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결권 보장 토대 강화했지만…‘불법파업 낙인’은 그대로

2023.06.15 21:28 입력 2023.06.16 10:12 수정 김희진·이혜리 기자

대법, 파업이 기업 매출 감소로 직결되지 않을 가능성 주목
‘불법파견’ 현대차 중대 책임 인정에도 기존 판례 유지 한계

대법원이 15일 현대차 노동자들에 대한 사측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파기한 데는 노동자 개인에게 파업에 대한 책임을 무분별하게 따져묻던 기존 판례에 문제가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파업을 결정한 노동조합과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의 책임은 다르게 봐야 하고, 기업이 포괄적으로 주장하는 손해를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게 이번 판결의 골자이다.

기업들이 노동자 개인이 평생 일해도 벌 수 없는 막대한 액수를 ‘손배폭탄’으로 안기는 관행에 대법원이 일부 제동을 건 셈이다. 다만 원청을 상대로 한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은 불법파업이고 노동자 개인에게도 파업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기존 판례를 유지한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대법원은 2006년 파업의 ‘단순 참가자’에게는 손배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한 적이 있다. 노조가 다수결에 의해 쟁의행위 방침을 정한 이상 일반 조합원이 노조 지시를 거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급박한 쟁의행위 상황에서 일반 조합원에게 쟁의행위의 정당성 여부를 일일이 판단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의 단결권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이번에는 한발 더 나아가 명시적인 기준을 세웠다. 노조 지시와 무관하게 조합원별로 노조의 의사결정이나 실행행위에 관여한 정도가 크게 다를 수 있다고 짚었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개별 조합원의 손배 책임은 노조에서의 지위와 역할, 쟁의행위 참여 경위와 정도, 손해 발생에 대한 기여 정도, 현실적인 임금 수준과 손배 청구금액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기업이 청구한 손해액을 따질 때 파업 이후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고 처음 판단한 것도 눈에 띈다. 기존 판례는 파업 동안 지출된 고정비를 대부분 기업의 손해로 인정했다. 파업을 벌인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20억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본 원심의 경우 고정비를 포함한 현대차의 손해액을 374억원(1심)·271억원(2심)으로 계산했다.

반면 대법원은 파업에 따라 생산량이 일시적으로 줄었을지라도 자동차는 예약판매 방식으로 판매되고, 파업 후 생산량이 만회됐을 가능성을 고려하면 매출 감소로 직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를 토대로 배상액을 다시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법률원은 “노조가 쟁의행위를 하더라도 추가 생산으로 생산 손실을 만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여러 사건에서 적용 가능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대법원의 이날 판결은 한계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원청을 상대로 한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을 ‘정당성 없는 쟁의행위’로 보고 배상 책임을 지웠다는 점이다. 현대차 하청노동자들은 당시 ‘불법파견’ 문제를 해결하라며 파업을 시작했다. 파견법은 비정규직 남용을 막기 위해 2년 넘게 파견노동자를 사용한 경우 원청이 파견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도록 규정한다.

‘불법파견’이라는 현대차 측의 중대한 책임 사유가 있었음에도 원심은 “하청노동자는 직접 근로계약 관계에 있지 않아 단체교섭 주체가 아니며 이들의 쟁의행위는 불법”이라는 사측의 주장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파업을 벌인 노동자들 대다수는 나중에 불법파견을 인정받았다.

이날 파기환송된 사건들의 피고 중 한 명인 최병승씨는 2010년 7월 대법원에서 불법파견 판결을 처음으로 이끌어냈다. 최씨는 당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벌인 파업에 연대·지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손배 소송 대상이 됐다. 대법원은 최씨에 대해 “쟁의행위를 독려함으로써 방조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쟁의행위로 인한 불법행위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고 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가운데)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2010년 11월 울산 3공장 생산라인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이후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은 15일 “노동자별로 파업 참여 정도 등을 따져 손배 책임을 지워야 한다”고 판단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시민단체 손잡고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 배경에 불법파견이라는 기업의 불법행위가 있음에도 파업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한 손배 제도의 본질적인 문제는 고스란히 남았다”고 지적했다.

현대차가 파업을 문제 삼아 노동자를 상대로 낸 손배 소송은 총 15건, 청구금액은 207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노동계는 추산한다. 하청노동자들이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원청에 교섭을 요구하고, 원청이 꿈쩍도 않아 파업을 벌이면 노동자에게 손배 소송을 제기하는 상황은 최근에도 대우조선해양, 하이트진로 등 여러 사업장에서 반복됐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대기업인 현대차가 경제적으로 열악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상대로 거액의 손배 소송을 내는 것은 ‘권리남용’이라는 노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동안 손배 소송을 제기한 기업이 손해액을 크게 부풀려 법원이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도 기업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상고심에서도 현대차 사측이 노조 활동을 통제하고, 회사의 위법행위를 은폐하려는 목적으로 소송을 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현대차가 구하는 손해배상금이 크다는 사정만으로 사측이 오로지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손해를 가하려는 목적에서 소를 제기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원심 판단을 유지했다.

조경배 순천향대 법학과 교수는 “개별 조합원에 대한 기업의 무분별한 손배 청구에 제동을 걸었다는 의미는 있지만 쟁의행위가 원칙적으로 위법하고 정당성 요건을 갖춰야만 면책된다는 기본 논리는 바뀌지 않았다”고 했다. 조 교수는 “쟁의행위는 헌법상 기본권 행사이기 때문에 그 권리가 남용됐을 때 문제를 삼을 수는 있어도 원칙적으로 위법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며 “피해가 있으면 배상해야 한다는 재산권 논리에 익숙한 대법관들이 결국 노동권을 외면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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