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제주인의 삶 이해하는 관문…30여년 탐구의 흔적 곳곳에

2018.05.24 20:48 입력 2018.05.25 10:29 수정
문경수 과학탐험가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 시내에 있는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은 제주 고유의 민속 유물과 동식물, 지질, 해양생물 등 자연사 자료를 총체적으로 수집·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제주에 관한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자연사 표본이 제주인의 삶에 투영돼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사진은 박물관 내 자연사 코너.

제주 시내에 있는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은 제주 고유의 민속 유물과 동식물, 지질, 해양생물 등 자연사 자료를 총체적으로 수집·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제주에 관한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자연사 표본이 제주인의 삶에 투영돼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사진은 박물관 내 자연사 코너.

오월의 제주는 낙원이다. 초록의 자연은 검은 용암대지를 뒤덮고, 쪽빛 바다를 보면 발을 담그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덕분에 나도 바빠졌다. ‘요즘 당신만큼 제주에 많이 가는 사람이 없다’며 조언을 구한다. 나는 무조건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이하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 가보라고 권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박물관이지만 요즘 핫한 사립박물관 이름은 아니다. 30년 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제주를 대표하는 박물관이다. 흔히 박물관에 가면 바닥에 난 화살표 방향을 따라 관람을 하지만 제주를 답사하기 전에 꼭 박물관에서 해설을 들어보라고 한다. 해설을 듣고 제주에 있는 자연유산을 보면 비교할 대상이 생긴다. 박물관에 있는 표본은 풍화작용을 받지 않지만, 현장에 있는 자연유산은 풍화작용으로 계속 모습이 바뀐다. 즉 박물관의 표본과 현장에서 본 표본을 비교하다 보면 차이점이 발견되고, 다음에 어떤 관점으로 자연유산을 봐야 하는지 명확해진다.

나는 제주에 올 때마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 간다.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보이는 작은 숲과 돌하르방이 정겹다. 현무암으로 만든 돌계단을 올라 박물관 로비에 도착했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던 1984년에 개관했다. 당시 유명한 건축가인 김홍식 명지대 교수가 박물관을 설계해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시설로 자리매김했다. 어느 나라에 가든 자연사박물관은 그 나라의 자연사 연구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로 여긴다. 전시된 표본은 해당 지역에 대한 연구와 보존이 잘되고 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표본 수집이 용이하다. 아직까지도 원형이 잘 보존돼 있고, 제주도가 갖고 있는 지리·문화적 특징이 분명하다. 흔히 박물관의 역할을 전시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연구 기능이 먼저다. 박물관에 학예연구사가 존재하는 이유기도 하다. 민속자연사박물관은 분야별 학예연구사가 근무하는 덕분에 제주 고유의 민속자료를 포함해 동물, 광·식물, 해양생물 표본이 짜임새 있게 전시돼 있다. 무엇보다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자연사 표본이 제주인의 삶에 투영돼 있는 모습을 전시관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박물관이라기보다 시골 할머니댁 다락방을 들여다보는 푸근함이 담겨 있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공간과 전시품이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길이 5m의 산갈치 표본이다. 몸 모양이 갈치와 비슷하고, 은색의 비늘 대신 짙은 은색의 돌기가 몸 전체를 감싸고 있다. 제주는 연안 바다의 수온이 높아 갈치의 먹이인 멸치가 풍부해 갈치 어장이 풍부하다. 살아 숨 쉬며 빛을 내는 은백색 갈치는 아니지만 원형을 잘 보존해 잠시 자유롭게 바다를 헤엄치던 갈치의 모습을 떠올린다. 갈치 표본 옆으로 제주의 용암동굴을 형상화한 공간이 이어졌고, 제주 탄생 설화인 설문대할망과 삼성혈 신화를 소개하는 영상이 반복적으로 방송됐다. 이른 시간이라 한적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이를 동반한 가족부터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까지 북적였다. 수학여행으로 한껏 들뜬 학생들을 보니 22년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곳 박물관에 들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치더라도 밤새 놀고 버스에서 종일 잤으니 기억할 리 없다.

부임한 지 1년 된 김현경 학예연구사가 자신이 기획한 지질코너로 안내했다. 수없이 답사했던 수월봉 화산재 지층을 벽면에 유화로 그려놓고, 수월봉에서 채집한 화산탄·현무암자갈·조면현무암 같은 표본을 만져볼 수 있다. 그밖에도 한라산의 고도별 식물의 분포와 생태계, 제주도 곤충의 다양성, 척추동물의 진화 과정과 제주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자연의 모습이 전시관별로 잘 소개돼 있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내부.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내부.

내가 박물관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제주의 소리를 체험하는 휴식공간이다. 곤충코너가 끝나는 지점에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닮은 영상이 계속 나오는 쉼터가 있다. 화질도 좋지만 고음질 음향이 함께 나와 곶자왈 한복판에 있는 기분이 든다. 몇 해 전 노르웨이 한 TV쇼는 광고 없이 기차여행 과정에 비친 풍경을 24시간 동안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시청률 40%를 기록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자극적인 영상과 도시의 소음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자연의 품만큼 위안을 주는 것도 없다.

전시표본을 먼저 본 다음에 영상 속에 등장하는 중문해안의 파도소리, 한라산의 새소리를 들으면 눈과 귀가 편안해진다. 박물관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뒷마당에 마련된 야외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물관을 둘러보니 제주 전통가옥 구조를 형상화한 4각형 구조에 가운데 정원을 만들어 놨다. 카페가 있는 공간은 통유리로 돼있어 박물관 가운데 있는 제주 몰방에(곡식 도정기구)와 현무암으로 만든 절구 모양의 석물 그리고 무덤에 세웠던 동자석이 한눈에 보였다. 각기 쓰임새는 다르지만 제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을 써서 만들었다. 돌은 나무에 비해 마모되거나 부식되지 않아 습기가 많은 제주 기후에 가장 알맞은 재료다.

박물관·현장의 표본 비교하면
자연유산을 보는 관점 명확해져

분야별 학예연구사 존재 덕에
민속·생물 등 짜임새 있는 전시

단순히 지식 전달을 넘어서
제주인의 삶에 투영된 표본들
시골 할머니댁 들여다보듯 푸근

37년 걸쳐 제주도 곳곳 조사한
일본 학자의 책 우연히 발견
전설 속 연구자들 생각에 설레

■제주를 이해하는 또 다른 문(門), 제주학

박물관을 관람하고 탑동 근처에 있는 북카페에 들렀다. 카페 전체를 둘러볼 때쯤 유독 제주도 관련 여행책이 많은 서가를 찾았다. 몇몇 책은 이전에 한번쯤 넘겨봤던 것이다. 그중 <제주도>라는 책에서 손길이 멈췄다. 자세히 보니 저자가 일본인이다. 몇 해 전 시바 료타로의 <탐라기행>을 만난 날이 생각났다. 별 생각 없이 차례도 보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페이지를 넘겼다. 도입부 스무장이 오래된 제주사진으로 채워져 처음엔 사진집인 줄 착각했다.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가 사진을 넘겨보니 그냥 사진이 아니었다. 구도가 멋진 풍경사진이 아니라 무언가를 기록하기 위해 찍은 사진처럼 보였다. 사진이 예사롭지 않아 책의 부제를 찾아보니 ‘일본 문화인류학자의 30년에 걸친 제주도 보고서’라고 적혀있다. 그는 식물학자가 식물표본을 수집하듯이 제주의 모든 것을 기록이라도 하겠다는 듯 서문과 목차를 써내려갔다. 한 글자도 놓치지 않을 마음으로 서문을 읽었다.

내막은 이랬다. 1935년 여름 처음 제주도를 방문한 이즈미 세이치는 그해 겨울 한라산 등반을 감행한다. 불행히도 하산하던 길에 후배를 잃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일문학을 공부하던 그는 문화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꿔 이듬해인 1936년부터 1973년까지 37년간 제주를 조사한다. 죽은 후배에게 보여줄 생각이었을까. 한 이방인 문화인류학자의 노력으로 국적과 이념을 넘어선 제주학 보고서가 탄생한 것이다. 일본에서 1966년 책이 출간됐지만 국내에는 2014년에야 번역됐다.

야외 정원에 전시된 동자석. 무덤에 세웠던 석물의 하나로, 망자의 시중을 드는 역할을 담당한다.

야외 정원에 전시된 동자석. 무덤에 세웠던 석물의 하나로, 망자의 시중을 드는 역할을 담당한다.

뒷면의 역자후기를 들춰보니 또 다른 사연이 있다. 이 책의 번역자는 제주 출신 언론인 김종철이다. 그는 제주 최초의 산악회인 제주산악회 창립회원으로 참여했고, 평생에 걸쳐 한라산과 제주를 답사했다. 또한 제주도에 있는 330여개의 오름을 직접 답사해 제주 오름에 대한 최초의 종합 보고서인 <오름나그네>를 집필했다. 그는 우연히 일본에서 출간된 이즈미 세이치의 <제주도>를 발견하고 제주를 공부하는 후학을 위해 틈틈이 번역을 한다. 하지만 1995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 번역본은 빛을 보지 못했다. 훗날 그의 부인이 대신 출간했다.

그날 저녁 지인의 소개로 제주 원도심에 위치한 대동호텔에 묵었다. 호텔에 도착하니 지인과 그의 일행들이 로비 옆 살롱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고 짐을 챙겨 방으로 갔다. 객실 통로에 흑백으로 인화한 오름 사진과 비양도에서 본 화산탄이 보였다. 차를 한 잔 마시고 천천히 살롱을 둘러봤다. 오래된 흑백사진 몇 장과 예술서적, LP음반 몇 장이 보였다. 뉴욕에 있는 탐험가클럽을 상상했다. 탐험가들이 발견한 진기한 수장품이 전시된 클래식한 공간. 문명화된 도시에 살고 있지만 그 공간은 미지의 세계와 원시적 분위기가 감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담소를 나누는 동안 소파에 놓인 흑백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대동호텔 박은희 대표에게 물어보니 호텔 창업주인 부친이 한라산 등반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말했다. 혹시나 싶어 김종철 선생을 아는지 물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부친과 함께 산악회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대답을 듣고 나니 불과 몇 시간 전 책에서 만난 두 거장의 숨결이 느껴졌다. 어쩌면 김종철 선생과 이즈미 세이치도 한번쯤은 이 살롱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살롱에 모인 사람들과 늦은 밤까지 북카페에서 발견한 책 이야기와 제주의 원형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방에 들어와 이즈미 세이치와 김종철에 대해 좀 더 찾아봤다. 김종철의 <오름나그네>는 절판됐지만 최근까지 제주 오름을 언급하는 기사에 빠짐없이 등장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이즈미 세이치에 대해 “이즈미 세이치가 30년에 걸쳐 써낸 <제주도>는 내게 큰 감동이었다. 그의 학자적 자세에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고, 인류학적 사고의 총체적 시각이 갖는 인식의 힘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듯했다”고 그의 책에 기술했다.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로비 옆 살롱에 내려가면 전설 속 제주연구자들이 탐험을 준비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필자 문경수

[전문가의 세계 - 문경수의 탐라도 탐험] (10) 제주인의 삶 이해하는 관문…30여년 탐구의 흔적 곳곳에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과학동아’에서 기자로 일한 과학탐험가다. 지난 10여년간 과학을 주제로 서호주·몽골·알래스카 등 지질학적 명소들을 탐험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미국 우주항공국(NASA) 우주생물학그룹과 과학탐사(2010년)를 했고, <효리네민박>(JTBC), <어쩌다 어른>(tvN), <세계테마기행>(EBS)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문경수의 제주과학탐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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