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제발 우릴 풀어달라고 해주시오”(하멜), “날개가 있다면 몰라도 조선국법으로는 안됩니다”(박연).

1653년(효종 4년) 10월29일 제주 관아에서 진풍경이 연출됐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네덜란드인들의 상봉 드라마가 펼쳐졌다. 두 달 전인 8월16일 풍랑을 만나 겨우 살아남은 헨드릭 하멜 일행(36명)이 1627년 조선땅에 정착한 박연(얀 야너스 벨테브레이)을 만난 것이었다. 윤행의 <석재고>는 조선 귀화 26년 만에 고국사람들을 본 박연은 “옷깃이 다 젖을 때까지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그러나 박연은 이미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가 아니었다. 하멜은 “벨테브레이가 모국어를 잊어버린 탓에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하멜 표류기>·사진)며 당황해했다. 사실 벨테브레이 역시 동료 2명과 함께 식수를 구하러 제주도에 상륙했다가 붙잡힌 조난자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화포와 조총 제작에 능한 벨테브레이를 ‘강제로’ 귀화시켜 훈련도감에 소속시켰다. 본국에서 ‘고려인들은 인육을 구워 먹는다’는 별별 소리를 다 들었던 벨테브레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박연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는 조선여자와 결혼, 1남1녀를 두었다. 1648년에는 무과에 응시해서 급제했고 홍이포와 조총의 제작에도 앞장섰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하멜이 박연을 만났을 때

하지만 하멜의 길은 달랐다. 화포와 조총 기술자들이 많았던 하멜 일행은 박연 휘하의 부대에 배속됐다. ‘서양인들은 큰 코를 귀 뒤로 돌리고 음료수를 마신다’는 등의 괴물대접에 괴로워했다. 급기야 일행 중 2명이 마침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사신의 길목을 막고 송환을 호소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조선으로서는 큰일이었다. 이들을 통해 조선이 북벌을 꾀하며 무기개발에 나선다는 사실이 밝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 사신을 뇌물로 무마시킨 조정은 하멜 일행을 전라도로 유배시킨다. 하멜 일행은 결국 1666년(현종 4년) 9월4일 조선을 탈출한다. 조선 표착 13년28일 만이었다. 하멜이 조선에서의 생활과 풍습을 전한 <하멜 표류기>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어느 날 홀연히 조선땅을 밟은 두 네덜란드인의 발걸음은 이렇게 상반됐지만 조선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다.

최근 하멜의 고향(호린험)에 하멜 기념관이 섰고, 하멜의 유배지인 전남 강진군에는 네덜란드식 돌담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조선인’ 박연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그의 후손은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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