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비자발적 중도
‘가운데’로 떠밀린 비수도권 2030 목소리
“딱히 정치인들 탓하고 싶지 않아
누구든 내게 불이익도 이익도 아냐
목소리 낼 기회, 필요도 없어 보여”
서울 청년 대비 낮은 ‘정치 효능감’
“중도? ‘중도 포기’밖에 생각나지 않네요. 시작하고 끝을 안 맺는 느낌인데요?”
충북 제천시 봉양읍에서 지난해 12월 만난 유희성씨(36)가 ‘중도’라는 단어에 떠올린 인상이다. 2010년 군 전역 후 제천 베어링 생산공장에서 15년째 일하고 있는 유씨에게 정치란 멀기만 한 존재다.
“뉴스를 보더라도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딴 데로 돌려요. 술값이나 담뱃값 올린다 이런 소식은 와닿지만 정치 이야기는 사실 ‘누가 구속됐다더라’ ‘누구랑 누가 싸운다더라’ 이런 자극적인 걸로만 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유씨는 앞선 세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각각 정동영·박근혜·문재인 후보를 찍었지만 지난 대선엔 투표하지 않았다. 유씨는 “이재명은 나 같은 공장 노동자 출신이긴 하지만 그냥 ‘윤석열 반대파’ 정도로만 느껴졌을 뿐”이라면서 “선거 공약은커녕 당 이름도 워낙 자주 바뀌니까 당명도 잘 모르겠고, 누굴 딱히 뽑아야겠단 생각이 안 들었다”고 말했다. 지역구 정치인들도 유씨 눈엔 선거철에 잠깐 독거노인을 찾아가거나 김장하는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들로만 비쳤을 뿐이다. 유씨는 스스로를 중도라고 규정해본 적은 없지만 자신이 관망하는 사람, 즉 방관자라고 여긴다.
“중도가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다가 입장이나 한번씩 밝히는 것이라면 내가 중도겠네요. 그냥 이쪽저쪽 편도 안 들고 관망하면서 입장만 한번씩 밝히는 사람들 있잖아요.”
정치가 누가 얼마만큼 가져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이라면 정당은 사회적 지위가 비슷한 집단, 지향하는 가치와 신념이 같은 집단이 그들의 의사를 정치의 장에서 관철시키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어떤 정당이나 정치인이 내건 깃발이 자신의 신념이나 이익과 가깝다고 여기면 지지하고, 멀어졌다고 생각하면 지지를 철회한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이나 가치를 대변해줄 것 같은 정당이나 정치인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까. 기존 정당을 향해 나의 이익과 선호를 포함시키라고 요구하거나, 같은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직접 새로운 정당 건설에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특정 집단의 이익과 선호가 정치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들이 가진 정치적 힘이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인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집단이 정치 현실에선 더 적게 호명되고 대표되는 이유이다.
자신을 대변하는 정당을 찾지 못한 사람들
자신을 대변할 정치인이나 정당을 찾지 못한 이들은 정치적 관심이나 선호를 갖기를 포기하기 십상이다. 포기를 강요당한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은 이렇게 방관자가 되어버리고 중도로 내몰린 이들 가운데 비수도권 20~30대 청년에 주목했다. 한국 사회에서 ‘청년 담론’이 회자된 지 오래됐고, 정치권에서 이들을 부르는 목소리도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청년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여전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제천에 사는 유씨는 아이들이 자랄수록 자신이 계속 관망만 해도 될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일찍 결혼해 삼남매를 둔 그는 요즘 아이들의 교육이 가장 큰 고민거리다. “보세요. 여긴 마땅한 학원도 없고, 학습지 선생님을 부르려고 해도 여기까지 오려나?” 유씨가 식당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밭 너머로 유씨가 사는 ‘행복주택’이란 이름의 아파트가 보였다. 유씨는 “아이들이 큰물에서 놀면 중간이라도 가지 않을까 싶어서” 근처에 있는 좀 더 큰 도시로 이사갈 궁리도 해봤지만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유씨는 팍팍한 현실에 한숨을 쉬면서도 “그렇다고 딱히 정치인들 탓을 하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그는 “누가 나온들 나에게 불이익도 아니고 이익도 아닌 것 같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목소리 낼 기회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 보인다”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는들 바뀔 게 무엇이 있겠나”라고 했다.
유씨처럼 서울 이외 지역에 거주하는 2030세대는 서울 거주 청년에 비해 유독 정치에 대한 효능감이 낮았다. 서울 이외 거주 2030세대의 63%가 ‘나 같은 사람들은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 어떤 영향도 주기 어렵다’고 답했다. 서울 거주 2030세대에선 48%만이 같은 답을 했다.
낮은 정치 효능감은 정치 문제에 대한 무관심, 나아가 선거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서울 2030세대는 79%가 ‘평소 정치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는데, 서울 이외 지역 2030세대는 이보다 11%포인트 낮았다. 오는 4월 치러질 제22대 총선에 ‘관심이 있다’고 답한 2030세대 비율도 서울(80%)에 비해 비서울 지역(68%)이 눈에 띄게 낮았다.
“그들이 말하는 청년이 우리인지는 글쎄…”
산단·공단 대중교통 문제는 숙원
지역 구분 없이 “출퇴근 버스 부족”
“택시비 월 100만원 가까이 내기도”
생활 현안과 정책 간 괴리감 느껴
“2호차 창전동 가고 있습니다, 3장 받으세요.”
경기 이천의 한 공단에 직장이 있는 노란씨(33)는 눈비가 오는 궂은 날이면 쉽게 잡히지 않는 택시를 포기하고 ‘렌트’를 호출해 퇴근길에 오른다. 노씨가 탄 차 안에서는 ‘2호차를 창전동으로 배차했고, 승객에게 3000원을 받으면 된다’는 내용을 담은 무전음이 암구호처럼 들려왔다.
노씨는 “이 동네는 특히나 이런 날씨엔 택시는 안 온다고 보면 되고, 버스를 타려 해도 1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일명 ‘콜뛰기’라고 불리기도 하는 렌트는 자가용이나 렌터카를 이용한 불법 택시영업이지만, 이천 일대 공단에선 서민의 발과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노씨는 “우스갯소리로 이천시장도 타고 다닌다는 말도 나온다”고 했다.
대중교통이 잘 닿지 않는 산업단지나 공단으로 매일 출퇴근해야 하는 청년들에게 교통 문제는 가장 시급한 현안이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지만 누구도 제대로 해결해주지 않은 숙원 사업이기도 하다.
경기 안산에서 화성에 있는 직장으로 출퇴근하는 정진우씨(22)는 청년 유권자들의 가장 기초적인 필요조차 파악하지 않고 헛다리만 짚는 정치권에 대한 회의감이 크다고 했다. 안산 중앙역 근처에서 기자와 만난 정씨는 “이곳은 출퇴근길 버스도 몇 안 다녀서 서울처럼 ‘러시아워’를 겪을 일조차 없다”면서 “시내버스를 타면 항상 버스 기사를 구한다는 공고문이 붙어 있던데 말마따나 버스 기사를 새로 좀 구하든지 해서 차를 늘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씨와 함께 만난 한규진씨(21)는 시흥에 있는 시화공단에서 일한다. 한씨는 “아침 출근길에 버스를 한 대 놓치기라도 하면 지각이라 택시를 자주 탔는데 택시비로 월에 100만원 가까이 쓴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선거만 다가오면 기약 없이 지하철 노선 연장을 하겠다, 지역화폐를 얼마씩 나눠주겠다 하는데 정작 무엇이 중요한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정부와 지자체에서 내놓는 청년 정책이 실제 청년들이 필요로 하는 것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한씨는 청년들을 위한 내집 마련 정책에도 불만이 많았다. 그는 “내집 마련을 위해 청년우대형 청약통장에 들려고 했는데 연봉 기준을 너무 낮게 잡아놓아서 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입 대상에서 배제됐다”고 말했다.
정부가 청년들의 주거 마련을 지원하기 위해 2018년 출시한 청년우대 청약저축은 19세 이상 34세 이하 청년을 가입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상품은 일반 주택청약종합저축 이자율보다 높은 우대금리를 제공한다. 정부는 2022년부터 가입자 소득 기준을 종전 3000만원에서 3600만원으로 확대했지만 여전히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고용노동부 임금직무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20~24세의 평균 연봉은 2994만원 수준이었지만, 25~29세는 3678만원, 30~34세는 4458만원이었다.
정씨는 자신이 뽑은 후보가 가장 시급한 지역 현안부터 챙길 때 비로소 정치에 대한 효용감을 느낀다고 했다. 정씨는 “‘도로를 깔겠다’ ‘지하철을 놓겠다’ 이런 거창한 것보다는 사소하더라도 우리 눈높이에 맞는 섬세한 정책이 나왔을 때 ‘우릴 많이 조사하고 생각해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블루밍 세탁소’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블루밍 세탁소는 지난해 7월 안산에 문을 연 노동자 작업복 전용 세탁소다. 쇳가루나 유류 등 유해물질에 오염된 작업복은 가정에서 세탁하면 다른 옷을 오염시킬 수 있다. 일반 세탁소에서도 꺼린다. 블루밍 세탁소는 춘추복과 하복은 한 벌에 1000원, 동복은 2000원을 받고 작업복을 빨아준다. 정씨는 “이 정도 사소한 것에서부터 정치에 대한 관심, 나아가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도 결정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실에 맞는 세심한 정책 절실”
“청년이라는 말, 대졸자 대상 같아”
노동 등 의제도 지방은 배제 경향
특정 가치관·신념 따른 투표보다
이슈 따라 움직이는 ‘스윙보터’로
정치권이 ‘청년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들이 그 대상이 되는 청년이라 여기지 않는다. 소외감은 회의감으로 번졌고, 투표에 참여하지 않거나 선호 정당이나 후보 없이 그때그때 판단해 투표하는 양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최예린씨(22)는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해 안산에 있는 대기환경 자가측정 대행 업체에서 3년째 일하고 있다. 최씨는 “나라에서 ‘청년인재 영입 1호’같이 청년이란 말을 자주 내걸지만 청년 중에서도 대학생이나 대졸자같이 정책을 잘 이해하고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씨는 “우리처럼 일찍 일을 시작한 사람들은 돈 버느라 바쁘다”면서 “어차피 혼자 벌어먹고 산다면서 투표도 잘 안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한규진씨는 “선거 때마다 바뀌었으면 하는 마음에” 지난 대선 때는 국민의힘, 지난 지방선거 땐 민주당 후보를 뽑았다고 밝혔다. 그는 “꼭 민주당이라고 해서 딱히 우리한테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지도 않아서 이번 총선에선 국민의힘 후보를 뽑으려 한다”고 말했다.
노란씨는 투표 원칙이 “주요 당 후보들 뽑지 않기”라고 밝혔다. 노씨는 “(당선이) 안 될 걸 알면서도 무소속이나 군소정당 소속같이 열세인 후보들을 뽑는다”고 말했다. 그는 “나 같은 사람들이 더 있는지 아니면 가족이나 친구들이 뽑아준 건진 몰라도 내가 투표한 후보가 최종적으로 800표쯤 받았다”면서 “정치인들은 항상 끝이 다 안 좋았고, 나한테 무슨 존재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보니 차라리 800표 중 한 표를 차지한 게 보람 있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들은 자신을 대변하는 정당이 있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고 했다. 경북 경주 천북산업단지에서 만난 10년차 직장인 이종윤씨(33)는 “노조 출신,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라고 해도 딱히 우리 같은 사람들을 대변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씨는 최근 정치권 최대 화두 중 하나인 ‘제3지대’에 대한 기대감도 별로 없다고 했다. 그는 “정치권에선 맨날 누가 탈당을 하니, 신당을 창당하니, 비대위를 꾸린다니 잡음만 크다”면서 “이준석 같은 경우도 처음엔 울면서 기자회견하는 걸 보고 사람이 진솔하다고 느꼈지만, 이젠 나이도 그렇고 청년을 대변한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렇다보니 소외감이 비서울 지역 청년들의 대표적인 정서로 분석된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비서울·비수도권 청년들은 청년 담론으로 자주 언급되는 젠더나 공정 논쟁에서 멀어져 있다”면서 “노동과 같은 진보 의제도 예전처럼 지방 산업단지 노동자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주요하게 논의되는 사회적 쟁점에 속하는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배제돼 있다는 것이다. 양 교수는 “이들은 특정 가치관이나 신념으로 투표하기보단 이슈에 따라 움직이는 ‘스윙보터’라고 볼 수 있다”면서 “그간 여의도 정치에선 소외돼 있었지만, 관심도에 따라 얼마든지 지지 정당이나 후보가 바뀔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