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위주의’로 추상화된 폭력…갑의 횡포를 희석하다

2017.10.15 21:46 입력 2017.10.16 00:02 수정
천정환 |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권위주의와 갑질

‘권위주의’나 ‘갑질’의 타파를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은 ‘을’과 ‘병’들이 연대함으로써 그것들을 생성해내는 근원적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사진은 2009년 이명박 정부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대학교수들의 기자회견 장면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권위주의’나 ‘갑질’의 타파를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은 ‘을’과 ‘병’들이 연대함으로써 그것들을 생성해내는 근원적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사진은 2009년 이명박 정부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대학교수들의 기자회견 장면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흥미롭게도 한국에서 권위주의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1987년 6월항쟁 직후다. 25년간 나라를 짓누르던 군부독재의 힘이 꺾이고 민주화가 시작될 때였다. 즉, 국가폭력과 권위주의가 판을 치던 시절의 한국인들은 권위주의라는 말 자체를 몰랐다. 경향신문을 기준으로 ‘권위주의’란 용어가 사용된 기사 수는 1985년 13건, 1986년 21건이었으나 1987년엔 65건, 1988년엔 230건으로 급증했다.

노태우 정부하에서 ‘권위주의 청산’은 시대정신처럼 되었다. 청와대·여당 같은 권력 핵심부는 물론 관료사회·대학 등에서도 권위주의 청산이 모토였다. ‘보통사람’이라는 반어적 구호를 내세워 당선된 노태우는 1987년 12월23일 대통령 당선 축하연을 열며 소주·빈대떡 같은 음식을 차리게 하고, 헤드테이블에 택시·버스 기사, 이·미용사 같은 진짜 보통사람들과 함께 앉기도 했다. 또 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 “모든 공직자들은 의식과 발상을 획기적으로 전환해 권위주의를 탈피하고 항상 국민에게 친절하고 성실한 공복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라고 말하자 각 시·도의 젊은 공무원들 사이엔 ‘관료 권위주의’ 청산을 위해 상사의 일방적 지시와 인격모독적 언행을 배격하자는 바람이 일기도 했다. 서울시도 권위주의 청산 바람에 발맞춰 시청 현관에 걸어오던 대통령 사진을 어린이들 사진으로 바꿨다(경향신문, 1988·2·27). 실질적으로 ‘각하’라는 말을 없앤 것도 노 대통령이었는데, 그는 “지금은 권위주의가 민주질서로 이행”되고 “정치사회가 질적으로 바뀌는 체제 전환기”라 규정하며 안보를 정치에 이용하는 일을 절대 안하겠다고 다짐했다(경향신문, 1988·5·9). 물론 이 훌륭한 다짐이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서울대 한상진 교수의 <한국사회와 관료적 권위주의>를 비롯해 1987~88년 사이에 학자들은 권위주의의 해체를 주제로 한 책을 내놓거나 심포지엄을 열었다. ‘권위주의의 청산=민주화’라 이해하는 이 ‘위로부터’의 분위기는 물론 미완의 혁명(6월항쟁)이 야기한 사회·문화적 효과임에 분명했다. 특히 이는 절차적 민주화나 생활세계의 민주화와 깊이 연관된 것이었다. 그러나 한계도 있었다.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는 스페인 출신의 정치학자 호안 린스가 프랑코 정권 같은 체제를 설명하기 위해 제창한 개념어였다고 한다. 형식적으론 민주적인 의회제도를 운영하지만, 실제로는 카리스마적 독재자나 일부 집단이 독재로써 의회나 국민을 무시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체제나 국가를 뜻한다. 그러나 얼핏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잘 들어맞는 듯하고, 이미 상식적 용어로 정착한 이 번역어는 지나치게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뉘앙스를 갖고 있는 것 아닌가? 권위주의만으로는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준)내전과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살해·납치·고문 등의 국가 범죄나 대통령 1인의 자의적인 통치가 잘 표현되지 못한다.

한국식 독재나 분단상황을 담기에 권위주의는 추상적이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은 권위주의를 훨씬 넘는 폭력적 통치성을 갖고 있었다. 권위주의라는 용어는 독재나 국가폭력의 부정적 뉘앙스를 누그러뜨리고 문제의 본원적 구조를 지적하기보다는 주로 행태와 의식을 환기한다. 그래서 시민·민중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근본 과제를 비껴 나갈지 모른다.

이런 문제를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과업이 수행돼야 했던 때에 비춰 생각해봐도 좋겠다. 이를테면 노무현 대통령의 대표적인 업적이 권위주의의 불식이라는 평가가 있다. 실제로 그는 소탈하고 서민적인 풍모로 권위주의를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 시절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그 같은 방식의 권위주의 불식이었을까? 부족했던 건 오히려 실질적 민주화를 더 깊고 넓게 추진할 아래로부터의 강한 힘이나, 광범위한 사회 양극화의 흐름에 맞서는 ‘권위 있는’ 방략이 아니었던가?

대기업·프랜차이즈 본사의 ‘갑질’에 노동자·가맹점주들이 시위를 하거나 피해사례를 고발하고 있다(왼쪽부터).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기업·프랜차이즈 본사의 ‘갑질’에 노동자·가맹점주들이 시위를 하거나 피해사례를 고발하고 있다(왼쪽부터). 경향신문 자료사진

■ 권위주의와 갑질

그런데 권위주의는 단지 정치체제를 설명하는 용어만은 아니다. ‘어떤 일을 권위에 맹목적으로 의지하여 해결하려고 하는 행동양식이나 사상’ 또는 ‘자신보다 상위의 권위에는 강압적으로 따르는 반면, 하위의 것에 대해서는 오만, 거만하게 행동하려는 심리적 태도’(21세기 정치학대사전)이기도 하니까. 이는 2014년부터 일상화된 신조어의 뜻과 그에 관련된 사회개혁의 문제를 곧바로 연상하게 한다. 바로 ‘갑질’이다. 권위주의와 갑질은 교집합이 많다. 갑질의 근절도 권위주의의 극복처럼 중요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개혁과 민주주의의 본연을 놓칠 수도 있다.

촛불항쟁은 ‘나라다운 나라’ ‘좋은 나라’를 위한 시민의 개혁 요구를 분출케 했다. 그 본령은 양극화의 극복(=경제민주화)과 정의의 회복(=적폐청산)에 있겠다. 연인원 2000만 시민 정치의 대오는 흩어졌지만, 시민들 각자 삶의 영역에서 생활세계·사회세계를 재-민주화해야 하는 과제는 여전히 산처럼 쌓여있다. 학교·마을·직장·가족에서 ‘차별 없는 민주주의’와 자치를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새로운 권력의 우상을 타파하는 일이 필요하며, 갑질에 대한 고발도 산발적으로 몇몇 ‘나쁜 개인’을 응징하는 데 그치는 수준을 넘어야 한다.

언론을 통해 담론화된 것을 기준으로 할 때, 2017년 10월 현재 ‘갑질’에 대한 의미화와 고발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차원이 있는 듯하다. 여기에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불평등과 개혁 과제의 본연을 건드리고 있는 것도 있지만, 반대로 갑과 을의 관계를 잘못 파악하거나 문제를 그저 어떤 개인의 차원에 한정하여 본질을 흐린 경우도 없지 않다.

1)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 또는 기업과 개별 사업자 사이의 불공정한 거래나 일방적인 위계를 갑질 문제로 의미화하고 제기한 경우다. 새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김상조 위원장의 공정거래위원회에 세인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프랜차이즈 업체와 가맹점 사이의 문제, 대기업의 하도급 불공정행위나 하도급 거래 위반행위의 근절이 경제민주화의 중요한 과제라 보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 9월 30년이나 묵은 낡은 공정거래법을 전면개정하고 싶다면서도 그 어려움을 토로했다. 또 현재 공정위의 노력이란 경제민주화라는 먼 길에서 우선 유통부문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정도라 솔직하게 말한 바 있다(머니투데이, 2017·9·28). 생산·분배가 아닌 유통부문의 개혁만으로 얼마나 실효성 있는 양극화 해소가 달성될지는 미지수다.

2)기업과 개인 또는 노와 사 사이에서 벌어지는 갑질의 문제다. 8만여 명의 회원을 가진 ‘갑질 빠개기’(www.gapbba.com) 사이트에서 ‘갑질’은 ‘임금체불, 해고, 열정페이, 사기’ 등이며, 그 고발 주체는 ‘대학생, 소상공인, 취준생, 직장인’으로 돼 있다. 기업에 고용된 개인들이 당하는 가장 큰 불이익과 억울한 일이 임금체불과 해고일 텐데, 노조나 공권력의 도움이 아니고서 이런 일을 개인이 감당하기란 어렵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직장인들 개인에 대한 기업의 갑질이 얼마나 개선 또는 근절되고 있는지? 고용 기회를 얻지 못하는 청년들이나 끝없이 감정노동을 강요당하는 서비스산업(및 자영업) 종사자가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은 기업 ‘갑질’이 쉬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87년 6월항쟁 직후와 같은 광범위한 노동조합운동의 조직화야말로 경제민주화와 민주주의의 근저적 동력이 될 텐데, 아직은 아쉽다.

3)일부 공공기관·권력기관의 기관장이나 공무원들의 잘못된 행태를 ‘갑질’이라 통칭하기도 한다. 이때 갑질은 직권남용, 성추행, 인격 모독 등의 여러 행태를 지칭한다. 그러나 군부독재와 권위주의 시대 수준의 갑질과 관료주의가 한국 공무원 문화의 주류라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권한이 있는 곳에 있는 권력남용의 가능성과 시민권·인권 보호를 위해 언제나 갑질에 대한 제도적 경계가 필요할 것이다. 특히 검찰·경찰·국정원·국방부 같은 사법·정보기관의 문제는 별도다. 그들이야말로 다른 공무원 조직과 비교할 수 없는 진짜 권위주의와 갑질을 생산하고 퍼뜨려왔다. 실로 뿌리를 도려내는 수준의 개혁과 인적청산이 필요할 것이다.

4)사회지도층, 부유층의 나쁜 개인들이 권리를 남용하거나 못된 성질로 피고용자나 힘없고 선량한 시민에 대한 괴롭힘을 ‘갑질’로 규정한다. ‘땅콩 회항’ 사건, ‘백화점 모녀 갑질’, 육군대장의 공관병에 대한 갑질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들은 혹독한 여론의 심판을 받기도 했지만 법은 이와 딴 문제다. 땅콩 회항 사건의 재벌은 항소심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고, 박찬주 대장은 ‘갑질 의혹’에 대해선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여기엔 두 가지가 문제가 있을 것이다. ‘가진 자’와 ‘높은 분’들의 권한남용 등을 제재하기에 ‘갑질’이 법리적으로는 모호하거나, 법(관)이 이들의 편이거나.

갑질 문제를 희화화하거나 갑질 개념의 인플레를 악용하는 사례들도 있다. 더불어민주당 서영교 의원은 최근 예비군법을 개정한다며 ‘현역병에 대한 예비군의 갑질을 근절한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기업에 대한 필요한 관의 규제를 ‘갑질’로 호도해 ‘영업의 자유’를 보장받겠다는 반개혁의 논리도 없지 않다. 공정위에 대한 일부 언론과 기업의 반발도 그러하다.

검찰이 권위주의를 청산하겠다며 벌인 ‘친절 드리미’운동(2004년). 경향신문 자료사진

검찰이 권위주의를 청산하겠다며 벌인 ‘친절 드리미’운동(2004년). 경향신문 자료사진

■ 이명박·박근혜 정권 신권위주의 지향

이명박·박근혜 정권하에서 한국식 권위주의가 부활 또는 갱신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두 정권의 행태는 같은 면도 있지만 차이도 있다. 이명박은 겉으로 실용주의와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했으나 여론조작과 사기술을 통해 권위주의를 부활하게 했다. 국정원·기무사 등이 정치에 개입해 음습하고 불투명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야말로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시절에 만들어진 한국식 권위주의의 핵심 아닌가? 박근혜 정권(또는 박근혜·최순실)은 주로 김기춘·황교안 같은 공안 ‘공작가’(工作家)나 국가보안법 ‘교도들’을 고용해 아버지로부터 배운 70년대 스타일의 통치술로 복고풍 권위주의를 되살리는 데 힘을 다했다. 스스로 ‘여왕’이고자 했다. 두 정권의 공통점은 종북몰이와 안보를 정치에 이용하고, 권위주의의 리뉴얼에 나섰다는 것이다. 또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를 더 공고히 해 골목 상인들은 물론 시민들의 소비와 경제적 삶의 모든 국면을 지배하게 했다. 경제권력을 통해 불평등, 위계의 문화가 온 사회에 드리우도록 한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새로 만든 권위의 우상은 자본권력이다. 이는 능력주의, 성과주의 같은 부가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력히 뒷받침된다. “돈 있는 것도 능력”이며 “억울하면 네 부모를 탓하라”는 정유라의 엄한(?) 가르침은 사실 세상물정을 꿰뚫은 것이었다. ‘일베’의 철없는 아이들이 재벌 회장의 이름 앞에다 ‘갓(god)’ 따위의 접두사를 붙이는 일이든지,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동건홍…’ 같은 언어나 학생들의 ‘과잠 문화’ 따위는 얼마나 신판 능력주의·위계의식이 극심한지를 보여준다.

이제 우리 아이와 후손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성과주의나 능력주의가 아니다. 지상에 현존하는 모든 부와 유복(裕福)에 전쟁·투기·특혜·노략질·사기 같은 험악하고 반인간적 기원이나 과정이 필연적으로 끼어 있다는 사실, 부와 ‘가진 능력’을 성찰하고 나누려 하는 정신이어야 한다. 일상생활과 비공적 영역에서의 한국식 권위주의를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가부장제와 이에 근거한 차별적 이데올로기, ‘장유유서’나 ‘부부유별’ 같은 철 지난 전근대적 규범이 변형된 채로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먹히고 있다는 점을 짚어내야 한다. 나이와 기수, 학번 따위에 따라 사람을 줄 세우는 연령·연공주의도 마찬가지다.

‘갑’이 있는 자리 자체를 구조개혁하거나 민주화하지 않고, ‘갑’ 비슷한 개인을 혼내거나 ‘질’만 욕하면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잠재적인 갑과 ‘슈퍼갑’들이 바라는 것이다. 권위주의의 생성 구조를 타파하고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만드는 가장 확실한 길은 ‘을’과 ‘병’들의 자치와 단결이다. 이는 적폐청산과 경제민주화를 이루는 길이기도 하다.

▶필자 천정환

[금지를 금지하라](21)‘권위주의’로 추상화된 폭력…갑의 횡포를 희석하다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다. 한국 근대 독서사를 연구한 <근대의 책 읽기-독자의 탄생과 한국 근대문학>을 비롯해 <자살론>, <대중지성의 시대>, <1970 박정희 모더니즘>(공저),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공저),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 등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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