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

입법예고된 낙태죄 개정안은 들여다볼수록 놀랍다. 각국의 입법 사례에서 가져올 수 있는 모든 제한을 다 끌어왔다. 외국에도 드문 사례인 ‘배우자 동의’, 하나만 빠졌다. 임신 기간 구분, 사유 제한 이외에도 독소 조항은 곳곳에 숨어 있다. 그중 네 가지만 이야기해본다.

1.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는 조항은 ‘형법 개정안 270조의2 3항’이다. 임신을 중단하려는 여성에게 법이 제공하라는 정보는 ‘임신을 지속해서 출산·양육하는 것’과 관련된 사항이다. 어떻게든 출산하도록 설득하는 것을 우선하는 태도이다. 더 당황스러운 문구는, 여성이 정보를 제공받고 ‘숙고 끝에 결정’했어야 한다는 요건이다. 이 요건을 입증하려면 (‘숙려’기간인) 24시간 동안 굶었다거나. 잠을 못 잤다는 증거라도 제출해야 하나?

2016년10월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참여한 한 여성이 ‘임신중절, 살인이 아닌 선택입니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서성일 기자

2016년10월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참여한 한 여성이 ‘임신중절, 살인이 아닌 선택입니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서성일 기자

‘숙고(熟考)’하라니. 절도죄는 ‘타인의 재물을 절취하지 말라’고 하고 협박죄는 ‘사람을 협박하지 말라’고 한다. 이 조문은 감히 수범자들에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생각을 해라, 심사숙고도 안 하고 결정했다면 범죄’라는 것. 형사법조문에서 듣도 보도 못한 ‘생각하라’는 명령은 오로지 상대가 임신한 여성, 임신을 중단하려는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가.

논의 도중에 나온 의견의 한 토막도 아니고, 법 해석 방향의 설명문도 아니고, 형법 조항으로 제안된 법문이다. 입법예고까지 했으니 현 정부가 임신중단하려는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며 대우하는지를 보여주는 명문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향후 이 문장을 분석한 연구 논문이 여성학, 기초법, 형법 등 각 분야에서 여러 편 나오기를 기대한다.

임신중단에 앞서 ‘생각하라’는 명령···낙태죄 개정안의 독소 조항들[플랫]

2. 모자보건법 개정안의 의사의 설명의무는 임신한 여성에게 의료법(24조의2)에 따른 설명과 더불어 임신중단 후 피임 시기와 방법, 합병증, 계획임신 등을 설명한 뒤 서면동의를 받도록 한다. 설명을 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도 부과하겠다고 한다. 임신중단을 위해 병원에 찾아간 사람은 피임과 계획임신에 대한 설명부터 들어야 하는 것이다.

피임에 대한 설명을 인공임신중절을 한 뒤 사후관리 차원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임신중단의 요건으로 삼았다. 이는 이 조문 자체가 ‘계획적이지 않은 임신’에 대한 비난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피임을 했지만 임신했다면? 상대방이 피임을 거부했거나, 피임기구를 사용했다고 거짓말했다면? 설령 피임을 하지 않았더라도 임신중단이라는 상황 앞에 선 사람을 이 같은 비루함에 노출시키고 훈계 대상으로 삼아야만 하는가. 입법자에게 임신중단이 얼마나 철저하게 ‘남의 일’인지를 보여주는 문구다.

3. 모자보건법에는 의사의 거부권 조항도 신설하겠다고 한다. 이 조항의 가장 큰 문제는 임신중단에 ‘거부해도 되는 일’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다. 의료법에는 정당한 사유 없는 진료 거부 금지 조항이 있는데, 임신중단만 예외로 삼겠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의사의 거부권을 두더라도, 거부 시 인공임신중절이 가능한 의료인에게 연계할 의무를 같이 규정한다. ‘실질적’ 연계 의무라고 한다. 자신은 인공임신중절을 하지 않지만 자신을 찾아온 사람의 건강은 보호할 수 있게 하는 것, 나로 인해 절차가 지연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의사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 법안은 의사가 거부할 경우 긴급전화나 상담기관으로 안내하라고 명시했다. 임신중단을 하겠다고 병원에 간 사람을 다시 상담소로 보내는 것이다.

임신중단에 앞서 ‘생각하라’는 명령···낙태죄 개정안의 독소 조항들[플랫]

병원에 가기 전에 상담을 이미 받았고 강제 대기 기간 24시간도 경과한 상태였더라도 의사는 인공임신중절을 거부하고 상담기관으로 연계할 수 있다. 그렇게 또 ‘숙고’할 기회를 준다. 책을 필사본으로 돌려보는 시대도 아니고 세계 최고 수준의 통신망과 스마트폰 보급률에 빛나는(그래서 디지털 성폭력도 선도적인) 이 나라에서 겹겹이 둘러친 정보 제공이라는 벽은, 임신한 여성에 대한 불신의 두께만큼이나 두텁다.

4. 미성년자 조항(모자보건법 개정안 14조의2)은 명백한 개악이다. 미성년자는 임신 14주 이내이든 이후이든 법정대리인 동의를 받도록 해두었다. 현행법에서 인공임신중절 동의 요건으로는 배우자 동의만 있고, 친권자나 후견인의 동의는 본인이 ‘심신장애로 의사표시를 할 수 없는 경우’에만 요구된다. 임신한 사람의 나이에 따른 구분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당연히 ‘미성년자’ = ‘심신장애로 의사표시를 할 수 없는 자’도 아니다. 미성년자 법정대리인 동의 조항은 지금은 없는 요건의 신설이다.

일반적 의료행위에서 미성년자는 나이에 따라 구분되지 않으며, 각 개인이 스스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직접 결정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임신중단에 부모 개입이 요구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부모의 개입이 요청된다면, 그것은 통제가 아니라 당사자의 건강 보장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2016년10월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서성일 기자

2016년10월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서성일 기자

미성년자의 임신중단을 논의할 때 흔히 발생하는 혼돈이 ‘어떻게 부모도 모르게 낙태하게 놔두냐’는 것이다. 그러나 ‘처벌’을 ‘건강 보장’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조항이 언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지에 주목해야 한다. 법정대리인 동의권의 위력은 미성년자는 임신중단을 원하지만 부모는 이를 거부할 때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다. 이 조항은 부모가 낳으라고 하면 미성년자는 원치 않아도 임신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청소년 보호인가? 부모 몰래 임신중단을 한 청소년은 ‘처벌’ 받아야 마땅한가?

그나마 법안은 16세 미만 미성년자가 법정대리인에게 학대 받는 상황에 있을 경우 법정대리인 동의 대신 상담사실확인서로 대체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학대를 입증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법안은 아주 상세하게, 아동학대처벌법상의 응급조치, (긴급)임시조치, 보호처분 등 결정서나 공적 자료와 같은 입증 방법을 구체화 해두었다. 아동학대로 신고한 뒤 처분이 있어야만 임신중단을 할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학대를 당했지만 신고하지 못했을 경우, 임신중단을 하려면 먼저 부모 신고부터 하라는 말이라는 것을, 입법자는 아는 것일까. 심지어 상담기관장은 상담사실확인서를 작성할 때 필요하면 아동복지심사위원회의 자문을 들을 수 있다. 시간은 흘러가고, 원치 않는 임신이라는 재앙 속의 16세 미만 청소년이 이 과정을 거치려면 얼마나 힘들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는 임신을 유지할지 종결할지의 결정이, 모든 상황에 대한 종합적이고 ‘전인적인 결정’이라고 보았다. 정부의 역할은 각자가 자신의 삶에 대한 종합적이고 전인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지원하고 조력하는 것이지, 훈계하고 통제하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