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증언자(3)

잊히지 않는 소리 냄새…1명이 ‘기억’ 꺼내자 15명이 덧붙였다

2024.05.20 06:00 입력 2024.05.20 14:39 수정 김정화 기자

③ ‘국가 폭력 속 성폭력’을 규명한다는 것

공포감 압도돼 경험 ‘파편화’

촉감 등 ‘감각 기억’만 떠올라

사실·증거 비교해 신빙성 확인

16명 넘는 피해자 증언 중첩

패턴 발견에 ‘집단적 경험’ 규정

5·18 성폭력 피해자 간담회가 열린 지난달 28일 전남대학교 김남주홀에서 참가자가 진상규명조사보고서에 손을 올리고 있다. 정효진 기자

지난해 말 5·18 성폭력 사건 16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린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큰 성과는 과거사 성폭력 사건을 조사하는 방식의 새로운 기준점을 세웠다는 점이다. ‘약 반세기 전의 성폭력 사건을 어떻게 조사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조사위는 “성폭력 진상조사의 목적은 형사처벌을 전제로 한 범죄 발견이 아니다. 진상을 규명해 국가의 책임을 묻고, 피해자의 치유와 명예 회복 방안을 권고하는 데 있다”는 방향을 세웠다.

지난해 조사위는 피해 실태에 부합하는 실효적 권고를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으고, 과거사 성폭력 사건의 판단 기준을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현재 성폭력 수사 기준으로 따진다면 과거 사건 중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게 없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1990년대까지 집권하면서 각종 기록이나 자료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다.

‘과거사 성폭력’ 판단 기준부터…
“가해자 특정 아닌 피해자 치유 목적”

5·18 성폭력 피해자 간담회가 열린 지난달 28일 전남대학교 김남주홀에서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조사위는 피해자들에 대한 질문 방식부터 다르게 했다. 조사관들은 육하원칙에 따라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계급과 이름, 복장, 소지품 등을 묻는 구조적인 질문 방식으로는 피해자의 경험이 온전히 복원되지 못한다고 봤다. 5·18 당시 전남 목포 소재 야산에서 두차례 강간을 당한 피해자 A씨가 대표적 사례다. A씨는 2020년 1차 면담 조사에서는 “첫 번째는 ‘전경대 옷’을 한 사람에게 강간당했고, 두 번째는 윤간을 당했다”고 했다. 지난해 이뤄진 2차 조사에서는 “가해자의 복장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조사위가 진행한 비공개 공청회에서 ‘과거사 피해자의 트라우마와 피해 사실 증언 억제 요인을 고려한 진상조사’를 발표한 이완희 동국대 교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피해자의 기억을 손상시킬 수 있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 사람은 그 순간을 ‘스냅샷’처럼 기억하는데 이것조차 시간이 지나면 달라진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사람들은 사건의 핵심이 되는 맥락의 흐름을 기억한다. 그런데 사소한 것에 대한 기억은 익숙한 경험이나 미디어에서 봤던 영상에서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조사관이 43년 전 사건 가해자의 옷과 계급, 이름표, 장착한 무기 등을 봤는지 물으면 피해자는 ‘다른 건 몰라도 복장만큼은 기억해야 할 것 같은 압력’을 받게 된다. 이때 자신에게 익숙한 경험이나 영상 등에서 기억해 진술할 수 있다는 것이다.

A씨는 1차와 2차 조사에서 진술 내용이 달라진 것에 대해 “목포에 와서 처음 살았던 집이 산 중턱에 있었다. 그때 아래를 보면서 전경대를 봐서 그 옷을 알아본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윤경회 조사위 조사4과 3팀장은 “피해 장면과 기억이 파편화된 상황에서 피해자의 기억에만 의존해 피해 일시와 장소를 특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조사관이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면 피해자는 피해 경험과 다른 답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 A씨의 1차 조사 이후 ‘전경대 옷’과 그가 말한 ‘검문소’ 등에만 주목하다 보니 피해 장소를 잘못 추정하기도 했다. 조사위는 재조사 후 당시 목포 양을산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한 부대는 제31사단 93연대본부와 1대대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죽음의 공포에도 남아있던 ‘감각 기억’
“피해자만 할 수 있는 진술”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윤경회 팀장(오른쪽)과 이다감 상담전문가가 지난달 28일 전남대학교 김남주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5·18 성폭력은 피해자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안긴 트라우마 사건이고, 사건 후 40여년 만에 진상조사가 이뤄졌다는 특수성이 있다. 계엄군들은 군복 안에 개인 신분을 숨겼기에 특정하기 어려웠다. 피해자들이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본다 해도 식별할 수 없었다는 게 일반 성범죄와 다르다. 이들의 피해엔 폭력의 역사성, 억압의 중첩성, 피해의 복합성이 두루 녹아 있다. 과거 한국 사회에 지배적인 ‘여성의 정조’ 관념과 순결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부장적 통념은 피해자들이 성폭력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자책하게 했다.

이 때문에 조사위는 피해자 진술 중에서도 ‘핵심 장면’과 ‘감각 기억’이라는 부분에 집중했다.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 듣거나 했던 말, 피해 당시의 소리, 냄새, 촉감 같은 감각적인 기억을 끌어내 분석한 것이다. 광주 금남로의 뒷골목에서 강제추행을 당한 B씨는 “군인한테서 나던 땀 냄새와 담배 냄새, 거친 숨소리, 바지춤에서 자위행위를 하듯 움직이던 손동작 등이 또렷이 기억난다”고 했다.

그는 “얼굴을 쳐다보면 보복당할까 두려워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서인지 당시 상황이 흑백사진처럼 기억되고, 냄새만 또렷하다”고 했다. 조사위는 B씨의 진술에 대해 “위원회에서 조사한 피해 사실과 2018년 공동조사단에서 진술한 내용이 일치하고, 직접 피해를 당하지 않고서는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진술이 구체적”이라고 봤다.

피해자 중심적으로 접근하되 이들의 진술의 신빙성을 확인하는 작업도 거쳤다. ‘핵심 진술’을 분석한 뒤 여기에 부합하는 사실 자료와 정황 증거를 확인해 종합적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이는 과거사 사건에 대한 해외 진실위원회의 판단 기준을 참고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진상규명 판단 기준으로 ‘개연성의 균형’ 또는 ‘증거의 우위’를 제시한다. 윤 팀장은 “어떤 사실이 진실일 개연성이 그렇지 않을 개연성보다 클 때 증거로 채택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한 사안에 대해 여러 해석이 상충하면 위원회가 모든 정황 증거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가장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결정한다.

1차와 2차 조사에서 진술이 달라졌던 A씨 사례에서도 조사관들은 “군인들이 총 같은 걸 바닥에 내려놓을 때 나던 ‘탁’ 하던 소리”, “산 밑으로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나온 ‘무안 이정표’” 같은 핵심 진술에 주목했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목포 상황에 대한 민간 기록, 검문소장, 군인 등의 진술을 종합해 피해 위치를 재추정했다.

그러나 핵심 진술을 배척하는 사실 자료와 정황 증거가 찾아지면 배척했다. 이때도 40년 전 성폭력 사건임을 고려하여 피해자 진술을 배척하는 엄격한 기준을 세웠다. 피해자가 그 자리에 없었다고 입증하는 자료가 있거나 ‘핵심 진술’을 배척하는 작전기록이나 참고인 증언이 있다면 배척하는 것이다. 실제 ‘3번 피해자’는 조사를 받을 때마다 피해 진술의 핵심적인 부분을 번복했다. 결국 조사팀은 진상규명 ‘불능’ 의견으로 전원위에 사건을 올렸고 ‘불능’ 결정이 내려졌다.

“우리는 서로의 증언자”
피해 실태 유형화, ‘5·18 성폭력’ 패턴 밝혀내

5·18 성폭력 피해자 간담회가 열린 지난달 28일 전남대학교 김남주홀에서 참가자가 피해 소명서를 읽고 있다. 정효진 기자

이런 복합적인 조사를 통해 당시 피해자들이 겪은 일이 ‘집단적인 경험’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신상숙 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은 “성폭력 사건 피해자는 이 사건을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목격자이기도 하다”며 “증거가 없을 경우 고립되기 쉽지만 피해자들이 함께 목소리를 낼 때 전체의 피해 집합성을 드러낼 수 있다. 서로가 서로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고 말했다.

조사위는 진상규명 결정된 사건 16개의 피해 발생 상황을 ‘계엄군의 도심 시위 진압 작전(5월18~21일)’, ‘외곽 봉쇄 작전(21~26일)’, ‘광주 재진입 작전과 연행·구금·조사 과정(27일 이후)’ 등 크게 3가지로 구분하고, 세부 유형을 8가지로 나눴다. ①작전 구역 도착 직후 강제 탈의, ②주택가 골목에서 강제추행, ③연행자 호송 차량을 이용해 외곽으로 이동 후 강간, ④대검 자상이 동반된 강간과 강제추행, ⑤사전 정찰과 매복, 보호시설 경계 임무 중 야산으로 끌고 가 강간, ⑥가택 수색 중 강제추행, ⑦호송 차량 탑승 전후 재생산폭력과 강제추행, ⑧조사 후 구금시설 이동 중 여관에서 강간 등으로 상황이 구분된다.

피해 유형도 강간 및 강간미수, 강제추행, 성고문, 성적 모욕 및 학대, 재생산폭력 등 5가지로 구분했다. 재생산 폭력은 강간으로 인한 임신·유산, 구타·자상 등으로 인한 유산·자궁 적출 등 재생산 권리가 침해된 폭력을 말한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5·18 성폭력의 피해 유형을 강간·강제추행 등 형법, 성폭력처벌법상 성폭력 범죄로 좁혀서 볼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총과 수류탄을 이용한 위협하고 구타한 후 강간, 대검을 이용한 강제 탈의 및 신체 노출, 호송 차량을 이용한 납치 후 강간 등의 피해 사례를 보면 평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폭력이 중첩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사위는 이렇게 각 상황에 따른 유형을 구분해 ‘5·18 성폭력’이 발생한 패턴을 밝혀냈다. 계엄군이 5월18일 금남로 일대에 최초 투입된 시점부터 여성에 대한 강제 탈의가 이뤄졌다는 점, 도심에서 2~3명의 군인이 1명의 여성을 강간하거나 추행할 때 망을 봐주는 군인이 있었다는 점, 연행과 구금 과정에서는 압도적인 공포 속에서 피해를 입었으며, 수사실에서 성고문 뿐 아니라 구금시설에서도 수시로 성적 모욕과 기합이 있었다는 점 등이다.

특히 피해자들의 개별 진술이 다른 피해자들의 경험을 뒷받침하는 ‘증언 역할’을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각 피해자들은 대부분 피해에 대해 얘기한 적 없었고 서로의 존재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16명이 넘는 이들의 기억과 경험이 쌓이면서 집단적 피해 실태가 드러났다. 예컨대 군용트럭에 납치 후 강간당한 한 피해자의 경우 30대 여성 두명과 함께 납치됐다고 했고, 다른 장소에서 이와 유사한 장면을 목격한 제보자의 진술도 있다. 이를 종합하면 비슷한 피해자가 최소 3명 더 있다고 볼 수 있다. 윤 팀장은 “성폭력 사건 1건이 진상규명되면 다음 사건 보고서를 의안 상정할 때 앞선 사례를 넣어서 유사 피해가 있었다는 점을 보여줬다”며 “다수의 피해자가 함께 목소리를 내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증언자이자 참고인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에 확립된 기준은 5·18 성폭력의 피해자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조사위는 이번에 피해 의혹 사건 52건 중 19건을 조사하고, 16건에 대해서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조사하지 못한 33건의 피해는 피해자가 사망했거나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가족의 동의를 얻지 못한 경우다. 진상규명 결정된 피해자들 대다수가 일반 강간죄 성립 요건인 ‘항거 불능의 폭행·협박’이 상정하는 상황보다 압도적이고 실질적인 공포 속에서 성폭력을 당했다. 피해 직전 대검에 찔려 피가 치솟는 상황을 목격한 뒤 자신에게 보복할까봐 두려움에 떨었고, 옛 전남도청과 YWCA 건물 등에서 연행된 피해자들은 총상 입은 사람이 흘리는 피와 숨이 끊긴 시신들을 보면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공포감을 느꼈다.

모든 피해자가 사건 후 자살 충동을 느꼈고, 대다수가 1회 이상 자살 시도를 했다. 정신과 질환을 앓으며 지금까지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피해자도 있다. 알코올에 의존하는 중독 상태의 피해자와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피해자도 있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5·18 성폭력은 국내 병사들에 의해 벌어졌다는 의혹이기 때문에 일본군이나 미군 위안부에 비해 상당히 오랫동안 문제제기할 수 없었다”며 “일반적으로 형사 법정에서 제시해야 하는 기준과 잣대를 이번 사안에 들이대는 건 국가폭력이자 성폭력이라는 과거사의 특성을 무시한 맥락 없는 태도”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진상규명을 통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조사에 참여한 피해자들이 치유·회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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