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두라스서 살인누명 벗고 귀국한 한지수씨

2011.02.07 21:22 입력 2011.02.07 21:23 수정
이종탁 사회에디터

“재외국민이 국가보호를 받지 못한 것은 분명 시스템이 고장난 거죠”

온두라스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다 무죄가 입증돼 풀려난 한지수씨가 어려웠던 때를 이야기하고 있다. 한씨는 온두라스 검찰과 재판부 앞에서 “나는 죽어가는 사람을 돕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고, 다시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씨 변호와 통역을 맡았던 한국외대 하상욱 교수는 전했다.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온두라스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다 무죄가 입증돼 풀려난 한지수씨가 어려웠던 때를 이야기하고 있다. 한씨는 온두라스 검찰과 재판부 앞에서 “나는 죽어가는 사람을 돕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고, 다시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씨 변호와 통역을 맡았던 한국외대 하상욱 교수는 전했다.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이번 설 연휴를 맞아 해외로 나간 한국인이 35만명이라고 한다. 이들이 모두 예정된 스케줄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했을까. 당연히 그래야 하고, 또 그랬을 것으로 믿고 싶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게 세상일이다. 누군가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여행지에서 강도를 만날 수도 있고, 우연히 살인, 또는 사망 현장을 목격할 수도 있다. 이때의 사건으로 귀국길 공항에서 그 나라 경찰에게 체포될 수도 있다. 한국인이 외국 당국에 억류되었다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우리나라 외교부를 통해 가족에게 통보되는 게 상식이지만, 이 상식 또한 언제나 정상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현지 대사관이 여행객의 체포 사실을 아예 모를 수도 있다. 집에서 기다리던 가족이 애가 타 이리저리 문의를 해봐도 행방이 묘연한, 전화는 안받고 숙소에선 떠났다고 하고, 한국 가는 비행기 탑승자 명단에는 이름이 없는 경우. 영화에나 나옴직한 이런 일이 설마 현실세계에서 나에게 또는 우리 가족에게 일어나겠나 싶지만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아무것도 장담할 수가 없다. 온두라스에서 살인누명을 쓰고 교도소 생활을 해야 했던 한지수씨의 사례는 이 모든 것이 영화가 아니라 현실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한씨가 해외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은 우연이고 불운이다. 하지만 재외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것은 분명 시스템의 문제다. 정부 시스템의 어디가 고장났기에 영화가 현실이 되었을까. ‘이종탁이 만난 사람’이 온두라스 법정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고 지난 1월 한국에 돌아온 한씨를 찾은 이유다. 한씨는 뒤늦게나마 누명을 벗고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제2, 제3의 한지수가 나오는 것을 막으려면 한씨 케이스를 상세히 되새겨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한해 해외여행객이 1000만명에 이르는 시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인터뷰는 지난달 31일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있었다.

-이국땅에서 억류 생활한 지 1년 반 만에 집으로 돌아온 거지요? 무사 귀환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분이 관심가져 주시고 애써주신 덕분입니다.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잊어서도 안되고요.”

-귀국해서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저를 도와준 분들을 찾아 인사드리고, 친구들 만나 수다떨고 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도 하고요. 제가 남의 도움을 받았으니 저도 남을 도우며 살겠다는 생각은 있는데 구체적으로 무얼 할지는 결정하지 못했거든요.”

-감옥에서 쓴 글 가운데 “일상이라는 것이 너무 갖고 싶다”고 한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 일상을 가져보니 느낌이 어떤가요.

“그땐 그렇게 갖고 싶었는데, 정작 갖고 나니까 더 이상 고마움이 절실하게 느껴지지는 않아요. 다만 일상을 대하는 저의 태도는 달라졌어요. 살다 보면 여러가지 사소한 일에 부딪히잖아요. 버스 기사가 갑자기 화를 낸다거나, 집에서 설거지를 혼자 해야 한다거나, 언니가 심부름을 시킨다거나 하는 일, 예전 같으면 짜증이 났을 텐데, 무심코 화를 내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게 내가 바라던 일상인데, 내가 이러면 되나, 오히려 감사해야지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제 남을 싫어하면 안되는 입장이거든요.”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스물여덟의 미혼 여성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가상하다. 큰일을 겪고 나서 훌쩍 성숙해진 것일까.

한지수씨가 감옥에서 쓴 일기.

한지수씨가 감옥에서 쓴 일기.

-그동안의 고초에 대해선 어떤 생각인가요. 다 지나간 일이니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은가요? 아니면 하나하나 기억을 살려서 반추하게 되나요?

“그동안 그 두 가지 생각이 왔다갔다 했어요. 그러다 내가 겪은 일을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그간의 일을 글로 남기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도 교훈이 되고, 남에게도 참고가 될 것 같아서요. 일을 겪으면서 내가 잘못한 부분도 있는데 그런 부분은 빼버리고도 싶지만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에게 두려움이 있지만 다 쓸 생각입니다. 그래서 출판사에서 받아준다면 책으로 내고 싶습니다.”

-본인이 잘못한 것이라면 무얼 말하는 거죠?

“제가 카이로 공항에서 체포되어 조사를 받을 때였어요. 묻는 말에 영어로 답했는데 진술서는 아랍어로 돼 있었습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서명하라고 다그치기에 할 수 없이 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게 제가 온두라스로 넘겨지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겁니다. 당시 저는 우리 영사를 불러달라고 요청했으나 무시당했고, 겁이 나서 더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서명 하나 때문에 우리 가족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됐다고 생각하니 나 자신이 용서가 안되는 겁니다.”

그 서명이 정말 그렇게 큰 실수였는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한씨가 카이로 공항에서 체포된 것은 하나의 미스터리다. 그가 온두라스에서 네덜란드 여성 한 명이 죽어가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병원 이송을 돕다가 사건에 휘말리게 된 날이 2008년 8월이다. 그 일로 법정에 나가 참고인 진술을 하고 한 달간 온두라스에 더 머물며 다이빙 강사 자격증을 딴 뒤 미국을 거쳐 한국에 돌아왔다. 그 자격증을 활용해 강사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하다 이집트 다합이란 곳이 적지임을 발견하고 출국한 게 그해 12월이다. 그러니까 온두라스를 떠날 때나, 미국과 한국을 입·출국할 때나, 또 이집트에 들어갈 때 한씨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건발생 1년이 지난 2009년 8월 이집트에서 출국하려다 여권심사대에서 저지당했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격이었다. 한씨가 언제부터 인터폴에 수배됐는지 아리송하지만, 그동안에는 괜찮다가 왜 갑자기 살인용의자로 몰렸고, 카이로 공항 경찰은 어떻게 기다렸다는 듯이 잡아갈 수 있었는지, 한국 경찰은 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지 의문은 숱하게 남아 있다. 그 진상을 지금 규명할 수는 없지만 한씨의 감옥살이는 그렇게 시작됐다.

-사건과는 벗어난 질문인데 온두라스로, 이집트로 다이빙하러 다니는 것을 보면 여행을 무척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대학 때 배낭여행으로 티베트, 필리핀, 호주를 다녀왔습니다. 저 혼자 사람들이 안가는 곳을 골라 다녔죠. 중국 베이징에서 1년간 교환학생, 상하이에서 6개월간 인턴생활을 했고 호주 시드니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면서 호주 전역을 여행하고, 그 사이사이 태국과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모험을 좋아하고 외국 문화와 언어에 대한 적응도 빠른 편입니다. 제가 하도 돌아다니니까 친구들이 ‘네가 한비야라도 되는 줄 아느냐’고 놀립니다. 그분의 삶, 모두가 꿈꾸는 것 아닌가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자극받으며 살아가는 것, 물리적 조건이 안맞아서 못하는 거지 누구든 원하는 거잖아요. 저의 이런 기질을 부모님도 잘 알기 때문에 온두라스나 이집트에 갈 때에도 별로 걱정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집트에서 나오다 붙잡혔을 때 가족들도 몰랐다면서요.

“그렇죠. 처음 일주일 동안 제가 실종상태였다고 합니다. 공항에서 끌려가 그길로 휴대폰을 압수당하고 감옥으로 이송되었으니까요. 나중에 들으니 저의 부모님은 제가 온다고 한 날 오지도 않고 연락도 되지 않자 이집트 주재 한국대사관에 연락했답니다. 비행기 탑승자 명단에 제 이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집트에 있는 게 확실하다, 찾아달라고 했는데 대사관에서 못찾은 겁니다. 언니는 제가 죽은 걸로 생각했답니다.”

-어떻게 연락이 닿았나요.

“이집트 감옥에 있은 지 5일째 되는 날 영어를 하는 여자가 들어왔어요.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수다를 떨었죠. 그런데 이 여자가 다음날 나간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너 가족에게 연락해주겠다’고 제의를 하는 겁니다. 반신반의하는 기분으로 서울의 언니 전화번호를 적어줬어요. 그런데 이틀 뒤 우리 대사관에서 찾아왔더군요. 그 여자가 진짜 국제전화를 해준 겁니다.”

1주일 만에 나타난 대사관 관계자는 한씨가 온두라스로 이송될 것이라고 알려줬다. 그 상황에서 온두라스로 신병이 넘겨지면 살인혐의를 뒤집어쓸 공산이 크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지만 한씨가 아랍어로 된 진술서에 서명을 했기 때문에 손 쓸 방법이 없다고 했다. 결국 이집트 감옥생활 3주 만에 온두라스로 떠났다. 중간에 파나마시티에서 워싱턴 주재 네덜란드 경찰이 합류, 온두라스 법정에 동행해 피의자 심문과정까지 챙기는 것을 보고 한씨는 “네덜란드는 시스템이 잘돼 있구나” 하고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사망자의 조국 네덜란드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한씨는 꼼짝없이 살인용의자가 돼버렸다. 유죄로 결론날 경우 30년을 온두라스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처지로 몰렸다. 한씨 아버지는 생업을 접고 온두라스로 달려갔다. 무엇보다 딸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받을 수 있도록 애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딸은 2003년 폭동이 일어나 86명이 사망한 것으로 악명높은 라 세이바 감옥으로 이감됐다. 우리 대사관에 대해 실망과 원망이 높아졌다.

“제가 라 세이바 감옥에서 3개월을 지냈습니다. 그때 대사관에서 확인서 한 장만 써주면 일단 풀려날 수 있었어요. ‘한지수에게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주지 않겠다’는 내용의 확인서입니다. 여권이 압수된 상태에서 여행증명서가 없으면 온두라스 땅을 벗어날 수 없잖아요. 그 간단한 확인서를 대사관에서 못 써주겠다는 겁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분노할 수밖에 없었죠.”

대사관과의 접촉은 꾸준히 이뤄졌다. 하지만 대사관 측에서 한씨에게 하는 질문은 “무엇을 도와줄까”가 아니라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하는 사실관계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한씨는 “아마 상부에 보고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라며 “그게 관료주의인지 모르겠지만 당신 딸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감옥살이한다고 생각해보라는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온두라스 교도소 생활은 어땠어요?

“이집트에선 언제 나갈지 몰라 늘 심장이 뛰는 기분이었는데 온두라스에선 30년형을 받더라도 살아나가야지, 죽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버텼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아버지가 일주일에 3번 면회를 오시니까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그 교도소에서 폭동이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는데 제가 있는 동안에도 간간이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건은 남자 감옥에서 벌어지지만 담장을 넘어 여자 감옥에도 소리가 들립니다. 감시대에 돌 던져서 창문 깨지는 소리, 총소리가 들리곤 했죠. 그곳에선 면회시간에 여자 수감자가 남자 감옥으로 놀러가기도 하는데, 한 여자가 남자 감옥에서 살해당하기도 했습니다.”

한씨가 갇혀 지낸 온두라스 감옥.

한씨가 갇혀 지낸 온두라스 감옥.

한씨의 처지를 헤아리다 보니 뜻하지 않게도 온두라스 감옥의 풍경이 취재대상이 됐다.

-감옥에서 식사는 어떻게 해결합니까.

“온두라스는 형편이 좋지 않아 수감자들에게 음식을 안줍니다. 대신 땅은 넓으니까 좁은 공간에 가둬두지 않고 좀 트인 곳, 하늘이 보이는 곳에서 생활할 수 있게 해줍니다. 거기서 각자 식기를 마련해놓고 밥을 해먹으며 지냅니다. 모두 자기 돈으로 사야 합니다.”

한씨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억울한 감옥생활이 한국 언론에 보도되면서 인터넷에 카페가 만들어지는 등 네티즌이 성원을 보내면서부터다. 국회에서 정동영 의원(민주당)이 외교부를 집중 추궁했고, 이명박 대통령이 온두라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씨 사건을 언급했다. 정부는 경찰청,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에서 전문가 5명을 차출해 현지에 파견했고, 이들은 한씨의 무죄를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를 확보해 사건을 해피엔딩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한씨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한씨와 그 가족이 입은 정신적·물질적 피해는 어디에서도 보상받을 길이 없다. 한씨는 “변호사 비용, 아버지 체류 경비를 합쳐 1억원쯤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응원해주고 성금도 모아줬지만 정부에서 비용 지원을 받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한씨 사건을 계기로 추진돼 일명 ‘한지수법’이라 불리는 재외국민보호법이 제정되면 적절하게 반영돼야 할 부분이다. 그래도 한씨는 자신이 전례없는 수혜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현재 시스템에서 저는 정부 지원을 ‘최대한’ 받았다”며 “제가 받은 지원이 앞으로는 ‘최소한’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씩씩하고 당당한 대한의 처자는 이렇게 말도 잘한다.

◇ 한지수 사건이란
살인누명 쓰고 1년반 수감… 30년 구형 받았으나 무죄로 풀려나


한지수씨가 이국땅에서 1년반 동안 억류생활을 하게 된 것은 2008년 여름 온두라스 로아탄섬에서 있은 불의의 사건 때문이다. 다이빙 강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그해 6월 그곳에 간 한씨는 8월 초 당초의 룸메이트들이 과정을 마치고 자기 나라로 떠나자 생활비를 아끼려고 영국·호주 이중국적자인 댄 로스(당시 31세)가 사는 집에 방을 하나 세 내어 들어갔다. 로스의 방은 화장실을 사이에 두고 방문을 열면 마주볼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8월22일 한씨는 바에 가서 술을 마시다 로스가 네덜란드 여성 마리스카(당시 23세)와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 인사를 했다. 얼마 뒤 집에 돌아온 한씨는 로스와 마리스카가 로스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3시쯤 갑자기 우당탕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어 나가보자 로스가 방문 앞에 서 있고, 화장실에서 마리스카가 나오더니 마치 통나무가 쓰러지듯 앞으로 고꾸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한씨는 로스가 마리스카의 상처 부위를 얼음과 수건으로 눌러주는 것을 도와주었고, 마리스카에게 의식이 있음을 확인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다시 잠들었다. 아침 6시쯤 ‘지쑤’ ‘지쑤’ 하는 로스의 다급한 소리에 잠이 깨 로스의 방으로 가보니 마리스카가 벌거벗은 채 침대 위에 누워 변을 본 상태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씨는 급히 밖으로 나가 구급차를 불렀고, 로스와 함께 병원으로 옮기며 인공호흡을 시도했으나 마리스카는 곧 사망했다.

이후 로스는 경찰에 구속됐고 한씨는 참고인 진술을 했다. 마리스카의 사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한씨는 다이빙 친구들과 함께 로스를 면회하기도 했다. 로스는 영국에서 온 변호사 누나의 도움으로 풀려나더니 다음날 종적을 감췄다. 한씨는 로스가 압수된 영국 여권 외에 또 하나 갖고 있던 호주 여권을 이용해 온두라스를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이로부터 1년 뒤 한씨는 이집트 공항에서 체포돼 온두라스로 넘겨졌고, 온두라스 검찰은 한씨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해 30년형을 구형했다. 부검 보고서에 따르면 마리스카에게 목 졸린 흔적이 있고, 사인은 질식사라는 게 논거였다. 하지만 법원은 한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결백을 주장하는 피고인의 모든 진술이 명확하고 논리적이며 일관성이 있고, 부검 보고서는 1·2차 결과가 모순되는 등 신뢰할 수 없으며, 타살로 인정하기도 어렵다”는 이유였다.

◇한지수 약력

△1983년 서울 출생 △명덕외고 △서강대 경영학과 △CJ CGV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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