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조선 영조시기에 식니당 이재운이 쓴 <해동화식전>. 이재운은 부를 경시하고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조선사회에서 ‘부는 미덕이고, 가난은 악덕’이라고 주장했다. |안대회 교수 제공

조선 영조시기에 식니당 이재운이 쓴 <해동화식전>. 이재운은 부를 경시하고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조선사회에서 ‘부는 미덕이고, 가난은 악덕’이라고 주장했다. |안대회 교수 제공

“이진욱의 장례를 치르는 날… 멀거나 가까운 사이를 따질 것 없이 다들 부의금을 보내고 찾아와 조문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빈털터리 고아로 태어나 큰돈을 번 18세기 부자 이진욱의 장례식 풍경입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을 보기 어렵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진욱의 장례식을 보면 그 어떤 재상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추구한 조선 사회의 도덕 기준으로 본다면 이진욱의 삶을 좋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집안의 살림살이는 어찌되는지 살피지 않았다”든가, “생업에 힘쓰지 않았다”든가 하는 것은 당대 조선사회의 미덕이었으니까요. 이것을 그럴듯한 말로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시대에 오히려 ‘가난이 악덕이고, 부는 미덕’이라고 주장한 이진욱 같은 사람을 ‘존경받아야 할 인물’로 평가한 이가 있었습니다. 18세기 문인 이재운(1721~1782)입니다. 이재운은 “군자는 상인이 세 곱절의 이익을 남기며 장사하는 것을 안다”라는 <시경>의 구절을 들어 양반도 상인처럼 상행위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최근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가 발굴한 이재운의 <해동화식전>은 바로 조선시대 일반적인 경제통념을 뒤집는 이론과 사례를 정리한 조선시대 재테크책이자 조선경제의 실체를 파헤치고 다양한 경영방법을 안내한 경제·경영전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1750년 무렵 쓴 것으로 짐작되는 이 책은 조선의 뿌리깊은 경제관념을 뒤엎고 ‘잘난 체 하지말고 돈 좀 벌라’고 강조하고 있답니다.

“부유하면 덕이 모여들고 가난하면 악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덕과 악은 복과 벌의 뿌리요. 가난함과 부유함은 또 악행과 덕행의 근본이다.”

이재운은 ‘부자는 나쁘고 빈자는 착하다’는 조선사회의 통념을 배격하고 오히려 ‘부는 미덕이고, 가난은 악덕’이라고 단언합니다. 이재운은 또 “진정 뛰어난 선비는 계획을 세워 부유한 집안을 만든 뒤 인품도. 학문도 사회적인 명망도 얻으려 시도했다”고 주장합니다.

“1년 생활비로 100만전(1만냥)을 쓰는 수십명의 부호가 있다. 그의 부와 명예, 권력은 삼정승도 저리 가라는 수준이다. 영의정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지금으로 치면 재벌이 국무총리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재운은 “또 자수성가로 부를 쌓은 이들은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구체적인 사례를 듭니다.

“부자는 나라에 세금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는 충성됨이다…집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입혀 화목하게 만든다. 이는 효성과 우애의 자애로움이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으니 이는 인자함과 의리와 신의이다. 관혼상제 예식에 신경을 쏟으니 이는 예절바름이다…공경대부들도 부자를 앞다투어 알아주니 관직에 진출하지 않아도 현달한 지위에 오른다. 이는 귀함이다.”

반면 가난한 자들은 어떻습니까. 이재운은 “가난 때문에 굴욕과 수모를 당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느냐”고 ‘디스’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어떤가. 세금이나 환곡도 제 때 내지 못한다. 이는 불충이다. 육친을 돌볼 수 없다. 이는 불효다…벼슬을 구하려 권세있는 자에게 애걸해도 누구하나 받아주지 않는다. 이는 천함이다.”

이재운은 자수성가한 부자 9명의 일대기인 ‘거부열전’을 썼는데요. 이들은 숙종·영조 시대에 실존한 인물들입니다. 이재운은 열전에서 부자가 되는 법을 5가지로 설명하고 그 5가지 경영법의 전형적인 모델로 5명의 부자를 차례로 등장시켰습니다.

먼저 이 글의 모두에 인용한 이진욱은 ‘재물을 크게 불리는 법’에 등장하는 한양의 고아출신 빈털터리였습니다. 그러나 매우 성실했답니다. 그런 이진욱을 눈여겨본 이웃집 부자가 은전 1000냥을 주고 “자네 이 돈으로 돈을 불려보게”라고 했습니다. 이진욱은 이 돈을 가지고 동래 왜관에 가서 생면부지인 왜인 머슴을 동업자로 발탁해서 그에게 돈을 맡겼답니다. 이웃집 부자가 자신을 알아본 것처럼 이진욱도 똑같은 방법으로 왜인 머슴을 믿은 것입니다. 생면부지인 조선인에게 거금을 받은 왜인은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왜인은 그 돈을 받아 일본에 가서 장사해서 세곱절로 재산을 불렸답니다. 이진욱은 그렇게 돈을 벌어서 국제무역 종사하는 이들, 심지어는 중국인과 일본인들에게도 20%의 이자를 받고 자금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런 이진욱이 떼돈을 번 계기가 있었습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3만냥을 털어 서북 지역의 인삼을 매점매석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전국적으로 인삼이 품귀현상을 빚었습니다. 이진욱은 거둬들인 인삼 중 3분의 1을 왜인 머슴에게 주면서 “일본으로 가져가서 조선통신사를 기다리라”고 했답니다. 한편 조선 조정은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가져가야 할 인삼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진욱은 이때 “제가 어떻게든 구해보겠다. 통신사는 그냥 일본으로 떠나라”고 했답니다. 조정에서는 반신반의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어 인삼 구할 돈을 모두 이진욱에게 주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하자 왜인 머슴은 인삼을 떡하니 안겨주었습니다. 조선 조정은 이진욱이 얼마나 예뻤겠습니까.

조선 팔도에서 없었던 인삼이 거짓말처럼 일본에 당도해있었으니까요. 조정은 이진욱에게 통정대부의 품계(정3품)를 내렸습니다. 인삼 매점매석으로 재산을 10곱절 불렸고, 당상관의 품계까지 받았으니 이런 광영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이진욱은 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양의 화류계를 장악하고 권력자들을 웃도는 위세를 과시했답니다. 한 예가 있습니다. 언젠가 의금부 당상관이 이진욱 집에 나졸을 보내서 “당신집에 기거하는 미장이 좀 보내달라”고 청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미장이는 이미 주인 이진욱의 명을 받아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진욱이 거절하자 나졸이 “의금부를 뭘로 아느냐”고 협박하며 미장이를 강제로 대려가려 했답니다. 그러자 이진욱은 그 나졸을 반쯤 죽여놓았답니다. 나졸이 간신히 몸을 추스려 상관(의금부 당상관)에게 자기가 당한 일을 보고했더니 의금부 당상관은 외려 “감히 누구네 집에서 행패를 부렸느냐”고 나졸을 꾸짖으면서 해직시켰답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습니다. 이진욱은 몰래 돈 50냥에 베 10필을 나졸에게 보냈답니다. 나졸이 쫓겨날 줄 알았다는 거죠. 나졸은 그런 이진욱을 원망하기는커녕 고마워했답니다. 이진욱은 이후에도 품계가 올라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로 승직했습니다. 정2품까지 오른 것입니다. 그야말로 정승 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진욱의 매력이 또 있었답니다. 수하 사람하고 하인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는 겁니다. 가난한 친지와 친구들의 생활비와 경조사비를 대주고 그가 부리던 행상꾼들의 가족을 돌봤답니다. 이진욱의 돈을 받아 전국을 돌며 장사를 했던 행상꾼 중 손해보는 이들을 내치기는커녕 변함없이 보살폈답니다.

매점매석과 고리대금업으로 떼돈을 벌었지만, 즉 개처럼 벌었지만 정승처럼 베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랬으니 이진욱이 죽자 장례식장이 문전성시를 이뤘던 것입니다. 정승집 개가 아니라 정승(이진욱)이 죽었는데도…. 심지어 이진욱의 자금을 빌려 쓴 중국과 일본 상인까지 부의금을 보냈답니다.

또하나 비결이 있으니 바로 신용입니다. 처음에 이웃집 부자로부터 1000냥을 받은 것도, 자기가 왜인 머슴에게 거금을 준 것도 신용이 없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신용이 18세기 치부의 덕목이라는 얘기겠지요.

이밖에도 이 책은 다양한 방법으로 떼돈을 번 부자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짚어갑니다. 그러나 때때로 치부방법은 바람직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진욱처럼 매점매석하고, 고리대금을 일삼고…. 하지만 이들에게 공통적인 덕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용, 그리고 나눔의 실천이었습니다.

‘고생을 참고 근면하게 일하는 방법’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한양 청파동에 사는 과부 안씨이다. 안씨는 가세가 기울자 늙은 종에게 치부를 전담시켰다. 늙은 종은 결국 10년만에 큰 돈을 벌어 주인 안씨에게 바쳤다. 결국 안씨와 늙은 종 집안 모두 큰 부자가 되었다.|안대회 교수 제공

‘고생을 참고 근면하게 일하는 방법’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한양 청파동에 사는 과부 안씨이다. 안씨는 가세가 기울자 늙은 종에게 치부를 전담시켰다. 늙은 종은 결국 10년만에 큰 돈을 벌어 주인 안씨에게 바쳤다. 결국 안씨와 늙은 종 집안 모두 큰 부자가 되었다.|안대회 교수 제공

한양 청파동에 사는 과부 안씨는 집안의 늙은 종을 끝까지 믿고 치부를 맡겼습니다. 그 늙은 종 역시 객지를 전전하면서도 주인의 신뢰를 배신하지 않고 돈을 벌어 돌아와 주인에게 번 돈 13만냥을 모두 바쳤습니다. 그런 늙은 종이 죽자 주인 안씨는 그 가족을 면천시키고 3만 냥을 주었습니다.

‘흉년에 기민을 구제하고 큰 부를 일군 방법’에 등장하는 한양 선비 최생은 나눔의 실천으로 유명했습니다. 명문가 후손인 최생은 가세가 기울고 과거에 떨어지자 재산을 팔아 충청도 청주로 내려갔습니다. 최생은 노비들에게 “10년 동안 돈을 벌어 큰 부자가 되어서 자네들과 나누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최생은 곡식을 차곡차곡 창고에 쌓아두고 흉년 때 고을의 기민 500가구 1300명에게 빌려주었습니다. 다행히 이듬해 큰 풍년이 들었고, 최생의 도움받은 마을 사람들은 6만 냥에 해당하는 6만 섬으로 갚았답니다. 최생은 그 돈으로 쌀을 사고팔아서 나중에는 18만 냥의 거부가 됐고, 그 돈을 자금으로 이웃들에게 행상할 자본을 대주었습니다. 그리고 10년 만에 거부가 된 최생은 애초의 약속대로 노비들에게 전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최생의 예는 진정한 부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이것은 7월4일자 출고한 ‘가난은 악덕, 부는 미덕’ 기사를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용으로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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