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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그리 정신’은 아직도 유효할까…박정희 패러다임에 갇힌 한국 공학

2016.04.08 20:22 입력 2016.04.12 10:07 수정 심진용 기자

엔지니어들의 한국사

한경희·게리 리 다우니 지음, 김아림 옮김

휴머니스트 | 288쪽 | 1만8000원

“30대, 40대 엔지니어들은 헝그리 정신과 도전정신을 잃었다. 요즘의 엔지니어들은 의지력이 약해졌다.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한다.” 한 60대 엔지니어의 비판이다. 또 다른 원로 엔지니어는 이렇게 개탄했다. “우리가 ‘이렇게 하자!’라고 하면 젊은이들은 일단은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러고는 곧장 몸을 홱 돌려 ‘당신이나 그렇게 하라지’라고 중얼댄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매사에 이런 식이다.”

그러나 선배들의 질타는 젊은 세대에게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 한 젊은 엔지니어는 2011년 한국과학기술인연합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올렸다. “우리가 더 이상 굶주리지 않는데, 어째서 우리에게 헝그리 정신을 기대하는가?” 2004년 생물학연구정보센터 홈페이지에는 이런 글도 게시됐다. “가끔 헝그리 정신으로 밤낮없이 연구에 매진하는 모습을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생각이다. (…) 적절한 보수와 대접이 뒤따르지 않는 직업에 최선을 다하고 열정을 바칠 사람은 별로 없다.”

후배들의 ‘헝그리 정신’ 부족을 준엄하게 꾸짖는 선배들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공학에 뛰어든 이들이다. 저자들은 박정희 정권기를 한국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엔지니어 전성시대’였다고 분석했다. 주지하다시피 박정희는 수출에 국가 미래를 걸었고, 수출의 근간이 되는 과학기술 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공장 노동자들에게 ‘산업 노동자’ ‘수출의 선두주자’ ‘조국 근대화의 기수’와 같은 명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국내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과학기술자들에게도 박정희는 최고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과학기술자들에게 산업화의 상징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했고, 높은 사회적 지위와 함께 그들이 국가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선사했다. 특권적인 지위와 함께 혹독한 목표량도 함께 주어졌지만, 이는 오히려 도전의식을 북돋우고 이른바 ‘헝그리 정신’을 키우는 토양이 되기도 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19세기 조선후기부터 1960년대까지 엔지니어들이 그같은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조선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학문적 수양을 거친 학자 관료인 문관에게 특권을 부여하던 나라였다. 조선을 집어삼킨 일본 총독부는 고등교육이 조선인의 정체성을 키울 것을 우려해 조선인 교육을 저숙련 인력 양성으로 제한했다. 미군정은 남한을 농업국가로 간주하고 자국과 달리 남한에서는 기술 교육을 강조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 또한 소비재산업에 치중해 엔지니어 양성을 위한 공학 교육과 이들의 일자리 창출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기의 엔지니어 전성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1980년대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권력은 국가에서 대기업으로 넘어갔다. 집단의 책임보다는 개인의 독창성과 혁신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중화학공업에 맞춰져 있던 관심은 전자공학이나 정보통신기술 등 다양한 방향으로 옮겨졌다. 외환위기가 터지고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면서, 젊은 엔지니어들은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조국 발전의 첨병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경쟁할 수 있는 개인의 역량이 중심적인 문제가 됐다.

과거의 ‘헝그리 정신’이 이제도 통용될 것 같지는 않다. 시대가 변했다. 박정희는 누구보다 과학기술을 강조하며 엔지니어 전성시대를 열었고, 급속한 산업화를 일구는 데 성공했지만 그 부작용도 분명했다. 그 시대 한국 과학기술자의 임무는 오로지 수출과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기초 연구분야는 등한시됐다. 당장의 수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다. 상명하달의 군사문화도 공학 분야에 깊이 스며들었다. ‘하면 된다’식의 사고가 연구기관을 지배했다. 산업현장도 마찬가지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한 기술 인력들은 군인의 관리감독을 받았다. 공사를 방해하는 여러 조건은 말 그대로 ‘적’으로 지목됐고, 적은 여건과 관계없이 이겨내야 했다.

지금 한국 공학은 시대 변화를 제대로 따르고 있을까. 회의적이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 이후 정부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국형 알파고’ 개발에 본격 착수하겠다고 발표했다. 50년 전 박정희 시대가 떠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저자 중 한 사람인 한경희 연세대 교수는 “현재 정부의 접근 방식은 매우 ‘한국적’인 방식”이라며 “1960년대 이후 정착된 추격형 정책 패러다임에서 조금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책은 엔지니어라는 특정 분야에 초점을 맞췄다. 19세기 조선후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엔지니어들을 둘러싼 한국의 역사를 살폈다. 저자들은 서문에서 “이 책은 엔지니어 여러분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엔지니어 여러분에 관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 전반을 조망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헝그리 정신’을 둘러싼 세대 갈등이 공학 계열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며, 박정희 이후 급격한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는 것 역시 공학 계열만의 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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