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

‘박찬욱 감독의 버디 라이터.’

20년 차 시나리오작가 정서경의 이름 앞엔 늘 이런 수식어가 달렸다. 거장 감독과의 파트너십이 오래되다 보니 충무로에서는 꽤 이름난 작가로 살아왔다. 하지만 ‘정서경’이라는 이름 세 글자는 올해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당도했다. 마침내, 그 어떤 수식어도 없이.

플랫팀이 선정한 2022년 올해의 여성은 정서경 작가다. 디자인 박채움 기자.  tvN제공 이미지 크게 보기

마침내 우리에게 당도한 정서경

플랫팀이 선정한 2022년 올해의 여성은 정서경 작가다. 디자인 박채움 기자. tvN제공

일차적인 해석은 이렇다. 정서경은 박 감독과의 5번째 협업작 <헤어질 결심>부터 두 번째 드라마 작업인 tvN <작은아씨들>까지 올해 집필한 영화와 드라마를 모두 ‘화제작’ 반열에 올렸다. 하지만 이 해석만으로는 어딘지 부족하다. <아가씨>를 비롯해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받은 작품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의 이름은 파트너인 박찬욱 감독의 언급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전해졌을 뿐이다.

수많은 ‘헤친놈’을 양산했던 <헤어질 결심> 이후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서야 정서경이라는 사람을 발견했다는 듯 언론의 단독 인터뷰 제안이 쇄도했다. 우리는 왜 지금 정서경의 이름을 주목하는 것일까. 정서경은 꾸준히 제 길을 닦고 있었는데, 시대가 그녀의 존재를 이제서야 발견한 건 아니었을까. 확실한 것은 그의 말과 글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 정확히 가닿고 있다는 점이다. 플랫팀이 2022년 올해의 여성으로 정서경 작가를 선정한 이유다.

플랫팀이 선정한 2022년 올해의 여성은 정서경 작가다. tvN제공 이미지 크게 보기

플랫팀이 선정한 2022년 올해의 여성은 정서경 작가다. tvN제공

박찬욱 감독의 ‘버디 라이터’

정서경의 커리어는 시작부터 ‘박찬욱’과 함께였다. 2002년 코닥 워크숍 장학금 심사를 맡았던 박찬욱 감독은 지원자였던 정서경의 재능을 발견하고 공동 작업을 제안한다. 정서경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시나리오과 3학년에 다닐 때다. 당시 박 감독은 <올드보이>에서 “여성(미도)만이 진실에서 배제된 것 같다는 찜찜함”을 느끼고, 여성이 주인공으로 한 복수극 <친절한 금자씨>를 구상하고 있었다.

처음 공동 작업을 제안할 때만 해도 “여성 주인공 영화를 혼자 쓰긴 벅찰 테니, 여성 작가와 함께 일하면 좋겠다” 정도의 마음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은 예상보다 깊고 오래 이어졌다. 박 감독 스스로 “내 영화 경력 전체는 정서경과의 만남 전후로 나뉜다”(친절한 금자씨 각본집)고 회고했을 정도다. 컴퓨터 본체를 공유하며 모니터와 키보드는 각자 하나씩 갖고, 한 사람이 자판을 두드리면 상대 모니터에도 글자가 뜨는 작업 방식은 둘의 신뢰 관계가 얼마나 끈끈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찬욱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 서문에서 “내 영화 경력 전체는 정서경과의 만남 전후로 나뉜다”고 말했다. 사진은 방구석1열 유튜브 캡처 이미지 크게 보기

정서경의 파트너, 박찬욱

박찬욱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 서문에서 “내 영화 경력 전체는 정서경과의 만남 전후로 나뉜다”고 말했다. 사진은 방구석1열 유튜브 캡처

하나의 뇌를 공유하는 두 개의 몸. 박찬욱과 정서경이라는 ‘콤비’는 그렇게 한국 영화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여성 캐릭터들을 창조해냈다.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신, <박쥐>의 태주, <아가씨>의 히데코와 숙희, 그리고 헤어질 결심의 <송서래>까지. 욕망의 대상이 되기보다, 나 자신으로 살기로 한 여성들은 스크린을 무대로 마음껏 모험하고 훌쩍 성장했다. 남성 캐릭터들이 극을 이끄는 한국 영화 관객들에게, 이러한 여성 캐릭터들은 등장 자체로 파격이었다.

결함이 있는 인간을 사랑하다

정서경의 작품에는 유독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이를 두고 페미니즘의 부상 같은 시대적 배경과 연관짓는 해석이 많지만, 정 작가의 답은 20년째 똑같다. 여성인 내가 공감할 수 있고, 가장 잘 쓸 수 있는 게 여자 캐릭터이기 때문이라는 것. “영화 작업을 하면서 가장 극복하기 힘든 게 성별의 문제였어요. 제 직업은 작가지만 킬러다, 회사원이다, 이런 건 극복하기 쉽거든요. 그런데 남자라고 생각하기가 정말 어렵더라고요.”(채널예스 2017) ‘단순하고 솔직한 것이 아름답다’는 그의 지론을 닮은 답변이다.

하지만 이 단순하고 솔직한 답변 속에, 그동안 여성 관객들이 느껴온 갈증의 본질이 있다. 충무로의 블록버스터급 영화는 대부분이 남성 감독이나 작가가 쓴 시나리오였다. 제1, 2, 3, 4역할의 남성 캐릭터에 이어 뒤늦게 등장한 여성 캐릭터는 남성 주인공의 각성에 도움이 되는 도구적 캐릭터거나, 남성 감독의 시선에서도 좋아할 만한 이상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강하고, 선하며, 올바른 여성들. 물론 정서경이 만들어낸 여성 캐릭터들도 고유의 목표와 뱡향을 가지고 나아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름답지도 선량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 자신과 닮았고,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을 그리는 탓이다. “정서경 작가가 ‘아니, 여자라서 다 옳은 거 아니잖아요”라고 했다면, 저는 ‘페미니스트가 이런 장면을 싫어하지 않을까?’ 하고 의식했다”(GQ 2016)는 박 감독의 전언도 정서경의 소신을 뒷받침한다.

정 작가는 캐릭터를 구상할 때 이들의 결함을 먼저 생각한다. 결함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사진은 헤어질결심 스틸컷. CJ ENM 제공 이미지 크게 보기

정 작가는 캐릭터를 구상할 때 이들의 결함을 먼저 생각한다. 결함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사진은 헤어질결심 스틸컷. CJ ENM 제공

실제로 정 작가는 캐릭터를 구상할 때 이들의 ‘결함’을 먼저 생각한다고 한다. 인주는 돈을 좋아하고, 숙희는 어리숙했으며, 서래는 헤어지지 못한다. 사람들이 좋아할 수 없는 면모를 극의 초반에 보여주는 탓에, 호흡이 긴 드라마에서는 캐릭터의 선택을 두고 ‘비호감’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정 작가의 지론은 확고하다. 결함이 있는 자들만이 고난을 경험하고, 고난을 경험한 자들에게만 변화와 성장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는 “자기 안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분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녀들도 나도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느낌을 받는다”(보그 2018)고 말한다.

정서경은 자신이 만들어낸 여성 캐릭터들과 함께 ‘여성 서사’의 지평을 깨뜨리고 또 넓히는 중이다. 드라마 데뷔작이었던 tvN <마더>가 가정 폭력에 내몰린 어린 소녀와 이를 구하는 어른 여성의 연대를 다뤘다면, 두 번째 드라마 작품인 <작은 아씨들>은 주인공 세 자매는 물론 최종 빌런, 그 빌런에 함께 맞선 조력자까지 모두 여성이다. 폭력을 당한 여성 뿐 아니라 폭력을 즐기는 여성, 무모한 여성과 사악한 여성, 이기적인 여성과 든든한 여성이 얽히고 설키며 에너지를 뿜어낸다. “여성적인 것 안에 여러 모습이 있다”는 정서경의 말처럼, 그가 보여줄 여성 캐릭터는 이 땅에 존재하는 여자들의 수 만큼이나 무궁무진하다.

정서경은 두번째 드라마인 tvN<작은아씨들>을 통해 덤프트럭처럼 밀면서 지나가는 여자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tvN제공 이미지 크게 보기

여성적인 것의 여러 모습

정서경은 두번째 드라마인 tvN<작은아씨들>을 통해 덤프트럭처럼 밀면서 지나가는 여자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tvN제공

정서경을 둘러싼 변화들

박찬욱 감독과는 폭력과 살인이 난무한 작품을 주로 썼지만, 사실 정서경 본인의 취향은 순수문학 쪽에 가깝다고 한다. 그는 ‘작가 정서경’을 키운 어린 시절 책으로 <빨간머리 앤> <작은아씨들> <이성과 감성>을 꼽는다.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핀의 모험>, <15소년 표류기>같은 소년 모험담 역시 소년들의 마음에 이입하며 즐겁게 읽었다. 하지만 모험 주인공이 늘 남성뿐이었던 점은 아쉬웠다. <태백산맥>같은 한국 소설은 ‘못’ 읽었다. 책장을 열자마자 나오는 강간 장면 때문이다. “안좋은 문학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가 왜 일부러 시간을 들여서 그런 상처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코스모폴리탄 2022)

‘연쇄살인범 시나리오’보다는 ‘지브리’를 좋아한다는 그는 여성혐오적인 옛 동화를 여성이 주체가 되는 이야기로 재해석하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해갔다. 사실 이는 개인 정서경의 ‘취향’과 직업인 ‘정서경’의 커리어가 타협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충무로에선 오랜 기간 장르물이 남성적 장르를 대변했고 <친절한 금자씨>로 데뷔한 후엔 서로를 죽고 죽이는 시나리오만 들어왔다. 내가 충무로에서 살아남으려면 장르물에 전문성을 가질 수 밖에 없구나 생각했다.”(씨네21) 드라마로 활동 반경을 넓힌 것 역시 ‘임신한 여성’이 충무로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두 아이 엄마’는 지금도 그는 매일 같은 시간 기계처럼 글을 쓰고, 이러한 방식을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한다.

정서경은 영화 <아가씨>를 좋아하는 젊은 관객들을 보며 ‘대화의 대상으로서의’ 관객들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사진은 아가씨 스틸컷. 이미지 크게 보기

정서경은 영화 <아가씨>를 좋아하는 젊은 관객들을 보며 ‘대화의 대상으로서의’ 관객들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사진은 아가씨 스틸컷.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영화계지만, 그래도 그는 변화를 실감한다. 영화를 보면서 시나리오의 대사 하나하나를 동시 재생하는 것은 “아주 오랫동안 혼자만 하는 놀이”였지만, 그 놀이를 젊은 여성 관객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놀라고 기뻤다. (아가씨 각본집 서문) 여성 관객이 늘자 여성 관객을 의식한 작품이 늘었고, 무엇보다 함께 일하는 여성들이 늘었다. 최근작인 <작은 아씨들>은 감독(김희원)과 작가(정서경), 미술감독(류성희)과 CP(조문주)까지 주요 스태프가 모두 여성이고, 배우까지 합하면 여성 비율만 70%가 넘는다. <작은 아씨들>이 여성 서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 덴 정서경을 둘러싼 제작 환경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40대 남성 관객’만의 얼굴을 상상해온 미디어·콘텐츠 업계에서, 정서경은 20년째 여성 이야기를 써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달라진 시대가 그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가장 일을 잘하는 사람이 헤드로 올라가는 자본주의 사회가 20년 뒤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때, 김희원 감독 같은 여성의 리더십이 변화를 만들 것 같다.”(씨네21) 이미 변화한 세상의 시작점에 서 있음을 느낀다는 그는, 앞으로 다가올 변화와 갈등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중이다. 그 변화에 중심에 서 있을, 정서경의 다음 10년을 기대한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플랫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밀려드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놓치기 쉬운 젠더 관련 기사들을 매주 금요일 오전 7시 이메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플랫을 만드는 기자들의 소회와 고민, 구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도 눌러 담았습니다. (▶구독링크 바로가기: https://bit.ly/3wwLnKJ)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