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추(狗雛)’라는 말이 있다. ‘개 구(狗)’에 ‘병아리 추(雛)’자인데, ‘개새끼’라는 쌍욕으로 번역된다.
888책 4770만자에 이른다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이 ‘구추’라는 욕이 딱 한 번 나온다.
그렇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절대 지존이라는 임금이, 그것도 남도 아닌 며느리에게 내뱉었다.
1646년(인조24) 2월8·9일이었다. 사간원 헌납 심로(1590~1664) 등이 인조에게 신신당부한다.
“강빈이…소현세자의 부인이었으니 전하의 자식이 아닙니까. 그러니 선처를 베푸시어….”
그러자 인조가 “개새끼를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다니, 나에게 모욕이 아니고 무엇이냐.(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고 앙앙불락했다.
인조가 언급한 ‘개새끼’는 다름아닌 자신의 맏며느리인 소현세자빈 강씨(1611~1646·이하 강빈)였다.
72년 뒤인 1718년(숙종44) 4월17일 숙종은 강빈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면서 시호를 ‘민회(愍懷)’로 정했다.
‘불쌍히 여긴다’는 뜻의 ‘민(愍)’과 ‘생각하다, 달래다’는 의미인 ‘회(懷)’자를 썼다. <숙종실록>은 “강빈이 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백성들이 슬퍼하고 가슴 아파했다”고 ‘민회’ 시호를 지은 의미를 새겼다.
■“난 조선의 세자다.”
대체 인조는 며느리와 무슨 원수가 졌기에 ‘개새끼’라는 쌍욕을 퍼부었을까.
병자호란 발발(1636년 12월)과 삼전도의 굴욕(1637년 1월)이 인조와 소현세자 부부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조선이 항복하면서 맺은 ‘정축화약’ 중 기막힌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대(인조)의 장자(소현세자·1612~1645)와 다른 아들(봉림대군·효종), 대신들의 아들(혹은 동생)을 인질로 삼는다…”(<인조실록> 1637년 1월28일) 이 조항에 따라 소현세자와 강빈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
심양(당시 청나라 수도)에 도착한 소현세자 일행은 청나라가 마련해준 관소(심양관)에 짐을 풀었다.
상주인원은 500명이 넘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 수행 신하와 자손(형제), 관리는 물론 그에 딸린 가속 노비까지 합하면 그리 추정된다. 청나라는 군병 및 군량 징발, 포로 송환 문제 등으로 조선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1596~1648)가 얼마나 세자를 괴롭혔으면 소현세자가 참지못하고 쏘아붙였을까.
“내가 비록 이역만리 와 있지만 일국의 세자다…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있으니 그 따위로 날 협박하지 마라.”(<인조실록> 1640년 11월1일)
■뜻밖에 문전성시
무엇보다 500명이 넘는 상주 인원을 먹여 살리는 것 또한 큰일이었다. 처음엔 청나라가 식량과 찬거리 등을 제공했다. 그러나 청나라가 차츰 지원 예산을 줄이더니 “이제 농사지을 땅까지 줄 터이니 알아서 수확해서 관소를 운영하라”(<심양일기> 1641년 12월12일)고 통보했다. 결국 소현세자 부부는 속환(돈 주고 되사옴)한 조선인 포로들을 써서 농사를 지었다.
농사 첫해(1642) 3319석이었던 수확량은 2년차인 1643년 5024석 및 목화 620근으로 대폭 늘었다.
수확량은 관소(심양관)의 식량과 경비 등으로 쓰고 남는 것은 교역에 활용했다.
“세자가…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아 둔전(관소 소유의 논밭)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두고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했다. 심양관이 문전성시를 이뤘다.”(<인조실록> 1645년 6월27일)
■왕위 빼앗길까 불안해진 인조
이와 같은 심양관 소식을 들은 인조의 심기는 불편해졌다. 그렇지않아도 두고두고 인조의 밤잠을 설치게 한 것이 있었다.
항복문서(‘정축화약’·1637년 1월28일)에 포함된 조항이었다.
“…그대(인조)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짐(청 태종)이 인질 아들(소현세자)을 차기 왕으로 세우겠다.”
그러던 1643년(인조 21) 세자빈 강씨의 아버지(강석기·1580~1643)의 부음 소식(6월13일)에 청나라는 세자 부부의 일시 귀국을 허락한다. 인조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세자가 돌아온다는데, 이상하지 않은가. 세자를 박대하던 청나라측이 요즘 태도를 바꿔 지나치게 후대한단다. 아무리봐도 의심스럽다.”(1643년 10월11일)
세자 부부는 1644년 1월20일 일시 귀국했다. 그러나 세자빈은 인조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친정집에 가보지도 못한채 청나라로 되돌아가야 했다.
■구설에 오른 세자의 축재
소현세자 부부가 8년간의 볼모생활을 끝내고 영구 귀국을 허락받은 것은 1645년(인조 23) 2월이었다.
그런데 세자 부부가 그동안 축적한 재산이 구설수에 올랐다. <인조실록> 1645년 3월9일자는 “세자가 귀국할 때 중국의 물화를 잔뜩 싣고 와서 사람들이 매우 실망했다”면서 “세자가 중국에서 가져온 채단 400필과 황금 19냥을 호조로 돌려보냈다”고 덧붙였다. 1년 뒤 강빈이 사약을 마시고 죽은 후인 <인조실록> 1646년 5월2일자를 보라.
“강씨가 개인소장한 은 1만650냥, 황금 160냥, 왜검(倭劍) 19자루를 호조에 귀속시켰다”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세자 부부는 4700여석에 이르는 곡식과 말·소·나귀·노새 등을 심양관에 두고 왔다. 조선 조정은 “그중 청나라 땅에서 수확한 곡식은 모두 돌려주고, 돈 주고 사들인 짐승들은 가져온다”(1645년 3월14일)는 결정을 내렸다. 물론 세자 부부가 몸값을 주고 돌려받은 남녀 농군 및 심마니 160여명도 귀국했다.
이같은 세자 부부의 막대한 재산 축적을 둘러싼 세간의 여론은 곱지 않았다. “세자가 심양에서…청나라가 시키는대로 하고…오직 재산축적에만 일삼아…크게 인망을 잃었다”(<인조실록> 1645년 4월26일)는 평가가 그것이다. 특히 “상(인조)은 심양관이 문전성시를 이뤘다는 소식에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1645년 6월27일)고 했다.
■일곱구멍에서 선혈이 낭자
그런데 소현세자에 귀국한지 두 달도 안되어 변고가 생겼다.
학질에 걸려 사흘간 침을 맞던 세자가 1645년(인조23) 4월26일 갑자기 승하한 것이다.
세자의 시신 모습을 전한 <인조실록>(6월27일자) 기사가 심상치 않았다.
“세자의 온 몸이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 날의 실록은 ‘세자의 독살’ 가능성만 전하지 않았다. 세자 부부의 ‘심양관 문전성시 소식에 인조가 불쾌감을 표했다’는 사실도 전했다. 그러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인물을 거론한다. 인조의 총애를 한몸에 입은 후궁 조씨(?~1651)다.
“주상의 지나친 사랑을 받은 조씨는 세자 부부와 본디 서로 좋지 않았던 터…밤낮으로 주상 앞에서 참소하여 세자 내외에게 죄악을 얽어 만들어, 저주를 했다느니 대역부도의 행위를 했다느니 하는 말로 모함…”
세자에게 침을 놓은 의관도 조씨의 어미 집에 드나들다가 특채된 이형익(생몰년 미상)이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합동으로 “함부로 침을 놓아 세자를 죽게 한 이형익을 국문해야 한다”(4월27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조는 “그럴 것 없다”고 일축한다. 이상한 일이다. 차기 왕위를 이어갈 세자가 급서했는데 그냥 덮어둘 일인가.
■후궁 조씨의 ‘베갯머리 송사’
또 있다. 1년 뒤 인조는 강빈(소현세자빈)의 사사를 명하면서 죄목을 열거하는 비망기를 내렸다.
즉 “강빈이 심양 시절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했고, 미리 ‘홍금 적의’(왕비의 예복)를 만들었으며, ‘내전’(왕비)의 칭호를 사용했다”(<인조실록> 1646년 2월3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록의 사관은 인조의 언급에 의미심장한 주석을 달아놓았다.
즉 “1643년 소현세자 부부가 일시 귀국했을 때 ‘내간’에서 ‘강빈의 청나라 공모설과 왕위교체설을 임금에게 발설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강빈을 모함한 ‘내간’은 후궁 조씨를 지칭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서 사관은 “심양 시절 세자를 동전, 강빈을 빈전이라 했는데, 그것은 청나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지 세자와 빈이 스스로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니다”라고 변호해주었다.
후궁 조씨의 ‘베갯머리 송사’로 세자 부부를 향한 인조의 미움이 증폭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보통이 아니었던 강빈
세자가 급서했으면 세자의 장자, 즉 원손(석철·당시 10세)이 차기 왕위를 잇는게 순리였다.
그러나 인조는 “원손이 너무 나이가 어리고 자질이 밝지 못해 결코 나라를 감당할 수 없다”면서 둘째아들인 봉림대군(효종·1619~1659, 재위 1649~1659)을 왕세자로 책봉해버렸다.
인조는 강빈의 주변 인물들을 차례로 제거해나갔다. 1645년(인조 23) 7월22일 강빈과 가까웠던 상궁 애란이 무당의 헛된 주술을 듣고 망동했다는 죄로 국문을 받고 쫓겨났다. 8월26일에는 강빈의 남자 형제 4명이 유배형을 받고 쫓겨났다.
9월10일에는 강빈의 궁녀인 계향과 계환이 궁중에서 발생한 저주 사건에 연루되어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후궁 조씨가 거론되었다. 그때 강빈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인조는 “강빈이 감히 임금의 지근거리에까지 달려와 큰 소리로 고함 치고 소동을 일으켰으며, 문안 인사까지 끊었다”(1646년 2월3일)고 비난했다.
강빈은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강빈이 사사된 1646년 3월15일의 <인조실록>은 “…강씨는 성격이 거셌는데, 끝내 불순한 행실로 주상의 뜻을 거슬려 오다가 결국 사사됐다”고 전했다.
성격이 녹록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 말은 맞다. 예컨대 강빈은 병자호란이 한창이던 1637년 1월 강화도로 피난할 때 자신을 박대한 강화 검찰사 김경징(1589~1637)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쳐 꾸짖은 것으로 유명하다.
“경징아! 경징아! 네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여기에 심양 시절 경험한 만주족과 황실여성들의 적극적인 모습이 강빈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청나라 여인들은 궁정잔치에 참석하고 황제의 사냥에 동행했으며 기마에도 능했다. 재혼도 가능했다.
■“며느리는 난신적자”
그러던 1646년(인조24) 1월3일 <인조실록>이 심상치않은 기사를 전한다.
“주상이 전복구이를 드시다가 독이 있었다. 강씨(강빈)을 의심해서 소속 궁인명과 수라간 나인 등 7~8명을 국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7~8명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만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이들 중 강빈의 가장 신임한 궁녀 두사람은 압슬형(사금파리를 무릎 아래 깔고 짓이김)과 낙형(불에 달군 인두로 지짐) 끝에 사망했다.
남은 세 사람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사관의 평가가 눈길을 끈다.
“이미 상(인조)이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는 엄명을 내린 터였다. 그렇게 격리된 마당에 어떻게 임금의 수라에 독을 넣는다는 말인가.”
사관은 그러면서 유력한 용의자로 ‘후궁 조씨’를 지목한다. “…사람들은 ‘독 전복구이 사건의 배후에 조씨가 있다’고 믿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인조는 기어코 강빈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독 전복구이’ 소동이 일어난지 보름 뒤인 18일이었다. 인조는 “이달초부터 열이 가끔 위로 치밀어 가슴이 답답하더니 근래 증세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면서 “독을 먹은 데서 오는 증상인 것 같다”고 호소한다.
인조는 얼마 후 대신들을 소집한 뒤 “독을 넣은 범인은 강씨”라고 단정하고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내용의 비망기를 발표한다.(2월3일)
“이 역적처럼 흉악한 자는 없었다. 임금을 해치고자 한 난신적자는 하루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다.”
깜짝 놀란 대신들은 이후 한 달 이상 “억측으로만 강빈을 죄줄 수 없다”, “신을 먼저 죽이고 강빈을 죽여라”, “폐위는 시키되 목숨만은 살려주자”고 애원했다. 그러나 인조는 그러한 여론을 깡그리 무시하고 강씨에게 사약을 내린다.(3월15일)
■72년만의 명예회복
그러나 억울하게 죽은 강빈을 동정하는 여론은 효종-현종의 치세를 이어지는 동안 이어졌다.
급기야 72년만인 1718년(숙종 44) 3월25일 숙종은 “평소 강빈의 옥사에 마음으로 항상 측은한 마음을 갖고 있다”(<민회빈복위선시도감의궤>)는 소회를 밝혔다. 숙종은 이어 4월8일 비망기를 내려 “억울함을 알고도 그 억울한 죄를 씻어주지 않으면 말이 되겠느냐”면서 강씨의 명예회복을 명했다. 숙종은 ‘민회빈’의 시호를 얻은 강빈의 복위·선시(시호를 내림)를 알리는 교서를 발표했다. 물론 교서에서는 “민회빈이 죽은 것은 흉악한 자들의 참소와 이간질 때문”(<숙종실록> 1718년 5월22일)이라고 천명했다. 끝까지 ‘악의 축’인 인조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았던 것이다.
■최악의 군주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외규장각의궤 학술총서 7>을 펴냈다. 그중 실록과 의궤를 통해 강빈을 둘러싼 인식변화를 살피고 숙종 연간에 복위가 결정되는 과정을 정리한 논문(허문행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이 눈길을 끈다.
이 의궤는 1866년(고종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했다가 2011년 대여 형식으로 귀환한 외규장각 도서(297권) 중 한 권이다. 이 논문 등 강빈 관련 자료를 읽어가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
혹자는 세자부부를 모함한 후궁 조씨(숙원-소원-소용-소의-귀인)를 손가락질 할 것이다.
그러나 조씨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것은 비겁하다. 여자의 말에 휘둘린 인조야말로 ‘못난이 군주’이기 때문이다.
인조는 반정 덕분에 떡(왕위)을 거저 먹은 무자격자였다. 그 무능한 군주 때문에 조선이 어찌 되었던가. 되지도 않은 ‘친명반청’의 일변도 외교를 폄으로써 나라는 두번에나 전란에 휩싸이며 거덜 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세자와 세자빈은 8년간이나 다른 60만 포로들과 함께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런 세자에게 군말없이 왕위를 물려줄 생각은 하지않고 혹여 제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세자는 숱한 의혹 속에 급서했다. 인조는 남편을 잃은 며느리에게 ‘개XX’니 ‘강적(姜敵)’이니 하는 욕설을 퍼부으며 죽음으로 내몰았다. 사상 최악의 군주라는 손가락질을 받아도 싸다.
■소현세자였다면…
만약 소현세자와 세자빈이 조선의 차기 왕과 왕비가 되었다면 어찌되었을까. 물론 역사엔 가정이 없다.
다만 이 한가지는 꼭 거론하고 넘어가야겠다. 소현세자 부부는 1644년 9월 청나라 수도가 된 북경에 머물면서 독일출신 선교사 아담 샬(1592~1666)과 교분을 쌓았다. 샬은 학문을 좋아하는 세자를 위해 자신이 갖고 있던 책을 모두 주었다. 이때 세자가 친필편지를 보내 감사인사를 전했다.
“구세주 천주상, 역서, 서학서들을 선물로 받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상상도 못했을 것…천구의(별과 별자리를 표시한 구체 모형)와 역서들은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것들…조선으로 돌아가 인쇄·복사해서 선비들에게 널리 알리겠습니다.”
세자는 “조선인들은 마치 사막에 살다가 학문의 전당으로 옮겨가는 행운을 맞은 듯 탄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효종처럼 헛된 북벌론을 꾀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자빈 역시 청나라에서 보고 배운대로 새로운 국모의 면모를 보여줬을 것이다. (이 기사를 위해 허문행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했습니다. 조은경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복원정비과장이 자료 사진을 보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허문행, ‘17~18세기 소현세자빈에 대한 인식 변화와 추복’, <외규장각의궤 연구:추상·복위부묘봉릉>(학술총서7), 국립중앙박물관, 2023
김남윤, ‘소현세자빈 강씨의 심양관 생활’, <역사연구>24, 역사학연구소, 2013
소현세자 시강원, <심양장계(심양에서 온 편지)>, 정하영·박재금·김경미·조혜란·김수경·남은경 역주, 창비, 2008
장정란, ‘아담 샬의 생애와 유교관’, <종교신학연구>, 서강대신학연구소, 1994
김경미, ‘소현세자의 청 체험과 문화수용’, <한국문화연구> 10권,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