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탈진실의 시대 우상의 몰락

2022.02.09 16:58 입력 2022.02.09 16:59 수정
차태서 |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신문 8일자 이진경 교수의 칼럼 ‘모든 판사는 야해요’에 대한 반론 기고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정치적 양극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각자가 팟캐스트, 유튜브, 각종 SNS 등으로 이루어진 반향실 안에 들어가 진영 논리에 따른 ‘대안적 사실’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에 동참하며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정치의 장을 형성한다. 냉소적인 묘사이지만, 그저 포퓰리즘 시대의 현실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경향신문이 2월 8일자 지면에 사법부를 비판하기 위한 예시로 “개나 소나 남발하는 표창장 위조에 징역 4년을 때리고”라고 운운한 이진경의 칼럼 <모든 판사는 야해요>를 그대로 실은 것은 도를 넘은 일이다. 신문이 스스로 <정경심 징역 4년 확정, 분열의 시간 끝내고 ‘공정’ 새길 때> 제하의 사설에서 밝힌 것처럼 지난달 27일 대법원이 인정한 원심은 “업무방해, 자본시장법·금융실명법 위반, 증거인멸·증거은닉 교사” 등 10여 개의 혐의를 유죄로 판결한 것이다. 특히 개나 소나 준다는 표창장은 정 전 교수 딸의 의전원 입시에 쓰인 소위 “7대 스펙” 중의 하나일 뿐이며, 잘 알려졌다시피 이들은 모두 허위로 밝혀졌다.

[기고] 탈진실의 시대 우상의 몰락

이런 ‘팩트’를 반복적으로 알리는 것이 거의 무의미해진 포스트-트루스의 세상이라지만 레거시 미디어인 경향이 이렇게 쉽게 진실을 포기해서는 곤란하다. 확증편향의 산실로 전락한 듯한 뉴 미디어와 달리 게이트 키핑이라는 보루를 지닌 전통적 언론은 달라야 한다. 이는 마치 공론장의 균형을 취한다면서 안티 백서의 논설을 전재해주는 것과 동일한 처사였다. 아무리 외부 필진의 글이었다지만 팩트체킹 후 해당 부분을 들어냈어야 마땅하다. 특히 “그깟 표창장 하나”라는 레토릭이 특정 정치진영 프로파간다의 중심을 형성하며, 남한사회를 갈가리 찢어놓은 가짜 뉴스의 상징과도 같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다른 한편 이진경 교수의 칼럼이 한층 더 괴로운 것은 그의 글이 단지 일개인의 말이 아니라 한세대 지식계의 경향성을 보여주는 증례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조국 사태 이후 수년간 우리가 목도한 것은 여러 ‘진보’ 지식인들이 대거 ‘어용’ 지식인으로 귀의하는 양상이었다. 증거은닉이 증거보전으로, 학회지 논문이 에세이로,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호소인으로 둔갑하는 지록위마의 시대에 학계, 언론계, 정계 등에 포진한 이들은 진리의 감시자가 아닌 가짜 뉴스의 진원지로 전락하였다.

기실 필자와 같이 이들을 ‘선생님’으로 알고 공부해온 밀레니얼 세대 학자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사태전개는 아찔하고 허탈한 경험이었다. 우리에게 푸코와 들뢰즈, 부르디외 등을 소개해준 선생들께 기대한 것은 조국 사태로 모습을 드러낸 현대 남한사회의 계급재생산, 문화자본축적 같은 현상에 대한 통찰력과 성찰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나 쉽게 정치적 부족주의의 논리에 편승하며 ‘검새’와 ‘기레기’만 때려잡으면 촛불‘혁명’이 완수될 것처럼 선전하였다. 여전히 혁명에 복무하지만 사회구성체에 대한 분석은 내팽개쳐져 버렸다. 1980년대의 혁명을 위해서는 국가독점자본주의와 종속에 대한 치열한 분석이 필요했지만, 2020년대의 혁명을 위해서는 적폐세력의 악마화라는 앙상한 레토릭만으로도 혁명이 완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이러한 상황은 개개인의 변절이나 추락을 넘어 앞으로 한국의 지식계에서 ‘원로’가 사라진다는 점에서 큰 경각심을 갖게 한다. 현재와 같은 포퓰리즘의 국면은 어쨌든 여러 상처를 남기며 지나가고 말 테지만, 그 빈자리에 누가 남아 지식인의 말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을까? 어차피 학문의 발전을 위해 우상은 파괴해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정작 그 우상들이 스스로 침몰하는 모습을 수년간 바라보는 일은 너무나도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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