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면허로 회사 차 몰다 사망했는데 법원 ‘산재’ 판단, 왜?

2024.04.29 09:51 입력 2024.04.29 11:27 수정 김혜리 기자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울행정법원. 경향신문 자료사진

회사 업무를 수행하던 중 차를 몰다가 사망한 경우 운전자가 무면허 상태였더라도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재판장 박정대)는 노동자 A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 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하지 않기로 한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지난달 7일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고 29일 밝혔다.

A씨는 경기 화성시에 있는 한 공사 현장에서 사토(건설공사 현장에서 외부로 실어나르는 흙) 처리 운반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2021년 사고 날 새벽 공사 현장에서 사토 하차지를 점검하러 차를 몰고 가던 중 배수지로 추락해 사망했다. 그는 1종 대형, 대형견인차, 2종 소형 운전면허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모두 취소돼 사고 당시엔 무면허 상태였다.

A씨의 유족은 그가 업무상 재해로 사망했다며 유족급여 및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지만 공단은 “무면허 상태에서 자동차를 운전해 도로교통법 등을 위반한 중대한 과실로 사고가 발생했다”며 거절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근로자의 범죄행위가 원인이 돼 발생한 사망은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않는다.

하지만 법원은 A씨의 사망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A씨가 1991년부터 운전면허를 발급받고 운전해온 점 등을 고려해 “운전면허 보유 여부와 상관없이 이 사건 차량을 운전할 수 있는 사실상의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며 “망인의 무면허 운전 행위가 이 사건 사고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또 “망인이 본래 업무를 수행하던 중 통상적인 운행 경로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며 “사고 발생 과정에 업무 외적인 동기나 의도가 개입돼 있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정도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다.

재판부는 사고가 발생한 길이 ‘위험한 길’이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재판부는 “사고 현장은 미개통된 도로로 가로등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며 “노면이 젖어 있어 매우 미끄러웠던 점, 다른 조명시설 등 안전시설물은 없었던 점 등에 비춰보면 과연 이 사건 사고가 온전히 A씨의 업무상 과실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사건 사고는 근로자가 안전에 관한 주의 의무를 조금이라도 게을리했을 경우 도로 여건이나 교통상황 등 주변 여건과 결합해 언제든지 현실화할 수 있는, 업무 자체에 내재한 전형적인 위험이 현실화한 것”이라며 “어느 모로 보나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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