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624년(인조 2년) 3월15일자 <인조실록>을 보면 알쏭달쏭한 기록이 등장한다.

“모문룡 도독이 차관인 모유준 등을 보내 역적 이괄의 난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면서 물건 40가지를 보냈다. 그 물건들 가운데 춘의(春意)라는 것이 있었는데 상아로 나체여인을 조각해서 만든 것이다.(以象牙刻作裸體婦人) 승지 권진기가 그 버릇없고 무례한 것을 말하자 차관에게 돌려보냈다.”

이 짧은 <인조실록> 기사는 청나라 장수 모문룡이 이괄의 난을 진압한 것을 축하하며 보냈다는 ‘춘의’, 즉 나체 여인 조각상이 대체 무엇인지 더이상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후대의 이규경(1788~?)이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인용한 박양한(1677~1746)의 <매옹한록>을 보면 1624년 3월15일의 일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명나라 말엽 음탕한 풍속이 날로 늘어나 남녀가 성교하는 것을 조각하거나 그려놓았다. 이것을 ‘춘의(春意)’라 했다. 중국의 사신이 와서 예물로 바쳤는데 그 가운데 상아로 만든 춘의가 있어 인조가 승정원에 내렸다. 그것은 상아에다 남녀를 조각한 것으로 작동시키면 성교하는 형상이 되었다.”

<운우도첩>의 한 장면. 운우도첩은 단원 김홍도의 낙관이 찍혀있지만 실은 후대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운우도첩>의 한 장면. 운우도첩은 단원 김홍도의 낙관이 찍혀있지만 실은 후대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조선을 충격에 빠뜨린 성(性) 기구

사실 ‘춘의’의 원뜻은 ‘만물의 봄뜻’이다. 주자학의 입문서인 <근사록>은 “마음을 고요하게 한 다음에 만물을 보면 자연히 봄뜻이 있게 된다.(靜後見萬物 自然皆有春意)”고 했다. 즉 ‘춘의’란 살고자 하는 뜻(生意)와 같은 말이다. 그런데 봄과 생명 탄생의 의미인 춘(春)이라는 글자가 성(性)가 비유되어 망측한 단어로 변하고 만 것이다. 곧 남녀간 성행위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품을 가리키는 ‘춘화(春畵)’의 다른 말이다.

사실 남녀간 노골적인 성행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아서 은유적인 표현이 속출했다. ‘춘의’, ‘춘화’도 그렇지만 운우도(雲雨圖)나 건곤일회도(乾坤一會圖)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됐다. 비와 구름을 뜻하는 운우는 성교를 가리키는, 가장 널리 쓰인 은유적 표현이다. 운(雲)은 여성의 성액을. 우(雨)는 남성의 정액을 상징한다고 한다. 건곤일회는 하늘(남자)과 땅(여자)가 결합한다는 뜻이다.

<매옹한록>을 보면 ‘벌거벗은 남녀의 조각상을 작동시키면 성교하는 형상으로 변했다’는 것이니 당시로서는 매우 망측스럽고 해괴한 물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매옹한록>은 흥미로운 내용을 더 전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인형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모두 모문룡이 성교형상의 인형을 보내 우리를 모독했다고 여겼다. 중국인들이 평소 노리갯감으로 이런 인형을 사용하는 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조 임금이 ‘당장 부숴버리라’고 명했다. 그런데 이 때 조정의 신하 가운데 이 인형을 가지고 완상(玩賞)하는 자가 있었다. 그 때문에 그 자의 벼슬길을 막았으니 우리나라 풍속이 깨끗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한번도 그런 성 기구나 그림을 보지못한 인조 임금을 비롯한 조선 조정은 모문룡의 선물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음을 알 수 있다.

경주 미추 왕릉 지구 계림로 30호분에서 출토된 토우장식 장경호. 다양한 성풍속이 보인다

경주 미추 왕릉 지구 계림로 30호분에서 출토된 토우장식 장경호. 다양한 성풍속이 보인다

필시 청나라가 조선을 무시한 것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게다가 형상까지 해괴했으니 인조도 멘붕에 빠져 “당장 부숴버리라”고 추상같은 명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이 호기심 넘치는 물건이 그냥 사라질 리 만무했다. 어떤 자가 야릇한 성물(性物)을 가지고 놀다가 임금에게 걸려 벼슬길이 막혔다. 그런데 박양한이 ‘한 사람의 벼슬길까지 막은 것을 보면 조선의 풍속이 얼마나 깨끗한지 아느냐”고 자랑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규경(1788~?)은 박양한의 <매옹한록> 내용을 자세히 전하면서 중국에서 흘러 들어온 이른바 ‘춘의도’를 또 한 번 흥미롭게 보충 설명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그림 중에 남녀가 성교하는 각양각색의 형상이 그려져 있거나 또는 상자 속에 넣은 인형을 작동시키면 남녀의 성행위를 생동감 있게 보이는 것도 있다.(各種男女淫褻之狀或塑像 藏之匣中 轉機活動) 이를 춘화도라 하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성욕을 발동시켜 흥을 돋운다고 한다.(令人動欲助興云)”(<오주연문장전산고> ‘한화춘정변증설’)

■“일본의 성풍속은 짐승과 같다”

성행위의 모습이 고려시대 청동거울에 새겨져 있다 청동거울은 개성 인근에서 출토됐다.

성행위의 모습이 고려시대 청동거울에 새겨져 있다 청동거울은 개성 인근에서 출토됐다.

문헌기록들을 종합할 때 남녀의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한 춘화나 조각상은 명나라 말엽인 1624년 무렵 반입됐음을 알 수 있다.

이규경과 박양한이 살았던 영조 연간에 나름 폭넓게 유포되었다. 사실 당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춘화들이 유행하고 있었다. 온갖 다양한 성교 체위를 묘사한 그림들이 중국에서는 넘쳐났다. 일본의 경우엔 더했다.

이른바 우키오에(浮世繪)라는 화려한 다색 목판화로 춘화를 제작했다. 일본인들은 춘화를 부적의 개념으로 몸에 지니고 다녔다. 춘화의 주인공들은 관능미를 넘어 괴기스러울 정도로 과정이 심했고, 때로는 변태적이었다. 그래도 소중화의 의식을 갖고 유교적 가치를 지키려 했던 조선의 사대부들로서는 그렇게 노골적이고 변태적인 춘화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일례로 1791년(정조 15년)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던 신유한(1681~1751)은 일본의 성풍속과 춘화 유행을 두고 “마치 짐승과 같다”고 표현했다.

“결혼에 동성을 피하지 않고, 사촌 남매끼리 결혼하고 형수와 아우의 아내가 과부가 되면 또한 데리고 산다. 음탕하고 더러운 행실이 금수와 같다. 집집마다 목욕탕이 있는데, 남녀가 함께 벗고 목욕하며 대낮에 정사를 벌인다. 밤에는 불을 켜고 성교하고 색정을 도발하는 자료를 가지고 극도의 즐거움을 맛본다. 사람마다 춘화들을 품속에 지녔다. 화려한 종이 여러 폭에 남녀가 교접하는 형상을 백가지 천가지로 묘사했다. 또 춘악(春樂)이 몇가지가 있어 색정을 도발하는데 사용한다.(<해행총재> ‘해유록부견문잡록’)

■개방의 극치였던 신라의 성문화

신라시대 토우 모습

신라시대 토우 모습

그러나 사실 유교의 성도덕이 정착되기 전에는 매우 개방적인 삶을 살았다.

굳이 청동기 시대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신라의 성문화를 보라. <화랑세기>를 보면 신라에서는 이른바 어색(물고기를 사냥하는 듯한 엽색행각)은 물론 근본을 찾을 수 없는 근친혼과 사통·통정과 같은 난잡한 성행위가 흔히 자행됐다. 예컨대 미실이라는 여인은 임금 3명(진흥·진지·진평)과 태자 1명(동륜),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을 닥치는대로 녹여버린 희대의 요부였다.

미실은 황실에 색을 제공하는 신분(대원신통)이었다. 그녀는 어머니(묘도)로부터 ‘남자를 녹이는’ 방중술(房中術)을 배웠다. <화랑세기>는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쳤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정식남편인 세종은 ‘거동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기록은 출토된 고고학적 유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인조 임금이 만약 미추왕릉과 계림로 30호 고분군, 노동동 고분군 등에서 발굴된 토우를 봤다면 즉시 내동댕이 쳤을 것이다. 물론 더러는 손가락 사이로 힐끗 쳐다봤을 지도 모르지만….

엉덩이를 치켜든 여인, 그리고 과장된 남근을 들이미는 남자…. 그러면서 남성을 돌아보며 히죽 웃는 여인…. 특히 1976년 안압지에서 발굴한 목

신윤복의 작품으로 알려진 <건곤일회도첩>

신윤복의 작품으로 알려진 <건곤일회도첩>

제남근의 두부에 붙여놓은 돌기는 압권이다. 인조 때 청나라 모문룡이 선물한 성물(性物)과는 또다른 차원의 물건이니까…. 민속학자 이종철은 “감미로운 여심을 자극하는 양물(陽物)”이라고 해석했다.

■이상 야릇한 고려의 청동거울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의 경우도 만만치 않았다. 송나라 서긍의 기행문인 <고려도경>을 보면 “냇가에서 남녀가 부끄럼없이 함께 목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표적인 ‘남녀상열지사’의 가요인 쌍화점은 고려 여인이 몽골인, 승려, 왕, 술집아비 등과 관계를 맺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만전춘(滿殿春)의 가사는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만들어 님과 내가 얼어 죽을 망정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만들어 님과 내가 얼어 죽을 망정 정 나눈 오늘 밤 더디 새시

신윤복의 작품으로 알려진 건곤일회도첩

신윤복의 작품으로 알려진 건곤일회도첩

라 더디 새시라”는 것이다. 즉 애인과 함께라면 얼음 위 대나무잎으로 자리를 깔고 얼어죽을 지언정 사랑을 나누겠다는 남녀간 대담한 정사를 묘사하고 있다.

성을 묘사한 고려시대 유물 가운데 청동거울이 유명하다. 개성부근에서 출토된 청동거울은 지름 9.1㎝, 두께 0.6㎝로 한 손에 꼭 쥘 수 있는 휴대용 거울이다. 거울의 앞면에는 풍화설월(風花雪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방중술 책에 기록된 4가지 성교 체위가 새겨져 있다. 남녀가 서로 마주한 자세로 여성이 반듯이 누워있는 모습, 허리를 들고 상대와 입을 맞추는 행위.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 교합하는 행위, 엎드린 여성을 남성이 뒤에서 껴앉고 있는 행위 등이다.

이 청동거울의 4가지 체위는 마치 쌍화점의 여인이 4명의 남성과 관계를 맺는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본부인에게 맞아 팔이 부러진 남편

성리학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운 조선조에 들어서 엄격한 성도덕을 강조했다. 마음 속으로야 그렇지 않았겠지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장치를 감

최우석의 <운우도화첩>

최우석의 <운우도화첩>

히 마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미증유의 혼란이 다소 가라앉으면서 조선 사회가 변화를 겪게 된다. 전후 복구에 따른 인구증가와 농업 및 상공업의 발달로 특히 영정조 시대에들어 한양의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유통경제가 크게 발전했다. 상업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한 중간계층은 양반 사대부와 같은 위치에 오르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남부럽지 않은 재력과 문화수준에 비해 신분의 벽을 뚫기 힘들었던 중간계층의 불만은 사치향락문화로 해소되곤 했다. 여기에 일부 서울 경기지역에 거주하던 문사관료들과 신분이 불안정했던 서출들, 여기에 아전이나 하급관리에 한량들까지 가세했다.

1691년(숙종 17년) 지금이라도 언론의 가십에 들장할만한 일이 실록에 등장한다. 기생에게 정신을 빼앗겼다가 본부인에게 두들겨 맞아 팔이 부러진 현직 현령(읍장)를 파직시킨 일이다.

혜원 신윤복의 작품으로 알려진 <건곤일회도첩>. 낮은 촛대에 촛불을 밝히고 두 여인이 춘화를 감상하고 있다, 왼쪽 여인의 숨결에 촛불이 휘날린다,

혜원 신윤복의 작품으로 알려진 <건곤일회도첩>. 낮은 촛대에 촛불을 밝히고 두 여인이 춘화를 감상하고 있다, 왼쪽 여인의 숨결에 촛불이 휘날린다,

“사헌부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영유(평남 평원)의 현령 김세진은 읍기(邑妓)에게 미혹되어 창가(娼家)를 출입하다가 본부인에게 맞아 한 팔이 부러졌습니다. 이것은 공무원의 수치이니 파직해야 합니다.”(<숙종실록>)

숙종은 사헌부의 주청에 따라 공무원의 품위를 떨어뜨린 김세진을 파직시켰다. 1778년(정조 2년) 정언 송전의 상소문을 봐도 적나라하다.

“요새 한양에 놀이가 지나쳐 각 관사의 하급관리나 시전 한량의 무리까지 평상시에도 풍악을 울리고, 향락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한번에 쓰는 비용이 3~4만전에 이릅니다.”

■조선시대판 꽃뱀과 섹스파티장

1738년(영조 1년) 12월21일 사헌부 지평 김상적은 작금의 난잡한 세태를 개탄하며 풍류가 음란한 몇몇 관리들을 탄핵했다. 심지어 비구니들이 사는 절(이사·尼舍)까지 불륜의 소굴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사의 은밀한 방에까지 여염집 과부들이 음분(淫奔·사통)하는 소굴이 되었습니다. 사대부들은 창가(娼家)와 기방(妓房)에 분주하게 출입합니

<건곤일회도첩>에 나온 그림.

<건곤일회도첩>에 나온 그림.

다. 침비(針婢)와 의녀(醫女)들까지 끼어들고 민간의 여인들까지 자색이 조금 곱다고 하면 몸을 팔아 관료들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돈을 빼앗아 갑니다.”

지금 들어도 이 상고문이 사실인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비구니 절이 일종의 ‘묻지마 섹스파티장’이 되고, 일반 여성들까지 꽃뱀 노릇을 해서 몸을 팔아 돈을 갈취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가히 문란한 성풍속이 갈 데까지 갔다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일도 있었다. 1738년(영조 1년) 자신이 돌보던 창녀가 관공서(공조)에 숨자 칼을 뽑아들고 난입해 소동을 피운 이영이라는 자가 탄핵됐다. 그런데 이영 사건의 상소문을 올린 사간 김정윤은 “이영이 천얼(賤孼·천첩 소생의 자식) 출신으로 무뢰배와 결탁해서 시내를 휘젓고 다니는 자”라고 표현했다. 출신성분의 한계를 지닌 천얼이었던 이영은 어릴 때부터 불량배가 되어 무리를 지어 거리를 떠돌다가 몸을 파는 창녀의 기둥서방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창녀와 관계가 뭔가 잘못되어 관공서까지 난입하는 사건을 일으켰고….

최근 1972억원에 경매된 모딜리아니의 <누워있는 나부>

최근 1972억원에 경매된 모딜리아니의 <누워있는 나부>

■여자 저고리는 날로 짧아지고…

사치향락의 사회풍조는 여성들의 패션도 바꾸어놓았다. 요즘의 노출 패션을 빼닮은 짧은 저고리가 유행했고, 풍성한 가체로 섹시함을 과시하는 헤어스타일도 대세를 이뤘다. 에컨대 실학자 박제가(1750~1805)는 <북학의>에서 친구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여자들 저고리는 날로 짧아지고, 치마는 날로 길어진다. 이런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맞이할 때 이런 차림으로 휘휘 젓고 다니니 부끄러운 일이다. 한 친구가 말했다. ‘요즘 사람 중에 집안을 대장부스럽게 다스리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

사나이가 제 구실을 못하니 여성들의 저고리 길이가 짧아진다는 것이다. 성호 이익(1681~1763)은 짧은 저고리를 ‘요괴’라고까지 표현했다.(<오

1895년 일본의 구로다 세이키의 누드 작품(<아침화장>)을 둘러싼 논쟁을 주제로 그린 프랑스 조르주 비고의 삽화.

1895년 일본의 구로다 세이키의 누드 작품(<아침화장>)을 둘러싼 논쟁을 주제로 그린 프랑스 조르주 비고의 삽화.

주연문장전산고>)

“부녀자들은 언제부터인가 소매가 좁고 짧은 저고리를 입는다. 귀천의 구별없이 통용되는 게 괴이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습관으로 여긴다. 여름에 입는 홑저고리는 아래를 좁혀 위로 말려 올려졌으므로 치마와 닿은 부분을 가리지 못하니 더욱 해괴하다. 이런 요괴의 복장은 마땅히 금해야 한다. 말세가 되니 부인의 의복이 소매는 좁고 옷자락은 짧아졌다.”

실학자 이덕무 역시 “요즘 여자들의 옷은 저고리가 너무 짧고 치마는 너무 길고 넓으니 의복이 요사스럽다”고 표현했다.

“요즘 새 옷을 보면 소매에 팔을 꿰기도 어려울 정도로 좁다. 심한 경우엔 피가 통하지도 않아 살이 부풀어 벗기도 힘들 정도가 됐다. 소매를 째고 벗어야 한다. 어찌 요망스런 옷이 아닌가. 모름지기 복장에서 유행이라는 것은 다 창기들의 아양떠는 자태에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세속 남자들은 그 자태에 매혹되어 그 요사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처자에게 입으라고 권한다.”(<청장관전서> ‘사소절’)

■패션은 기생들의 아양떠는 자태에서 나온 것

여기서 잠깐…. 실학자 이덕무의 ‘패션관’에 웃음이 나온다. 패션의 유행이라는 것은 모두 창기(娼妓)들의 아양떠는 자태에서 나온다는 주장이다. 이덕무의 말을 현대의 의미로 표현하자면 이덕무가 살았던 조선 정조시대의 패션흐름은 ‘섹시 트렌드’였음을 알 수 있다.

1800~1820년 사이 혜원 신윤복(1758~?)의 그림을 보면 당대의 패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여인들의 저고리가 단원 김홍도(1745~1806)의 풍속화 등에 비해 사뭇 달라졌기 때문이다. 소매통이 좁아지고 허리춤이 드러나도록 젖가슴 부위까지 길이가 짧아졌다. 당대의 유물을 비교해도 알 수

김관호의 1916년 작 <해질녘>. 제10회 문부성 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지만 벌거벗은 그림이 불필요한 흥분을 자아낸다는 이유로 신문에 게재될 수 없었다.

김관호의 1916년 작 <해질녘>. 제10회 문부성 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지만 벌거벗은 그림이 불필요한 흥분을 자아낸다는 이유로 신문에 게재될 수 없었다.

있다. 정조시절(1780년) 저고리 길이가 47.5㎝였지만 1800년 이후엔 25㎝ 정도로 무려 20여㎝나 짧아졌다.

머리 모양도 마찬가지였다. <정조실록>을 보라.

“두발을 서로 크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물가가 크게 올라가고 사치스러운 자는 가산이 기울어졌으며, 가난한 자는 인륜을 폐하는데 이르렀다, 그 폐단이 극에 달했다.”(<정조실록> 1788년)

이덕무는 가채의 무게 때문에 급기야 목이 부러져 죽은 어린 소녀의 사연을 소개한다.(<청장관전서>)

“머리를 널찍하게 서리고 비스듬히 빙빙 돌려서 마치 말이 떨어지는 형상을 만든다. 그 위에 갖가지 장식물까지 더하니 그 무게를 지탱할 수 없게 된다. 요즘 어느 한 부자집 며느리가 나이 13세에 다리를 얼마나 높고 무겁게 하였던지,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 갑자기 일어서다가 다리에 눌려서 목뼈가 부러졌다. 사치가 사람을 죽였으니 아, 슬프다!”

패션이 어린 소녀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비극을 낳은 것이다.

■춘화 여인들의 숨결에 흔들리는 촛불

이런 사치향락의 풍조는 자연스레 ‘춘화’의 제작과 유포로 이어졌다.

당대의 춘화는 역관을 비롯한 부유한 중간층은 물론 사대부까지 향락적인 감상물로 떠올랐다. 성문화는 주로 기생들의 ‘일터’인 기방을 중심으로

혜원 신운복의 <사시장춘>. 사랑채 문앞에 남녀의 신발이 노여있다. 한짝이 살짝 틀어져 있는 것이 더 호기심을 자아낸다. 이같은 기법은 훗날 춘화의 기법에도 차용돼 최우석의 <운우도화첩>에도 구현된다.

혜원 신운복의 <사시장춘>. 사랑채 문앞에 남녀의 신발이 노여있다. 한짝이 살짝 틀어져 있는 것이 더 호기심을 자아낸다. 이같은 기법은 훗날 춘화의 기법에도 차용돼 최우석의 <운우도화첩>에도 구현된다.

시작됐다가 시전상인과 한량, 나아가 여염집 여인들에게까지 확산됐다. 기생의 딸이었던 춘향의 방에도 춘화가 걸려 있었다. 혜원 신윤복의 작품으로 알려진 <건곤일회도첩> 중 한나를 보면 기녀 둘이 밤에 촛불을 켜놓고 춘화를 감상하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이 그림을 보면 춘화를 감상하는 여인의 숨결에 촛불이 휘날리고 있는 장면을 잡을 수 있다. 이렇게 거친 숨결에 흔들리는 촛불은 흔들리는 여심을 상징하고 있다. 역관 이상적은 1844년 <건곤일회도첩>의 서문에 이렇게 표현했다.

“빼어난 여색은 반찬이 된다는 말은 1000년을 두고 내려오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대의 책상 아래 이 화첩을 드리니 날마다 부드럽고 따뜻한 고향에 들어가는 맛을 볼 것이다.”

춘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자태가 곧 반찬이 된다는 말이며, 세상 사람들은 춘화첩을 간직한채 마치 고향에 가는 느낌을 늘 맛보라는 이야기다.

■조선 춘화의 품격

그런데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여전히 유교적 도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조선의 춘화는 중국과 일본처럼 그렇게 널리 유포되지는 않았다.

표현도 중국과 일본처럼 노골적이거나 변태적이지 않았다. 조선의 춘화는 중국이나 일본의 도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절제미와 서민적인 성격을 담은 독자적인 성풍속을 그렸다는데 의미가 있다. 게다가 당대엔 조선의 독자적인 화풍인 풍속화가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화풍 속에서 춘화도 서정적인 풍속화의 느낌을 잘 살린 것이다. 그러니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문화를 대변하는 춘화를 그리면서도 양반에 대한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의식을 반영하게 된 것이다.

한량과 건달, 비녀(婢女), 양반, 기녀는 물론 승려와 노부부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왕실 춘화를 중심으로 발달한 중국 춘화와는 매우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특유의 서정적이고 익살스런 풍류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예컨대 <운우도첩> 중 한 장면은 노부부의 노쇠한, 그래서 다분히 안타까운 성 행위를 그리고 있다. 노골적인 애정표현이나 변태적인 자세를 묘사하기 보다는 매우 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물론 혼교의 모습도 이따끔 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주로 정상체위의 절제된 그림이 대부분이다. 성기의 표현도 과장되거나 비현실적이지 않은게 대부분이다.

■외려 에로티시즘을 자극한 가림의 미학

조선의 춘화첩 가운데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운우도첩>이다. <운우도첩>에는 단원 김홍도의 낙관이 찍혀있지만 그의 작품인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후대 화가의 작품이라는 추측이 있다. 원래 40첩으로 구성돼있지만 10점이 대표격이다. 자연 경물에 상징성을 부여하며 자연과 인간의 생성원리의 통일성을 부여했다. 이 때문에 이 화첩은 단순한 성적 유희물로만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버드나무와 달을 배경으로, 자연 속 인간의 성행위를 그린 것은 성이 자연의 이치와 같다는 점을 함축시켜준다.

또한 바위와 나무 같은 자연물들은 여성과 남성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로 다가온다. 이것이 남녀 교잡을 암시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여성 성기 모양의 바위와 그 바위에 뿌리를 내린 진달래는 남근을 상징한다. 정작 등장 인물들의 중요부위는 옷으로 가리는 ‘센스’가 도리어 에로티시즘을 가미시킨다. 주로 기방을 중심으로 사랑방, 안방, 대청마루 등의 실내와 우물가와 뒤뜰, 연못가, 산속, 들녘 등의 야외 등 풍속화의 면모를 물씬 풍긴다.

물론 <운우도첩>에는 당대 문란한 성 풍속의 단면을 보여주는 그림도 있다. 양반댁 남성과 하녀의 성교 모습이 그 중 하나다. 하지만 그림이 성행위 자체에 집중되지 않고 오히려 양반집 실내 임을 보여주는 배경에 시선을 돌리게 그려졌다. 성 행위에만 집중하는 단순한 춘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승려와 여인들의 성풍속도 그렸는데 이것은 당시 사회의 퇴폐성과 불교의 타락상을 시사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이 그림도 자극적이거나 변태적인 행위로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승려라는 특수 신분 때문인지 더 자극적으로 느껴진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혜원 신윤복의 추정작으로 알려진 <건곤일회도첩>도 빼어난 작품이다.

총 12면으로 이뤄진 화첩에는 혜원의 낙인이 찍혀있다. <운우도첩>의 배경과 달리 주로 실내를 무대로 그렸다. 대신 인물의 심리묘사와 은유를 강조한 조선의 성풍속화 특유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 그림을 보면 화분의 육중한 나무줄기와 무성한 이파리 등은 남성기와 여성의 음모를 상징하고 있다. 담뱃대와 상에 놓인 청홍의 술잔 역시 남녀를 상징하고 있다. 주제와 부주제의 짜임새 있는 구성이다. 탕건을 쓴 노인과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잔을 가리키며 웃고 있는 젊은 여성…. 해학적이면서도 풍자적이다. 아마 이 그림의 주제는 ‘회춘’인 것 같다. 또 사랑을 나누는 방안의 남녀와 얼굴이 빨개진채 훔쳐보는 어린 하녀의 그림은 단순한 춘화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은 신윤복의 풍속화인 <월야밀회>에 등장하는 구도와 흡사하다.

조선의 춘화 중에는 성기의 직접 노출하지 않아도 성을 표현하는 그림들이 상당수라는 것이다. 조선 춘화만이 갖고 있는 상징미와 은유미, 혹은 은근미라 할 수 있다. 성기를 직접 노출하고 노골적인 행위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자극적인 섹시함을 강조할 수 있음을 조선의 화가들은 알았던 것이다.

■외설로 흘러간 춘화

후대의 춘화 가운데는 정제 최우석(1899~1965)의 <운우도화첩>도 있다.

총 24폭인 정재의 춘화첩은 작품의 질 측면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여전히 조선풍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나름 중요한 자료이다. 그림 중에 주인이 외출한 사이 젊은 머슴과 하녀가 매우 급하게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해학적이다. 절구와 절구공이, 한쌍의 닭과 병아리의 모습을 풍속화의 의미로 그려 넣었다. 조선 말기의 문란한 성을 보여주듯 두 집단의 남녀가 같은 공간에서 관계를 맺는 혼교의 그림도 보인다. 또한 사대부 가의 사랑채 댓돌 위에 나란히 놓인 남녀의 신발을 묘사한 작품도 있다. 직접적인 성행위의 표현이 아니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순박하고 낭만적인 조선 춘화의 기법이다.

이후 춘화는 일제강점기에도 모작되고 계승됐다. 심전 안중식이나 관제 이도영, 이당 김은호 등 젊은 화가들도 춘화제작에 참여했다. 돈 때문이었다. 김은호는 훗날 “어느 호사가의 요청으로 춘화첩을 제작해 준뒤 큰 돈을 받았고 이 돈 덕분에 생활고를 해결하고 작품활동에 힘썼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춘화의 작품성은 급격히 저급화됐다. 일본 창녀의 진출과 매음굴이 번성하면서 일본의 저급한 춘화가 보급됐다. 게다가 서양문물의 도입으로 서양화풍의 음영기법이 반영되면서 원래의 색을 잃어갔다. 이후의 춘화는 그야말로 예술이 아니라 외설 작품으로 그려졌고, 취급됐던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누드와 김관호의 누드

얼마 전 모딜리아니의 누드작품인 ‘누워있는 나부’가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역대 두번째인 1억7000만달러(1972억원)에 낙찰됐다.

모딜리아니가 결핵으로 요절하기 2년 전인 1918년 완성한 작품이다. 그런데 붉은 소파 위에 누운 검은 머리 여인의 나신을 그린 이 작품이 파리에서 처음 전시됐을 때 난리가 났다. 선정성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군중이 그림을 보려고 갤러리 유리창에 몰려드는 바람에 경찰이 전시회를 중단시키는 소동이 일기도 했다.

1916년 서양화가 김관호가 도쿄미술학교 졸업작품으로 제10회 문무성 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도쿄미술학교 졸업작품으로 ‘해질녘’이 특선을 차지했다. 그러자 언론들은 김관호의 수상을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정작 사진을 게재하지는 못했다. 대신 “전람회에 진열된 김군의 그림은 사진이 동경으로부터 도착했으나 벌거벗은 그림인 고로 사진으로 게재치 못했음”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1921년부터 시작된 조선미술전람회(선전)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총독부는 누드 작품들의 전시장 전시는 허용했지만 ‘이해없는 일반인들의 부도덕한 흥분을 촉발시킬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신문에는 사진게재를 불허했다.

해방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949년 문교부 주최 국전에 김흥수의 <나부군상>이 입선했다. 이 작품이 수난을 당했다. 작품이 여러 스케치를 참고로 한 그림이라는 것을 몰랐던 당국자가 “화가가 여러 명의 여인을 한 장소에서 벗긴채 그렸다”고 문제를 삼은 것이다. 결국 이 그림은 풍기문란죄로 전시장에서 철거됐다. 이 작품은 화가가 근무하던 중학교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 그림은 1년 뒤인 한국전쟁 때 학교를 전시병사로 쓰던 유엔군 병사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불타는 청춘들이 누드 작품을 그냥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을 볼 때는 생각하고 봐달라

이런 소동은 우케요에 춘화가 번성했던 일본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

1895년 교토에서 열린 제4회 내국권업박람회에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가 출품한 <아침화장>이 문제를 일으켰다. 관람객들은 거울 앞에서 머리 매만지던 누드를 보고 충격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 그림은 1년 전 도쿄에서 열린 제6회 메이지 미술회에 전시된 적이 있었지만 대중들이 보는 전시에서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논란 끝에 이 작품의 전시가 허락됐다. 하지만 전시기간 내내 경찰이 작품 옆에 배치됐다.

당시 일본 주재 프랑스 풍자 삽화가인 조르주 비고가 <구로다의 아침화장>이라는 삽화를 그렸는데, 아주 흥미롭다. 여러 명의 일본인들이 작품 앞에서 호기심 반 감탄 반으로 몰려있다. 아연실색해서 입을 벌리고 있는 남성과 수치스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는 젊은 여성의 모습이 있다.

그렇다. 어떤 작품이 예술이냐, 혹은 그냥 외설이냐는 철저하게 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 구로다 세이키의 말처럼….

“그림 속의 인물은 인체가 아니라 어떤 개념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을 볼 때는 생각을 하고 봐 주었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던져본다. 조선의 춘화는 어떤가.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참고자료>

정희연, <조선시대 춘화연구>, 성균관대 석사논문, 2011년

윤지영, <조선 후기 춘화의 전개와 특징>, 홍익대 석사논문, 2006년

장미야, <한국 서양화에 있어서 누드화에 대한 연구| 1910~1940년대를 중심으로>, 원광대 석사논문, 2001

서정걸, <한국의 춘화>, 미술사랑, 2000

이태호, <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티시즘>, 여성신문사, 1998

이종철, <한국의 성 숭배문화>, 민속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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