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생명윤리와 인구논리에 매몰…‘임부 몸 존중권’ 논의는 소홀

2017.10.01 20:43 입력 2017.10.01 20:47 수정
오영진 | 인문학협동조합 총괄이사

낙태 합법화 논쟁

[금지를 금지하라](19)생명윤리와 인구논리에 매몰…‘임부 몸 존중권’ 논의는 소홀

1970년은 전 세계적으로 낙태와 관련한 강렬한 논쟁, 실제적인 법률입안 활동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시기로 기록된다. 미국에서는 수천명의 시위대가 뉴욕에 모여 낙태를 죄로 규정하는 법의 즉각 폐지를 요구했다. 이에 상원의원 로버트 팩우드는 낙태합법화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불완전한 불법 낙태에 의해 여성들이 희생되는 일을 막고자 안전하고 쉽게 낙태시술을 할 수 있는 약물과 외과요법도 의사들에 의해 속속 개발 중이었다. 호주 멜버른 인근 공해상에서는 산부인과 의사들이 법을 피해 낙태선박을 운용하기도 했다. 영국에서도 여성 권리신장의 한 요구로 자유로운 낙태허용 여론이 일었다. 가장 진보적인 나라는 덴마크였다. 덴마크는 17세 이상의 여성에게도 낙태를 조건 없이 허용하는 낙태자유화법을 3월에 제정했다.

반면 종교계의 반발은 거셌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주교들이 낙태영혼추도의날을 선포해 노골적인 낙태 반대입장을 드러냈다. 미국 내 가톨릭계 병원들은 낙태가 허용되면 이를 시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폐업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일본에서는 낙태 허용 여부와 상관없이 낙태가 100만건으로 집계돼 인구학자들이 노인의 나라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심지어 탄자니아는 낙태를 할 경우 사형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무렵 낙태합법화와 관련한 찬반여론을 수렴하는 공청회가 열렸다. 예외적인 낙태합법화 조항을 포함한 모자보건법이 1966년부터 번번이 생명윤리와 성도덕 문제를 우려한 종교계 여론에 의해 무산되자 아예 본격적으로 공개적 논의를 시작했다.

홍성걸 우석대 교수는 당시 통계상으로 서울에서만 한 해 6만건의 인공임신중절수술이 불법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현실과 법 사이가 모순된 현 상황을 포괄할 수 있는 법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경향신문, ‘공청회 후퇴한 모자보건법’, 1970·12·5). 한국은 형법상 낙태를 죄로 규정하고 있었다. 모자보건법은 유전학적 질환과 전염병·강간·근친상간·모체건강 등의 사유에 의한 인공임신중절수술 허용을 명시했다. 일부는 이를 실질적인 낙태허용법으로 이해했다.

모자보건법은 그만큼 뜨거운 감자였고, 1973년 2월 비상국무회의를 통과해 5월에 시행된다. 오늘날 열성적인 낙태반대론자는 모자보건법 14조를 일종의 ‘낙태 면허조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시민단체 회원들이 2016년 10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낙태는 여성이 선택할 권리’ 등의 구호를 적은 손팻말을 들고 형법상의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시민단체 회원들이 2016년 10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낙태는 여성이 선택할 권리’ 등의 구호를 적은 손팻말을 들고 형법상의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 모자보건법, 인구통치술에 불과

낙태 금지와 허용이라는 단순논리로 치자면, 한국은 모순된 두 개의 법조항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1953년 형법 제269조·230조의 낙태죄가 금지 논리를 형성하고, 이후 제정된 1973년 모자보건법 제14조의 인공임신중절 허용범위는 모자보건법이 형법에 예외를 만드는 방식으로 기능해왔다.

전효숙, 서효관의 연구(전효숙·서효관, ‘해방 이후 우리나라 낙태의 실태와 과제’, ‘의사학’ 23호, 2003)에 따르면, 1912년 조선은 일본 형법을 받아들이면서 자녀를 낙태한 경우에 대한 처벌규정이 생겼는데, 이는 임부보다 태아를 떨어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낙태에 중점을 뒀다고 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낙태가 죄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임부에 대한 상해행위로서 죄였다. 당시 일본 형법은 기독교 윤리관에 기초한 생명권과 모체보호라는 19세기 유럽 근대국가의 형법에 영향을 받았고, 이런 생명윤리는 인구증가가 곧 공익이라는 국가도덕과 결합해 낙태죄 규정을 형성한 것이다. 이는 해방 후 미 군정기를 거쳐 1953년 형법 제정 시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법제정 당시 전쟁 이후 원치 않는 출산이 부녀자들의 삶을 피폐하게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여성 고유의 재생산 권리와 원치 않는 조건에서 탄생한 아이들이 행복할 권리는 고귀한 생명권리와 인구통치논리 앞에서 전혀 고려할 것이 못 되었다.

한편 1962년 이래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가족계획이 곧 산아제한 계획이었다. 정부는 인구증가를 억제시킬 방안으로 임신초기 인공임신중절을 원하는 이들에게 월경조절술이라는 이름 아래 수술비용을 지원하기도 했다. 보건소에서 기혼 부녀자들이 낙태수술을 받으면 불임시술도 같이 해주는 혜택을 준 사례도 있었다. 1968년 가족계획어머니회 같은 민간단체들이 설립돼 주로 농촌지역에서 활동했고, 이후 인공임신중절 시술이 크게 성행했다. 형법으로서 낙태죄와 정부의 시책 사이에 괴리가 있었다.

1970년대 한국의 낙태를 둘러싼 찬반논란에서 특이한 점은 허용의 요구가 당시 기혼자들의 가족계획과 맞물려 강력하게 주장된 것이라는 점이다.

대개 자식의 수가 늘지 않길 바라거나 터울을 조정하기 위해 인공임신중절수술을 받는 경우였다. 가족계획은 국가에서도 장려하던 것이었으므로 실질적으로 낙태허용과 관련한 입장은 국가이데올로기와 궤를 함께했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 모자보건법의 제정 의도가 명시한 질병이나 강간 등의 예외적 허용 이유보다는 실은 인구통치라는 더 큰 목적에 관심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1973년에는 제한적 이유만을 명문화했기에 실제 상황에 맞는 가족계획, 경제적 이유 등을 합법적 인공임신중절 사유로 수차례 확장하려고 했다. 하지만 종교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보류해왔다.

1973년 미 연방대법원의 ‘로우 대 웨이드’ 판결은 미 수정헌법 제14조 적법절차조항에 의한 사생활의 헌법적 권리에 의거, 낙태 합법화의 길을 열었다. 해리 블랙먼 판사는 “원치 않는 어머니가 되지 않을 자유, 임신과 출산의 과정상 특별한 희생을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를 여성 스스로 가진다고 판결했다. 당시 선진국들이 생명윤리와 보수적 성도덕에 대립하는 여성인권과 성해방의 대결구도 속에서 낙태허용의 범위를 논쟁했다면, 한국은 생명윤리와 국가의 산아제한정책이 대립하는 국면이었다.

소외된 것은 여성이 자신의 몸을 돌보고 존중받을 권리였다. 1960년대 내내 불법낙태수술로 인한 숱한 사망사건이 보고돼 왔지만 정작 이런 문제가 낙태합법화의 동력이 되지는 못했다. 그 와중에 불법낙태로 얻은 사산태아의 장기를 서울대병원이 해외로 수출해 이익을 챙겨온 끔찍한 사건도 드러났다. 이들의 행위는 의학연구 기여의 명분과 수출장려라는 논리 속에서 무역거래법 시행령 48조에 의해 합법적으로 허가됐다(경향신문, ‘낙태아 콩팥 등 장기까지도 수출’, 1970·11·27).

천주교 신자들이 ‘낙태는 살인행위’ ‘태아도 인간’ 등의 구호를 적은 손팻말을 들고 낙태를 반대하는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1994년).  경향신문 자료사진

천주교 신자들이 ‘낙태는 살인행위’ ‘태아도 인간’ 등의 구호를 적은 손팻말을 들고 낙태를 반대하는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1994년). 경향신문 자료사진

■ 사문화된 낙태죄와 담론 없는 사회

세계적으로 낙태허용 사유는 크게 7개로 구분된다. 1.임부의 생명, 2.임부의 신체적 건강, 3.임부의 정신적 건강, 4.강간·근친상간, 5.태아 이상, 6.사회경제적 이유, 7.본인의 요청이 그것이다. 한국은 1에서 5까지만 허용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6까지 허용하는 경우는 28개국(82.4%), 7의 경우도 23개국(67.6%)이라 한다. 7가지 모두를 허용하는 국가는 총 23개국(67.6%)이다(김동식·김영택·이수연, ‘피임과 낙태 정책에 대한 쟁점과 과제: 여성의 재생산권과 건강권을 중심으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연구보고서 21, 2014).

2005년 고려대 의대가 775개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낙태 건수는 34만2433건에 달했다. 이 중 95.6%가 모자보건법의 예외규정을 어긴 불법수술인 것으로 파악됐다. 대부분 사회경제적 이유, 본인 요청으로 추정된다. 2017년 기준, 과거 5년 동안 불법낙태수술에 대한 행정처분 건수는 16건에 그쳤다(주간동아, ‘누구를 위한 낙태 처벌 강화인가’, 2017·2·28). 오늘날 한국에서 형법상의 낙태죄는 현실의 늘어나는 낙태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사문화된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서양에서 낙태 이슈는 사회를 분열시킬 수 있는 주제인데 정작 한국에서는 이 정도로 본격적으로 전개된 적은 없다. 아마도 낙태죄의 근거가 종교·윤리적 뿌리를 깊게 가지지 못한 채, 구한말의 가부장 이데올로기와 근대 이후의 국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끝없이 결합·분리돼 왔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낙태 찬반에 대한 시민사회의 합의나 논쟁의 장이 별로 열리지 못했고, 시책으로서 위에서 아래로 하달돼 작동한 문화적 풍토도 큰 몫을 한다.

그 와중에 생명권을 우선시하는 일명 ‘프로 라이프 의사회’의 활동과 여기에 대응하는 여성계의 대립이 있었다. 당시 프로 라이프 의사회가 법조항을 그대로 적용해 현재로서는 불법인 낙태시술 병원을 고발하면서 전국적으로 낙태시술이 일시적으로 경색된 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낙태수술을 원하나 받지 못한 미혼모가 생기고 반대급부로 중국 원정낙태가 늘기도 했다. 여성계는 프로 라이프 의사회를 비판했다. 여기에 정부까지 인구증가정책을 기조로 내세움으로써 행정자치부 주도로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작성하거나 불법낙태를 비도덕적 의료행위로 간주해 처벌할 수 있는 의료법 관계 시행령을 시도하는 등 노골적이지만 효력은 없는 출산장려정책을 구사, 의료계와 여성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한국은 낙태합법화를 둘러싼 논쟁이 이제 시작된 셈이다. 1970년대 종교 대 국가의 대결구도와 다른 점은 종교와 국가가 공모하고 이에 대해 여성의 권리가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싸움이 모종의 결과를 가지지 못한 채 공회전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낙태합법화를 둘러싼 생명권과 선택권의 대결구도는 미국의 논쟁 프레임을 가져왔지만 한국적 문맥에서 시작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권리의 가치 문제를 다루는 한 고귀한 생명의 권리는 여성의 선택의 권리보다 신성시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으며, 이는 합의가 되지 못하고 한쪽에 압도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 찬반토론이 아니라 해결을 위한 토의를

‘허용’과 ‘금지’라는 결론만 요구하는 끝없는 논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질문은 사라진다. 낙태는 허용과 금지의 프레임 속에서 사고할 수 없는 복합적인 문제이며 동시에 매우 현실적인 문제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낙태의 범위를 확실히 허용하되 되도록 생명윤리에 어긋나지 않게 가는 방향도 존재한다. 이는 무엇보다 개방된 성교육과 사회적 성의식 수준의 조정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또 수술 전 심리상담 등의 절차를 통해 임신부의 정신적 트라우마와 시술 자체에 신중을 기하는 방식으로 디자인할 수도 있다. 독일·프랑스 등은 상담을 의무화하고 있으며, 상담과 시술 사이 기간을 두어 낙태에 대해 신중히 결정하도록 지원한다.

반대로 종교적 윤리와 국가의 인구통치가 그토록 중요하다면 사회를 보다 아이 낳기 좋은 환경으로 바꾸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 대상이 가족이 아니라 미혼모일지라도 말이다. 여전히 낙태는 권장할 만한 수술이 아니며 여성의 신체에 가해질 수 있는 위험이 크다. 누구도 좋아서 하진 않는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까지 귀중하게 여겨지나 태어난 후에는 버려지는 ‘인구’로서의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여성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최근 페이스북 낙태법 금지운동 태그를 단 수많은 게시물에 귀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는 단지 낙태죄 금지에 대한 주장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내보이기 어려운 낙태 후의 고통과 소외의 경험이 고스란히 진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결할 문제일 뿐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이성애적 관계에서 기인한 문제이므로 남성도 동일한 방식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캠페인할 필요가 있다. 법률상 낙태수술에 본인과 배우자의 동의를 구하도록 되어 있는 것은 배우자의 권리를 주장하라는 게 아니라 똑같이 의무를 지도록 한 것이다.

낙태 합법화 논쟁은 찬성과 반대 식의 입장 토론이 돼서는 안된다.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생명윤리와 인간 삶의 행복권을 되도록 일치시킬 수 있는 사회를 모색해야 하는 발명의 영역에 있다. 그렇기에 40년도 더 된 법은 너무도 낡은 것처럼 보인다.

<경향신문·인문학협동조합 공동기획>

▶필자 오영진

[금지를 금지하라](19)생명윤리와 인구논리에 매몰…‘임부 몸 존중권’ 논의는 소홀


한국 기술문화와 서브컬처를 연구한다. 주요 평론으로 <컴퓨터게임과 유희자본주의> <인디의 추억> 등이 있고, 공저로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2014),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2017) 등이 있다. 인문학협동조합 총괄이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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