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다큐
2020.02.28 14:14 입력 2020.02.28 14:15 수정 부산|권도현 기자

하교를 한 부산 연제초등학교 학생들이 연제문구사에서 아이스크림 등 간식을 사고 있다. 1982년 ‘88운동구’로 시작한 연제문구사는 39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학생들을 맞고 있다.

하교를 한 부산 연제초등학교 학생들이 연제문구사에서 아이스크림 등 간식을 사고 있다. 1982년 ‘88운동구’로 시작한 연제문구사는 39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학생들을 맞고 있다.

“그땐 글러브가 3000원 했는데 애들이 글러브나 공 같은 거 많이 사갔제.”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롯데 자이언츠를 보며 야구 선수를 꿈꾸던 부산 연제초등학교 학생들은 학교 앞 ‘88운동구’를 찾곤했다. 부산 연산동에서 ‘연제문구사’를 운영하는 박옥련씨(67)는 의상실을 하다 운동구로 업종을 바꾼 첫해를 그렇게 기억한다. 운동용품이 가득했던 가게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을 위한 문구와 완구들이 들어왔다. 태풍에 간판이 떨어지면서 ‘88운동구’는 지금의 ‘연제문구사’로 바뀌었다. 당시에는 학교 인근에 문구점만 7개였는데 38년이 지난 지금은 단 두 개만 남았다.

연제문구사를 찾은 아이들이 스티커를 구경하고 있다.

연제문구사를 찾은 아이들이 스티커를 구경하고 있다.

연제문구사를 찾은 두 아이가 체온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진실반지’를 우정반지로 맞췄다. 연제문구사 사장 박옥련씨가 진실반지를 아이의 손에 끼워주고 있다.

연제문구사를 찾은 두 아이가 체온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진실반지’를 우정반지로 맞췄다. 연제문구사 사장 박옥련씨가 진실반지를 아이의 손에 끼워주고 있다.

“할머니 실뜨기 있어요?” “다 떨어졌네. 내일 갖다 노오께.” 하교가 시작되자 박씨는 문구점 밖으로 나가서 아이들을 맞았다. “니 4학년이제? 4학년이 이리 계산을 못해 우짜노.” 그는 계산이 느린 아이를 기다리며 동시에 다른 손님들을 맞았다. 연제문구사를 찾은 두 아이는 체온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진실반지’를 우정반지로 맞췄다. 박씨는 진실반지를 산 아이들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예쁘네”라는 칭찬을 잊지 않았다. “느그 졸업식 내일 모레 맞제?” 그는 6년 단골들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연제문구사에 입구 옆 진열대에 오래 전 아이들의 외상 내역이 적혀있다.

연제문구사에 입구 옆 진열대에 오래 전 아이들의 외상 내역이 적혀있다.

연제문구사에 있는 2019년에 제작된 색종이(왼쪽)와 2003년에 제작된 100원짜리 색종이.

연제문구사에 있는 2019년에 제작된 색종이(왼쪽)와 2003년에 제작된 100원짜리 색종이.

문구점을 시작하면서 만든 진열대에 지금은 사라진 거래처의 삐삐번호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다.

문구점을 시작하면서 만든 진열대에 지금은 사라진 거래처의 삐삐번호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다.

박씨가 어린 손님들을 맞고 있는 동안 17살 된 반려견 ‘다옹이’가 문구점 안을 지켰다. 가끔 오는 졸업생들은 다옹이의 안부를 먼저 묻는다. 오래된 문구점 곳곳에는 세월의 흔적들이 묻어 있다. 언제 적은 놓은지도 모르는 학생들의 외상 목록, 밑이 깨져 테이프를 붙인 볼펜꽂이, 20년 된 색종이까지. 가게를 시작할 때 직접 짠 나무진열장에는 ‘015’로 시작하는 지금은 사라진 거래처 삐삐번호가 붙어있다.

한바탕 아이들이 지나간 뒤 박씨는 TV스포츠채널을 켜고 미국 프로레슬링을 보기 시작했다. “이 일도 애들이 뭐 좋아하는지 부지런히 알아야제. 옛날에 오락기 있을 때 ‘스맥다운(레슬링 게임)’이 있어서 애들이 재밌어하길래 보게 됐지.” 그는 홍콩배우 장국영부터 아이돌 그룹 ‘BTS’까지 연예인들의 이름도 줄줄 외웠다.

박씨가 도매점에 가기 전 아이들과 들여놓기로 약속한 물품이 적힌 종이를 보고 있다.

박씨가 도매점에 가기 전 아이들과 들여놓기로 약속한 물품이 적힌 종이를 보고 있다.

도매점을 방문한 박씨가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다.

도매점을 방문한 박씨가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다.

해 질 무렵 박씨는 가게 앞에 진열한 물건들을 들여놓고 도보로 10분 남짓한 거리의 도매점으로 향했다. 그가 손에 든 쪽지에는 ‘실뜨기’ 등 아이들에게 갖다놓겠다고 약속한 물건들이 적혀있었다. “인자는 물건을 딱 보면 애들이 좋아할 만한 게 다 보이제.” 박씨는 ‘나를 발견할 100가지 질문’이 적힌 노트 2권을 샀다. 누가 사갈까 싶었던 노트는 그의 말대로 다음날 바로 ‘완판’되었다.

문방구를 찾은 한 아이가 전날 박씨가 도매점에서 사온 ‘나를 발견할 100가지 질문’ 노트를 구매하고 있다.

문방구를 찾은 한 아이가 전날 박씨가 도매점에서 사온 ‘나를 발견할 100가지 질문’ 노트를 구매하고 있다.

문방구 앞 진열대에 ‘아폴로’를 비롯한 간식거리들이 놓여있다.

문방구 앞 진열대에 ‘아폴로’를 비롯한 간식거리들이 놓여있다.

“내 언제까지 할 지는 모르겠는데 이 일도 애들과의 신뢰가 중요하제. 그래서 어데 여행가거나 문 닫게 되믄 애들한테 꼭 알려주고 간데이...”

2년 전 이사한 서울 큰아들 집에도 아직 못 가봤다는 박씨는 어린 고객들과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학교 앞 문방구를 지키고 있다.

아이들이 한바탕 다녀간 후 박씨가 문방구 마스코트인 반려견 다옹이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이들이 한바탕 다녀간 후 박씨가 문방구 마스코트인 반려견 다옹이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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