔다. 그러다 처음으로 진숙을 통해 따뜻함과 안락함을 경험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춘자에게 진숙이란 “첫 가족, 단짝, 어쩌면 전부”라고 했다.

김혜수와 염정아는 1996년 방영된 MBC 드라마 <사과꽃 향기> 이후 27년 만에 다시 만났다. 김혜수는 “정아씨 연기를 정말 좋아한다”며 “꾸준하게 성장하고, 버텨주고, 확장해나가는 배우라는 것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배우들은 흔치 않다. 배우로서 임팩트도 있지만, 현장에서는 굉장히 유연하고 둥글둥글하다”고 했다. 그는 이번 작품을 두고 “다른 기질의 배우가 만나 서로 배우고 시너지를 낸, 너무나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영화 <밀수>는 가상의 도시 ‘군천’의 해녀들 이야기다. NEW 제공.

영화 <밀수>는 가상의 도시 ‘군천’의 해녀들 이야기다. NEW 제공.

김혜수는 영화 <도둑들> 촬영 당시 수갑을 차고 차에 탄 채 물에 빠지는 장면을 찍다 공황 상태를 경험했다고 털어놨다. 다행히 이번 영화 촬영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도둑들> 촬영) 당시에는 공황인지 몰랐어요. ‘나 왜 이러지’가 제일 컸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공황 상태였고, 그 이후로는 물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이번 작품은 역할도 해녀였고 수중 촬영 비중이 많았는데요, 수영을 처음 해보는 배우도 있고 물 공포증이 있던 배우도 있는데 물 속에서 유려하게 움직이더라고요. 그걸 보니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한 분 한 분 기량을 발휘하는 걸 보며 ‘와’하며 박수를 치다보니 그 상태에서 벗어났다고 해야 할까요. 완전히 극복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촬영을 하면서는 괜찮았고, 어느 순간부터 굉장히 자유로웠습니다.”

‘김혜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팜 파탈’이다. 그는 여전히 <타짜> 때 이미지가 남아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 “실제 김혜수는 전혀 팜 파탈이 아니고요. 그렇게까지 잔상이 많이 남는 캐릭터를 했다는 것도 행운이고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잉된 행동으로 상대방을 홀리는 춘자(김혜수)는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 신중하게 행동하는 진숙(염정아)과 상반된 성격을 지녔다. NEW제공

과잉된 행동으로 상대방을 홀리는 춘자(김혜수)는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 신중하게 행동하는 진숙(염정아)과 상반된 성격을 지녔다. NEW제공

현장에서 그를 만난 이들은 그를 ‘정이 많은 맏언니’라고 묘사하곤 했다. 이를 두고 그는 “어느 순간부터 다들 저에게 ‘맏언니’라고 하는데, 나이가 들고 경력이 많아지니 후배들이 생겨서 그런 것이다. 솔직히 맏언니 역할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며 “주연으로서의 책임감, 선배로서의 책임감을 다들 말씀하시는데 그런 것까지 할 여력이 없다.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게 제일 중요하다. 거기에 집중하는 게 1번”이라고 말했다. 이어 “저를 좋다고 얘기하는 분들은 서로 좋은 영향을 받고 자극을 받은 분들일 것”이라며 “제가 엄청나게 대단한 박애주의자라 주변 분들을 다 베풀고 챙기겠나. 다 상호간 영향”이라고 했다.

1986년 영화 <깜보>로 데뷔한 김혜수는 데뷔 38년차다. “좋은 배우, 새로운 배우, 제가 갖지 않은 것들을 보여주는 배우들이 정말 많아요. 오랫동안 배우를 한다는 게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관객이 한 배우의 장단점을 다 아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아끼고 기다려주는 분들이 있다는 게 눈물 날 정도로 감사한 일이에요.”

염정아가 말하는 진숙의 키워드 ‘리더’

“진숙의 키워드는 리더예요. 어깨에 책임감을 잔뜩 얹은 리더죠. 자신뿐 아니라 해녀들, 그 가족들의 생계까지도 걱정하는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선장이었고, 집에 배가 있었고, 해녀들이 우리 배를 타고 나가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걸 어렸을 때부터 보면서 자랐어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춘자(김혜수)를 의심하는 상황에서도 작전을 같이 하게 되는 거죠.”

선장의 딸 엄진숙(염정아)는 해녀들의 리더다. 불의의 사고 이후 모든 것을 잃은 그는 고향 군천으로 돌아와 다시 해녀 일을 한다. NEW 제공.

선장의 딸 엄진숙(염정아)는 해녀들의 리더다. 불의의 사고 이후 모든 것을 잃은 그는 고향 군천으로 돌아와 다시 해녀 일을 한다. NEW 제공.

지난 21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염정아는 진숙을 표현하는 단어로 ‘리더’를 꼽았다. 진숙은 소용돌이치는 상황에서도 주변인들을 위해 참고 벼르는, 진중한 인물이다. 어촌마을에서 선장의 딸로 자란 진숙은 솜씨 좋은 해녀다. 춘자와 가족처럼 지내던 진숙은 어느 날 일어난 사건 때문에 모든 것을 잃는다. 진숙은 이 사건 뒤에 진숙이 있다고 믿게 된다. 크나큰 배신감을 느끼며 칼을 갈지만, 3년 뒤 그렇게 수소문하던 춘자를 만났을 때 그에게는 따귀를 몇 대 날리는 것밖엔 별 수가 없었다. 진숙은 ‘더 큰 건’이 있다는 춘자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해녀들의 생계를 위해서다. 염정아는 “진숙이는 그렇게 독한 사람이 못 되는 것 같다”며 “배신감에 바들바들 떨지만, 정작 제 손으로는 어떻게 못 한다”고 말했다.

힘들수록 감정을 눌러담는 진숙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캐릭터를 연기해 온 염정아에게도 낯선 캐릭터였다. 염정아는 “차라리 표현을 하는 캐릭터면 세게 표현하면 될 텐데 그게 아니다 보니 혼자만의 고민이 시작됐다. 류승완 감독님이 길을 보여주셔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촬영했다”며 “진숙 같은 역할은 별로 안 해 봤다. 튀는 역할, 센 역할만 했다. 진숙은 묵직하게 자기감정을 쭉 밀고 나가는 역할”이라고 했다. <밀수>의 말 많고 개성 있는 캐릭터들 속에서 염정아는 극의 무게중심을 잡는다.

본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진숙(염정아). NEW 제공.

본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진숙(염정아). NEW 제공.

극 중 춘자는 진한 화장을 하고 원색의 옷을 입는다. 머리카락도 굵게 물결친다. 반면 진숙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목 뒤까지 오는 짧은 머리를 했다. 옷도 채도가 낮고 작업복을 연상시킨다. 그는 “춘자와 상반되는 느낌으로 스타일링을 하고 싶었다”며 “머리를 짧게 잘라 보이시한 느낌을 줬다. 그 다음 점프수트를 입게 됐고, 그런 식으로 캐릭터를 만들어나갔다”고 말했다.

김혜수가 명장면으로 꼽은, 춘자와 진숙이 물 속에서 서로 교차하며 서로를 맞잡아 끌어주는 장면에 대해 염정아도 “언니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모든 스태프들이 물 위에 있고 물 속에는 저희 둘 밖에 없었어요. 감독님이 따로 ‘큐’를 주시는 게 아니라 저희가 준비가 되면 시작하는 장면이었죠. 언니랑 저랑 눈을 마주치며 ‘하나, 둘, 셋’하면 딱 출발하는 거예요. 셋을 셀 동안 세상에 언니랑 저 밖에 없었어요. 눈물 나는 순간이에요.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어요.”

염정아는 27년 전 MBC 드라마 <사과꽃 향기> 때 김혜수와 함께 작품을 했다. 그는 “그때도 저는 혜수언니가 엄청 멋있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거침이 없고, 좀 남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며 “당시에는 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만나보니 그런 언니가 아니다. 너무 사랑스러운 분”이라고 했다. 이어 “언니가 하루에도 몇 번씩 ‘너는 이래서 좋아’ ‘너는 어쩜 그렇게 잘해’ 이래서 ‘언니 칭찬 좀 그만해’ 할 정도였다”며 “제게는 ‘너는 뭘 많이 하지 않아도 전달이 잘 되는 배우’ ‘나를 보완해주는 배우’라고 해주셨는데 저한테 되게 큰 칭찬이었다. 의지가 많이 됐고, 잘했단 얘기를 들으니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 오경민 기자 5k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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