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에도, 우표에도, 책 표지와 깃발에도, 포스터에도, 그리고 담뱃갑에도, 어디에도 쫓아오고 있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빅 브러더의 텔레스크린 일상 감시를 묘사하며 쓴 구절입니다. <1984>가 나오기 10년 전인 1939년 조선총독부 사무관인 도모토 하야오는 잡지 ‘조선’에 이렇게 썼습니다. “사람의 눈길이 닿고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선전매체로 이용한다. 보기를 들면, 현수막, 스탬프, 연초 카드, 그림엽서, 영화자막, 애드벌룬, 전광판, 달력, 지도 등이다. 조선전매국에서 담배 속에 시국에 관한 표어 등을 적은 카드를 넣어서 시국을 인식할 수 있도록 했다.” 어디든 쫓아가 감시하고, 선전하려는 게 비슷합니다.
최규진(청암대학교 재일코리안연구소 연구교수)은 <포스터로 본 일제강점기 전체사>(서해문집)에서 “(도모토의) 말은 일제의 선전 메커니즘을 아주 잘 보여준다. 또한, 모든 문화와 예술 영역은 통제의 대상이자 국민동원 수단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선전은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번역어입니다. 최규진은 머리말에서 포스터와 선전의 뜻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선전 “국가 의지 전달, 지배 이데올로기 확산 장치”
일본 정부와 일본군은 제1차 세계대전 뒤부터 선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주축의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선전전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본 것이죠.
원래 선전은 부정적인 뜻은 아니었다고 하네요. 최규진은 “18〜19세기 동안 대부분의 유럽 언어권에서 선전은 정치적 신념의 유포, 종교적 복음의 전파, 상업광고 등을 일컫는 중립적 의미로 쓰였다”고 말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선전이란 조작된 설득”이라는 부정적 느낌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대중에게 침투하기 위해 동원하는 교활한 방법”이자 “자신이 바라는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촉구하려고 그들의 인식을 의도적으로 조작하는 것”으로, “여론을 움직이려 할 때 쓰는 일련의 기술”이자 “정교하게 조작된 기만이며 속임수”로 여기곤 했죠.
그렇다고 국가나 지배계급이 선전을 멈춘 적은 없습니다. 최규진은 “선전은 감성에 호소한다. 그러나 선전을 단순히 비논리적 사기나 거짓말과 똑같은 것으로 여길 수는 없다. 선전이란 국가의 의지를 전달하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확산하는 주요한 장치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피식민지 아들의 애국적 충정과 지배자 아버지의 따뜻함
일본을 비롯한 제국들이 이 의지 전달과 이데올로기 확산을 위해 쓴 주요 매체 중 하나가 포스터다. 일제는 구미 국가들의 “전쟁을 선전하고 전의를 높이려는, 의지를 강하게 전달하는 메시지 매체의 성격이 강한 이른바 ‘대전(大戰) 포스터’ ”를 참조했습니다.
일제 포스터 주류가 이런 전의나 애국심 고취용입니다. 일제는 군국주의를 상업 광고 포스터에도 주입했다. 매일신보 1937년 12월11일자에 실린 광고는 총을 든 군인이 공항에서 이륙하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중일전쟁에 참전한 일본 군인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매신 사진순보’ 1942년 4월 1일 자 표지 사진은 징병제에 대비한 체력검사를 하는 장면을 담았습니다.
모두가 인적자원, 갓난아기도 미래 전력
일제는 갓난아기나 어린이들도 미래 전력으로 여겼습니다. 1928년 5월 28일 자 ‘조선신문’에 나온 ‘아동애호데이’ 포스터엔 “사랑하고 보호하자. 나라의 보내, 아동애호데이!”라는 구절을 적었습니다. 최규진은 “나라의 보배라는 말에는 국가주의사상이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1939년 ‘동포애’ 6월호에 실린 포스터 표제는 ‘국민정신총동원 전국아동애호주간’입니다. “굳세게, 바르게, 귀엽게”라는 표어도 적었다. 그러나 그림 가득히 일장기를 그려서 일본 국가주의를 두드러지게 했다. 우람한 아이와 함께 철모와 비행기를 그려 넣어 ‘전쟁을 위한 아동’을 길러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 이 무렵 매체에서는 ‘국가의 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내 아이를 대할 때 국가에 쓰일 아동을 내가 맡아 기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최규진은 ‘인적자원’의 문제를 짚습니다.
한국도 1990년대부터 ‘인적자원’이란 말을 즐겨 썼습니다. 2007년 4월 ‘인적자원개발 기본법’이란 이름의 법도 만들었지요. 제국주의건, 자본주의건, 공산주의건 현실 국가들은 사람들을 ‘자원’ 취급하는 건 공통점인 듯합니다. 예전 법안 폐지에 관한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자발적 신체 복종과 ‘착한 제국주의’
일제가 벌인 ‘유아 사망률 줄이기’나 ‘모자보건’은 언뜻 좋아 보이는 정책입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이런 사례를 들며 ‘발전’을 강조합니다. ‘최규진은 요즈음의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착한 제국주의론’을 퍼뜨리는 이론 체계로 봅니다. 착한 제국주의는 전쟁에 동원할 인적자원 확보 같은 이데올로기 수행을 가립니다. ‘몸’ ‘위생’ ‘건강’도 사람 자체의 건강보다는 인적자원 확보가 목표였습니다. 해방 뒤 한국에서도 쓰인 “건강은 국력”이라는 표어가 일제강점기 때 나온 것입니다.
결핵 예방 포스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38년과 1939년 일제는 여러 결핵 예방 포스터를 배포했습니다. 중일전쟁 전인 1936년엔 욱일기 모양을 배경으로 “결핵예방. 쬐어라, 햇볕”이라고 적었다. 중일전쟁이 벌어지고 나서는 국가주의 성격을 더 강하게 드러냅니다. 다시 ‘인적자원’이란 말이 나옵니다. “인적자원을 좀먹는 결핵을 예방하자!”라는 표어입니다. 최규진은 “조선총독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체제에서 건강한 ‘인적자원’을 확보하려고 결핵예방운동을 했다. ‘건강동원’인 셈”이라고 말합니다.
건강동원 대상엔 ‘눈’도 들어갔습니다. 일제는 1939년부터 눈 보호 캠페인을 실시합니다. ‘눈의 기념일’행사도 열었습니다.
일제는 “전쟁을 할 때는 적을 정찰하고 전투를 치를 때 또는 생산 확충에서 가장 필요한 무기다. 그러므로 눈을 잘 보호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최규진은 “다시 말하면 ‘눈의 기념일’은 눈이라는 ‘신체 무기’를 소중하게 여기는 날이었던 셈”이라고 말합니다. 1942년 경기도 위생과는 “총후도 눈을 보호하자”는 내용의 포스터를 뿌렸다.
‘미성년자 금주금연법’도 청소년 건강을 신경 써 만든 법같아 보입니다만, 최규진은 “지원병제와도 관계가 깊다 앞으로 군인이 될 청소년의 신체를 관리하려는 뜻이었다. ‘지원병제가 실시되니 청소년들의 체위 향상을 위하여 청소년의 건강을 해롭게 하는 음주끽연을 금지한다’라는 뜻이 담겼다”고 말합니다.
국가 권력의 위생 선전을 두고 최규진은 “‘청결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신체’를 창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근로’란 천황에게 봉사하는 행위”
책은 ‘젠더’와 ‘노동’ 문제도 끄집어냅니다. 노동(자) 대신 ‘근로(자)’라는 말을 쓴 것의 근원을 찾은 것은 이번 책의 학술 성과입니다.
일본에서 노동이란 단순한 노동자의 노동이 아니라 황국민의 노동이다. 따라서 그 바탕에는 사봉(仕奉)이 있다. 이것은 자유주의적·마르크스주의적 노동관이나 나치즘적 노동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일본에서는 현재 노동이라는 말 대신에 근로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이 글에서 ‘사봉’이란 무엇을 뜻할까. 사봉이란 “일에 봉사한다”라는 뜻이며 고전에도 나오는 말이다. 봉사라는 말과 거의 같다. 그러나 일본에서 ‘사봉’이라는 말은 기독교적 봉사나 나치즘의 민족 동포에 대한 ‘봉사’와 같은 뜻이 아니라 천황을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다. 일본에서 노동이라는 말 대신에 쓰는 ‘근로’란 천황에게 봉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 일제는 사람들이 ‘근로봉사’를 하면서 ‘국가관념 함양’,‘희생봉공’, ‘비상시 국민의식 철저’ 따위의 효과가 있기를 바랐다.
‘천황’이란 표현이 거슬리는 분들도 있을 듯합니다. <녹색평론> 발행인인 김종철은 생전 여러 강연에서 ‘일왕’ 표기에 문제를 제기한 적 있습니다. ‘천황’이란 말을 쓰는 게 존경심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천황’이란 말을 써야 ‘천황제 관료독재 국가’라는 일본 국가의 성격과 아시아 근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이었습니다.
여성 상품화의 기원
반관반민 단체인 ‘경성협찬회’가 만든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보고’ 포스터는 춘앵무를 추는 기생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일본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포스터죠. 최규진은 “화려한 색과 현란한 무늬가 있는 옷을 입고 족두리를 쓴 기생은 ‘풍속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욕망의 대상이자 식민지의 은유가 되기도 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포스터는 근정전과 경회루는 어둡고 쓸쓸하게, 공진회의 근대적 건물은 환하고 북적이게 그려 ‘옛 조선’과 ‘새로운 식민지’를 대비하기도 합니다.
인천 송도 바다에서 훈련하는 이화여고 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엔 “황국의 처, 황국의 어머니가 될 여학생에게 바다의 지식을 넓히는” 훈련을 한다고 적었습니다. 여학생들을 ‘전쟁 인적자원’을 낳고 기르며 내조하는 대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감정노동도 여성에게
일제는 1942년 “조선에서 처음으로 만든 색채가 아름다운 사진 벽신문” 몇십만 장을 인쇄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붙입니다. 여자 여럿이 활짝 웃는 모습을 배경으로 해 “서로 무뚝뚝함과 찌푸린 표정보다는 따뜻한 친절과 예의를, 밝은 미소를 가게 앞에, 창구에, 직장에 넘쳐나게 해서 더욱 밝게, 강하게, 유쾌하게 총후의 모든 힘을 발휘하고 정진하여 장기전을 이겨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글을 일본어로 적었다습니다. 일제는 ‘친절 운동’을 하면서 포스터나 벽신문에선 주로 웃는 여성을 그렸죠.
국가의 요구를 명랑하게 받아들여라!
최규진은 일제의 친절·명랑 운동을 “정부 정책을 고분고분 따르라는 뜻”이라고 했다. 군국주의와도 이어졌습니다. “친절은 전력(戰力)이다! 결전생활을 친절로써 이겨내자”라고 적은 광고가 예죠.
최규진은 “국가의 요구를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친절과 명랑 운동의 핵심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광수도 1945년 “국민학교 5~6년생 계집애들이 골무와 바늘을 가지고 더운 여름방학 날에 교실에 모여서 하루 종일 군복의 호크와 단추”를 다루는 모습을 두고 “조그마한 손가락들이 바늘구멍투성이가 되지만 이 딸들이 싫다는 생각을 한 일이 있는가. 이 얼마나 귀엽고 명랑한 일인가”라고 적었죠.
책은 일제가 포스터를 제작·배포한 1915년부터 패망한 1945년 8월까지 나온 포스터를 ‘계몽’ ‘홍보’ ‘사상동원’ ‘전쟁동원’이라는 네 범주로 나눠 분석합니다.
이 책은 대작이고 역작입니다. 주와 참고문헌만 100쪽입니다. 포스터, 삽화, 사진 등 도판은 총 961장입니다. 이 중 포스터가 대략 60%고요. 최규진은 “기존 책이나 논문에서 나온 적 없는 도판이 60%가 넘는다”고 했습니다. 책은 옛사람의 시각적 체험을 더 잘 이해하도록 현존 자료, 즉 컬러 포스터를 많이 실었습니다.
도서관도 민심 선도 기구
포스터를 그저 나열한 책은 아닙니다. 최규진은 “포스터에는 ‘거대 담론’에 가려졌던 ‘작은 역사’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식민지 조선에 살던 이들의 ‘일상 생활사’도 많이 담았습니다. 그중 하나가 ‘독서’입니다. 일제는 1910년대 무단통치를 하다가 1920년대 조선인을 식민지배에 순응하도록 ‘문화지배정책’을 강화합니다. 도서관 등을 확충했죠. “‘사회교육’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기관”이라 여긴 겁니다. 도서관은 “민심을 선도하기 위한 국가 기구”였죠.
책엔 익숙한 문구 하나가 나옵니다. 조선도서관연구회가 1933년 10월 내 ‘조선지도서관’ 표지엔 일본 여성이 책 읽는 모습 아래, ‘人, 書を作り書は人を作る’라고 적혀 있습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뜻이죠. 교보문고 표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교보 창업주가 어떻게 이 표어를 만들었는지는 모릅니다. 참고로 교보 창업주인 대산 신용호의 아버지 신예범은 독립운동을 벌였습니다. 신용호도 중국에서 사업할 때 독립운동자금을 댔지요.
일제의 ‘계몽을 위한 포스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문제도 있습니다. 최규진은 맺음말에서 ‘착한 제국주의’의 본 모습을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이데올로기 없는 선전은 없다
책은 ‘백정’들의 인권운동인 ‘형평사 운동’의 포스터 같은 ‘저항의 포스터’도 넣었습니다. 결론에선 ‘저항’ 의미를 이렇게 풀어갑니다.
최규진은 책의 메시지를 일제강점기에 한정하지 말고 지금 여기로 이어내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 ‘지배 이데올로기를 지배적으로 만들려 했던’ 일제의 프로파간다를 오늘날의 자본주의 프로파간다에 빗대어 생각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