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셔스는 큰 덩어리들의 경계에 간신히 끼어있는 듯했다. 대체로 활짝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말이 없을 때 그의 눈은 살얼음판 위에서 그나마 단단한 곳을 찾는 사람처럼 흔들렸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우리보다 조금 까만 피부를 지녔을 뿐인 그는 8년 전 엄마와 함께 한국에 왔다.
그의 엄마는 여성의 성기 일부를 잘라내는 ‘여성 할례’를 피해 열세 살 때 고향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탈출했고, 기니를 거쳐 가나의 난민촌으로 대피했다. 고향 사람들은 딸을 피난시켰다는 이유로 엄마의 아버지를 죽였다.
엄마는 가나 난민촌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해 그레이셔스를 낳았다. 영양상태가 좋지 못했던 엄마에게선 고름에 가까운 색의 모유가 나왔다. 먹일게 없었던 엄마는 그거라도 먹였다. 그 후유증 탓인지 그레이셔스의 눈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열살 무렵엔 옆에 앉은 사람이 그의 눈에서 나오는 고름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즈음 난민촌에서도 ‘여성 할례’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무슬림이던 아빠와 이혼 상태였던 기독교인 엄마는 비자 없이 갈수 있는 나라 ‘한국’에 대해 듣고 모든 살림을 팔고 돈을 빌려 비행기를 탔다.
그렇게 엄마와 그레이셔스는 얇은 반팔 옷과 작은 가방만 든 채 2012년 겨울 눈이 내리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하고 있을 때 버스정류장에 있던 한 아저씨가 “동두천으로 가면 외국인이 많으니 거기로 한번 가보라”고 했다. 둘은 무작정 동두천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려 추위를 피해 들어갈만한 곳을 찾고 있을 때 기적처럼 어디선가 라이베리아 말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그들에게 다가가 도움을 요청했고 흔쾌히 도움을 준 그들 덕에 모녀는 동두천에 살게 됐다. 그때 도움을 준 엄마의 고향 사람들을 그레이셔스는 아직도 삼촌이라 부르며 만난다.
하지만 한국의 삶은 쉽지 않았다. NGO 단체의 도움을 받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긴 법정 싸움 끝에 2017년 12월 5일 대법원으로부터 난민으로 인정한다는 판결을 받았지만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여전히 난민 인정을 하지 않고 있다.
그 사이 가족이 늘었다. 엄마는 나이지리아 남자와 결혼했다. 그레이셔스에겐 여섯 살 남동생과 한 살 여동생이 있다. 취재를 도와준 한 사진가는 기자에게 “몇몇 난민들은 ‘혹시 아이가 많으면 국적 취득, 최소한 한국 내 체류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아이를 더 낳는다”고 말해줬다. 이들이 한국에 머물 수 있는 근거는 매년 갱신해야 하는 ‘인도적 체류 G1 비자’ 뿐이다. 갱신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G1비자로 직업을 구하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먹고살아야 하기에 일용직 건설 현장에서 일하거나 식당에서 하루하루 일을 하며 돈을 번다. 그 일자리마저 코로나19로 사라졌다.
초등학교 4학년 2학기부터 한국 학교를 다닌 그레이셔스는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이다. 학교를 다닌 지 한 학기 만에 한국어를 읽고 쓰게 됐다고 한다. 가나 난민촌 시절 그를 가르친 건 불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는 토고 사람이었다. 때문에 불어도 할 줄 안다. 가족 간에는 영어를 쓰기에 영어에도 능통하고 고등학교 내내 영어 시사 토론반 활동도 했다. 올해 대입 수시전형으로 성공회대학교에 합격도 했다. 여느 고3이라면 즐거워야 할 상황인데, 그레이셔스는 고민이 깊다.
그의 집은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0만원이다. 그마저 간혹 밀리기도 하는데 착한 집주인을 만난 덕에 양해를 구하고 다음 달에 내기도 한다. 부모님들이 한국말을 거의 못하다시피해서 이런 대화는 주로 그레이셔스가 한다. 이 집을 구하기 위해 인터넷 검색과 발품을 팔았던 것도 그레이셔스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 등록금 마련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곱창집, 삼겹살집, 전단지 아르바이트 등 많은 일을 했지만 생활비로 사용해 등록금 같은 큰 돈을 모아놓지는 못했다. 만약 그레이셔스가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성인이 되면 비자를 받을 근거도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남은 것은 국외 추방뿐이다.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인 이 사람에게 이렇게나 많은 사연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나왔고 혼자 힘으로 언어의 경계를 뚫었다.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소녀 가장처럼 집을 이끌었다. 그동안 어느 것 하나 놓친 것이 없다. 그 시간을 지나 본인의 꿈인 통역사가 되기 위해 노력해서 대학에 합격했으나 돈이 없다. 또한 늘 언제 비자가 끝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살고 있다. 그레이셔스에게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안정되게 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레이셔스를 만나고 서울로 오면서 양주와 의정부, 포천과 동두천의 사이 어디쯤을 지났다. 문득 길 이름을 걸어둔 표지판이 보였다. 길 이름은 ‘화합로’였다. 대충 어디쯤의 경계에 붙이기 좋은 이름이다. 하루하루를 경계에 살고 있는 그레이셔스에게 ‘한국인’이라는 표지판 하나 걸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