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무질서·탐욕·모순의 빅토리아시대를 정조준하다

2019.12.10 21:42 입력 2019.12.11 17:27 수정
장영은

에밀리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가 살았던 19세기 영국 빅토리아시대는 도덕과 절제 등 청교도적 가치관이 여성들을 짓눌렀다. 인간의 내면을 파헤친 그의 <폭풍의 언덕>은 출간 당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이후 재평가되며 뒤늦게 빛을 봤다.

에밀리 브론테가 살았던 19세기 영국 빅토리아시대는 도덕과 절제 등 청교도적 가치관이 여성들을 짓눌렀다. 인간의 내면을 파헤친 그의 <폭풍의 언덕>은 출간 당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이후 재평가되며 뒤늦게 빛을 봤다.

“부귀영화를 나는 가벼이 여기네/ 사랑을 웃으며 조롱하네./ 명예욕은 아침이면 사라지는/ 한낱 꿈이었네.// (…)//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그것이 전부./ 살아서도 죽어서도, 견딜 용기를 지닌,/ 구속받지 않은 영혼.”

1821년, 에밀리 브론테는 어머니를 잃었다. 세 살 소녀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지만, 에밀리 브론테는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울지 않겠다, 울고 싶지 않다./ 어머니는 우리가 우는 걸 바라지 않는다.”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매우 건강했다.

1777년, 패트릭 브란티는 아일랜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대장장이, 직조공으로 일하면서도 악착같이 공부를 했고, 10대 후반에 마을학교 교사가 되었다. 청년은 야망이 컸다. 교구학교로 옮겨 경력을 쌓고 인맥을 넓혔다. 명망가 자제들을 가르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패트릭 브란티는 가정교사 생활을 마치고 케임브리지대학교에 들어갔다. 이제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성(姓)을 브론테로 바꿨다. 대학 졸업 후, 패트릭 브론테는 영국 국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1812년 마리아 브란웰과 가정을 이루었고, 연이어 여섯 남매를 얻었다.

아버지는 밀턴의 <실낙원>을 신봉했다. 그 책이 자신을 가난과 무지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고 믿었다. 서재를 자녀들에게 개방했다. 샬럿, 에밀리, 앤은 특출했다. 자매들은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셰익스피어, 바이런, 메리 셸리, 월터 스콧의 작품들에 푹 빠져들었다. “난 그 책들의 내용을 머릿속에 새기고 마음속에 담았으니, 그건 절대 빼앗아가지 못할 겁니다.” 딸들은 기숙학교에 진학해서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었다.

1835년 에밀리 브론테는 언니 샬럿과 기숙학교 생활을 시작했지만, 건강 문제로 그해 가을에 혼자 낙향했다. 에밀리는 시련을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생의 어려운 일을 지나며 나는 결코/ 하늘의 도움도 응원도 구하지 않았네/ 나는 내 운명을 가면 없이 보았고/ 눈물 없이 마주했네.” 1836년부터 에밀리 브론테는 시를 쓰는 한편, 독일어와 피아노를 독학으로 터득했다. 차분하게 자신의 미래를 준비한 에밀리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842년 에밀리는 샬럿과 벨기에로 떠난다. 에밀리는 프랑스와 독일어로도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브뤼셀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집 근처에 여성들을 위한 기숙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싶었지만, 기금 마련이 쉽지 않았다. “나는 하루 종일 애썼으나 고통스럽지는 않았어/ 배움의 금광에서/ 그리고 지금 다시 저녁이 밀려와/ 달빛은 부드럽게 반짝이네.”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에밀리는 읽고 쓰는 일에 더욱 몰입했다. “밖의 세상은 그토록 희망이 없다니./ 안의 세상을 나는 두 배로 소중히 여긴다./ 속임수, 증오, 의심 그리고 차가운/ 의혹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 세상.”

문학은 여자의 일이 될 수 없다?
언니 샬럿 ‘여성 폄하’ 당한 뒤에
세 자매, 남자 이름으로 시집 발간
‘저자 된 기쁨’ 속 소설 쓰기 돌입

1845년, 샬럿은 우연히 에밀리의 시를 발견한다. 샬럿, 에밀리, 앤 브론테의 가장 뛰어난 시들을 모아 공동 시집을 내자고 동생들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다만, 가명(假名)을 쓰는 편이 좋겠다고 제안한다. 샬럿은 그제야 동생들에게 모욕적인 사건을 털어놓았다. 오랫동안 작가가 되고 싶었던 샬럿은 1843년 로버트 사우디에게 시 몇 편을 보냈다가 큰 봉변을 당했다. “문학은 여자의 일이 될 수 없으며, 그러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앤, 에밀리, 샬럿 브론테의 남자 형제 브란웰이 그린 초상화. 당초 브란웰도 그려져 있었지만, 나중에 지워졌다.

앤, 에밀리, 샬럿 브론테의 남자 형제 브란웰이 그린 초상화. 당초 브란웰도 그려져 있었지만, 나중에 지워졌다.

필명을 만들었다. 1846년 5월,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의 시 작품들>이 발간되었다. 세 자매는 자신들의 시가 책으로 만들어지자, 벅찬 감동을 느꼈다. 출간 첫해 두 부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저자가 된 기쁨이 더 컸다. 각자 다음 작품에 착수했다. 에밀리는 조용히 외쳤다. “가자, 지금 우리에게 불어오는 바람은/ 다시 불지 않으리니.” 과감하게 소설 쓰기에 돌입했다.

에밀리는 개혁과 보수가 공존했던 19세기 영국 사회에 매력과 환멸을 번갈아가며 느꼈다. 산업혁명이 진전되면서 영국의 전통적인 세계관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귀족들과 신흥 부호들은 서로를 멸시했다. 지배계층 내부의 혈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의회 정치의 기틀이 확립되고 있었다. 영국의 성장 속도만큼이나 사회 곳곳에 모순은 증폭되었다. 여왕이 대영제국을 통치했지만, 공적 영역에서 활약하는 여성은 쉽게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도덕과 절제, 정숙과 순종 등 청교도적 가치관이 여성들을 짓눌렀다. 균형과 조화를 영국 미래의 기치(旗幟)로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극도로 무질서하고 탐욕이 난무했던 빅토리아시대를 에밀리는 정조준하고 있었다.

<폭풍의 언덕>은 연인 캐서린을 잃고 악인을 자처하며 타인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방식으로 복수에 나선 히스클리프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언급되어 왔지만, 정작 작가는 사랑에 큰 기대를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랑은 야생 찔레꽃과 같고,/ 우정은, 호랑가시나무 같다.” 대신 에밀리 브론테는 인간이 얼마나 “허망한 풍향계 같은 존재”인지 끝까지 추적한다. 리버풀에서 우연히 만난 피부색 다른 고아를 집으로 데려온 언쇼는 집시 소년에게 죽은 아들의 이름을 붙여주지만, 히스클리프가 하인으로 취급받는 상황을 방치한다. 캐서린의 오빠 힌들리는 출산 중 사망한 아내를 잊지 못하고 도박에 빠져 히스클리프에게 집을 통째로 넘기게 되고, 캐서린의 남편인 에드거의 동생 이사벨라는 히스클리프의 책략과 음모를 알면서도 결혼을 감행한다. 에드거는 딸 캐시가 감금당한 상태에서 히스클리프의 아들 린턴과 결혼하게 되는 상황을 저지하지 못한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재산을 모조리 손에 움켜쥐었지만, 결국 복수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인하며 히스클리프는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과 “악마의 선물”을 구별하지 못한 채 파멸의 길로 질주한다.

당대 인정 못 받은 ‘폭풍의 언덕’
도덕성 결여·산만한 전개 지적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비난까지
작가 정체 알려지자 더 거센 비판

1846년 7월 <폭풍의 언덕>이 완성되었지만, 출판사들은 명작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에밀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1847년 7월, 토머스 뉴비는 <폭풍의 언덕> 출판을 결정한다. 이번에도 엘리스 벨이라는 가명으로 책이 나왔다. 초판 250부가 발간되었다. 반응은 차갑다 못해 잔인했다. 작품 전반에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교양이 전무(全無)하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폭력과 광기가 사회를 타락시킬 것이라는 근거 없는 비난도 폭주했다. 난데없이 유령이 출몰하는 등 이야기 전개가 산만하다는 지적도 뒤따랐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작가가 에밀리 브론테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세상은 또 한번 본색을 드러냈다. 무자비하고 거친 인간의 내면을 여자가 그토록 집요하게 파고들어갔다는 사실을 마냥 불쾌해했다. 에밀리 브론테가 마치 시대의 반역자라도 되는 듯 몰아붙였다.

1837년 6월26일 에밀리 브론테의 일기. 거실에서 앤과 함께 작업하고 있는 내용을 썼다.

1837년 6월26일 에밀리 브론테의 일기. 거실에서 앤과 함께 작업하고 있는 내용을 썼다.

에밀리의 몸은 점차 쇠약해져갔다. 샬럿은 혼자 속을 앓았다. “오늘 저녁 에밀리에게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걸 확인하기가 어려워. 아파 다 죽어가면서도 너무나 금욕적이어서 동정을 구하거나 받는 법이 없어.” 1848년 12월, 서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에밀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했다. “오, 나는 당분간 정처 없이/ 잠을 잘 것이고,/ 비가 얼마나 함빡 적시든지,/ 눈이 나를 뒤덮든지 전혀 신경도 안 쓸 테요!/ 천국의 약속은, 이 거친 야망들,/ 전부 아니 절반도 이루지 못할 거요./ 끌 수 없는 불길로, 지옥이 위협해도/ 이 억누를 수 없는 의지를 제압하지 못할 거요.”

“어떤 소설과도 닮지 않았다”
무자비하고 거친 인간 내면 추적
“세상을 한 권의 책에 결합시켜”
서머싯 몸 등 시대마다 재평가

1877년부터 <폭풍의 언덕>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시대마다 새로운 찬사가 잇달았다. “<폭풍의 언덕>은 어떤 소설과도 닮지 않았다”는 서머싯 몸의 평가는 정확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에밀리 브론테의 “거대한 야심”을 꿰뚫어 보았다.

에밀리는 “세상을 한 권의 책 안에 결합시킬 힘”을 스스로 발견한 작가였다. 오직 세상을 견딜 수 있는 “용기”만을 간구했다. “내 영혼은 비겁하지 않다/ 세상 폭풍우에 시달리는 지구 안에서 떨지도 않는다.” 에밀리는 자신의 영혼을 지켰다. 세상 앞에 당당했다. 글 쓰는 여자는 용기를 잃지 않는다.

■ 필자 장영은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19)무질서·탐욕·모순의 빅토리아시대를 정조준하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초빙교수다. 이태영, 천경자, 박완서 등 20세기 초 한국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과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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