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전태일

열일곱 살 때 나는 공장노동자였다. 낮에는 구두공장에서 일했고, 저녁에는 야학에서 공부했다. 공장일 마치고 옆구리에 책을 끼고 야학에 갔다. 시력과 무관하게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것도 그쯤이었던 것 같다. 딴엔 ‘공돌이’가 아니라 대학생으로 봐주길 바랐던 것이다. 겉으로는 그랬지만, 속으로는 노동자의 정체성을 키우고 있었다. 가방에는 늘 야학 교사(고려대학교 ‘자진근로반’)가 건네준 문건,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담겨 있었다. <전태일 평전>이 나오기 전에 ‘전태일 평전’을 읽은 셈이다.

최준영‘책고집’ 대표

최준영‘책고집’ 대표

문건에서 책으로 변신한 <전태일 평전>(이하 ‘평전’)을 처음 만난 건 대학에 들어간 뒤였다. 저자가 조영래 변호사라는 것도 그때야 알게 되었다. 이후 ‘평전’ 읽기를 반복했다. 삶이 팍팍하다거나 의지가 꺾일 때, 외롭고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습관처럼 책장에서 ‘평전’을 뽑아 들었다. 여러 번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웠고, 늘 속이 울렁거렸다.

올해 나온 50주기 기념 개정판은 사지 않았다. 책을 사고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제 ‘평전’을 그만 읽을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책만 읽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고, 변하지 않는 현실에서 전태일만 우려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회의가 깊어진 건 ‘희망버스’ 출진 즈음이었다. <소금꽃나무>(김진숙 저, 후마니타스 간)에 나오는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2003년에 죽은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라는 대목에서 생각이 멈춰섰고, 고뇌가 깊어졌다. 책보다 잔인한 건 현실이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과 2003년에 죽은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2016년 구의역에서 죽은 김모군과 2018년 죽은 비정규노동자 김용균, 2020년 죽은 택배노동자들의 소망이 같은 나라. 어처구니없는 끝말잇기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주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전국적으로 다채로운 추모행사가 열렸다. 정부는 열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고, 방송은 앞다퉈 기념 프로그램을 송출했다. 일군의 사람들은 열사의 고향 대구를 방문해 추모의 열기를 이어갔다. 문화예술계의 추모 바람은 진행형이다. 열사의 뜻을 기리는 뮤지컬과 애니메이션 등이 기획단계이거나 제작 중이란다. 반세기 만에 비로소 전태일 열사를 ‘제대로’ 추모하는 느낌이다. 만시지탄이지만 반가웠고 감동적이었다. 아연 뭉클하기도.

그런데 정작 열사가 외쳤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구호에 대한 답은 없다. 뒤늦게나마 산업재해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거대 여당의 무관심과 외면으로 인해 소수 정당의 입법활동은 난관에 부딪혔다. 50년 전에 죽은 열사는 추모하면서, 불과 며칠 전에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생을 마감한 항공사 승무원의 죽음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던 열사의 외침에는 이렇게나 크게 답을 하면서, 정작 다음달에 내야 할 월세와 전기료를 남겨둔 채 아무 말도 없이 생을 마감한 가난한 모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는다.

전태일의 의미를 모르지 않는다. 그 정신을 통해 노동의 가치와 의미를 환기하고 나아가 노동의 조건과 환경을 바꾸자는 것인 줄 안다. 반대할 이유도, 깎아내릴 까닭도 없다. 다만, 언제부턴가 전태일과 현실의 노동이 따로따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전태일은 전태일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인식이 만연한 것 같다. 전태일이라는 면죄부를 통해 현실의 부조리와 부당함, 불평등을 덮어버리려는 음험한 세력이 준동하고 있는 것 같다.

<역사란 무엇인가> 출간 40주년을 맞아 <굿바이 E. H. 카>(데이비드 캐너다인 저)가 나왔다. 카의 해체가 곧 그의 진보적 역사관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취지에서다. 이제 전태일 앞에서 멈춰선 발걸음을 계속 이어갈 방법을 고민할 때다. 새로운 발걸음이 시작될 것이다. 굿바이,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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