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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되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35년 전 제가 피해자였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변호인이었습니다. 박 전 시장마저 위력에 의한 성추행 의혹의 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 앞에 절망했습니다. 계속되는 선출직 고위공직자들의 성비위 사건으로 정부와 여당은 20~30대 여성들을 포함, 많은 국민들에게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미투 이후 조직과 권력의 불평등으로 일어나는 성폭력에 대한 변화의 요구가 많았고, 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고위공직자들은 바로 자신이 바뀌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방관했습니다. 그 현실이 참혹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난 7월24일 열린 국회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 발언대에 선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56)의 목소리는 살짝 높았다.

조금 긴장한 듯, 몇몇 단어를 되풀이해 읽기도 했다. 왜 아니겠는가. 등원 후 첫 대정부질문이었다. 더욱이 주제는 민주당 내 금기어에 가까운 ‘박원순’이었다.

당시 친박원순계 의원들은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성’ 발언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해찬 대표는 공식 사과하면서도 “피해 호소인”이라는 표현을 고집했다. 고인과의 인연으로 고심이 깊었을 권 의원은 그러나 단호하게 “절망”을 말했다. 대정부질문에서 밝혔듯이 “성평등을 국가통치 원리로 작동시키기 위한 제도적 기반 마련을 위해 국회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지난달 2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권 의원은 ‘박원순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꼭 변화시켜야 하는 권력형 성차별적 조직문화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며 “민주당은 겸손함과 책임감, 진중함을 갖고 이 사안을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지난달 2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권 의원은 ‘박원순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꼭 변화시켜야 하는 권력형 성차별적 조직문화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며 “민주당은 겸손함과 책임감, 진중함을 갖고 이 사안을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20대 초반 이후 권인숙은 ‘부천경찰서 성고문 피해자’로 불려왔다. 평생, 이름 석 자 앞에 특정 수식어가 붙는 삶은 어떤 것일까. 뜻밖에 그는 담담했다.

“저는 완전히 분리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책임감을 갖고 잘 지켜야 될 이름이긴 했지만…. 어떻게 기억될지는 제 몫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의미 부여는 각자의 방식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피해생존자 권인숙’이 오랜 모색과 단련의 시간을 지나 ‘정치인 권인숙’으로 섰다. 지난달 21일 국회에서 그를 만났다. 권력형 성폭력을 비롯한 젠더 이슈와 권인숙의 삶에 대해 들었다.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은
성고문 고발과 여성학을 배운 것
국회에서 ‘박원순’ 대정부질문
개인 인연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고민의 여지 없이 질의했다



1985년 노동현장에 뛰어든 권인숙은 이듬해 6월 경기 부천경찰서에 체포돼 ‘성고문’을 당한다. 사건 발생 3년 만인 1989년 대법원은 가해자 문귀동에게 징역 5년 판결을 확정한다. 권인숙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배상금을 받게 된다. 이 돈으로 노동인권회관을 세워 대표간사를 맡는다. 그러나 권인숙에겐 ‘잘 맞지 않는 옷’이었다. 결국 서른이 된 1994년 여성학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2002년 펴낸 자전에세이 <선택>에서 그는 친구와 대화한 내용을 통해 당시 심경을 소개한다. “사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었거든. 운동을 하면서도 저 밑바닥 무의식 속에 그 욕구가 남아있었어. 노동인권회관을 하면서는 노동운동이 아니라 여성학을 하고 싶었어. 여성학을 안 하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권인숙은 미 클라크대에서 ‘한국의 군사화된 여성의식과 문화’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남플로리다주립대 교수로 일했다. 귀국 후엔 명지대 교수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원장을 지냈다.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으로 ‘부천서 성고문 고발’과 ‘여성학 선택’을 꼽는다.

-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박원순 성추행 의혹’을 주제로 질의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고인과의 인연이 있으니까요.

“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비례대표이고, 비례대표는 자신이 왜 뽑혔는가에 대한 소명을 계속 중요하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성인권, 성평등을 중심에 놓고 활동할 것은 모두 다 알고 있는 상황이고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말한다는 게 고민사항은 아니었습니다. 21대 초선 의원 중에서 이 문제에 답해야 한다고 하면, 누구나 저를 떠올렸을 겁니다. 굉장히 당연하게 (주권자의 요구에) 응해야 하는 문제라고 봤어요. 개인적 인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어요.”

- 대정부질문 이후 온라인에서 ‘백래시’(반발·반격)를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온라인 댓글 등을) 꼼꼼하게 보는 편은 아니에요. 다만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워낙 큰 사건이라, 반응의 스펙트럼이 다양할 수밖에 없고, 양극단이 굉장히 강하게 반응할 만한 일이니까요. 그 부분(백래시)에 많이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 박 전 시장 사후 민주당 내에선 2차 가해성 발언이 잇따랐습니다. 당내 기류를 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저는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당황스럽고 안타까움이 많을 수밖에 없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꼭 변화시켜야 하는 뿌리 깊은 권력형 성차별적 조직문화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변화를 이끌어가야 하고 문제가 된 지자체장이 속해있었던 당으로서 이 문제를 사죄하는 마음의 겸손함과 책임감, 진중함을 동시에 가지고 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 특히 국회의원들이 중심을 잘 잡아서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 전 시장이 사망한 뒤 50일이 지났지만 성추행 및 방조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은 지지부진하다. 박 전 시장 휴대전화에 대한 포렌식 작업은 법원 결정으로 중단됐다. 경찰에 출석한 전직 비서실장들은 피해자 고소의 주요 내용을 부인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직권조사도 아직까지 가시적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 경찰 수사와 인권위 조사 모두 큰 진전이 없습니다.

“(진상 규명이)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경찰도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원 조사가 제대로 되기가 힘든 상황이잖아요. 피고소인이 사망한 사건이어서…. 기다려야 하는데 그 과정이 걱정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 걱정스러운 부분이 뭔가요.

“조사 과정이라는 게 부분적으로 흘러나오면 팩트(사실관계)와 무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피해 사실을 밝혀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과정이 돼야 합니다. 정치권과 언론 모두 책임감을 갖고 차분하게 지켜봐야 합니다. 굉장히 오랜 기간 동안 벌어진 사안이라서 부분적 팩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건 위험합니다.”

권인숙은 이른바 ‘피해자다움’에 대한 문제의식도 드러냈다. “저도 (성고문 사건 당시) 유치장 있을 때 옆사람하고 대화도 하고 농담도 하고 그랬어요.”

울림이 컸던 대정부질문으로 다시 옮겨갔다. 권인숙은 ‘고위공직자의 (성인지 감수성) 내면화 부재’를 지적하고 싶었다고 한다.

권인숙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은 성고문 고발과 여성학을 배운 것”[플랫]

고위공직자들 젊은 여성들의 요구가
‘과도’하다 생각만 한다
미흡한 디지털 성범죄 규율
가해·피해자 나이가 어려져 대책 시급
재판 역시 전문성 갖추고 해야 한다



- 도대체 어떻게 해야 권력자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요,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 때도 그렇고 미투가 발생했을 때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은 ‘그럼 나는 무엇이 바뀌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했어야 합니다. ‘그 사람 운이 없네’ 식의 단순한 접근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총체적 점검이 있었어야 해요. 40대 이상 고위직 남성은 같이 일하는 여성들의 주장이나 의견에 귀 기울이며 살아본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해 굉장히 두렵게 여겼어야 합니다. 제가 만나본 상당수 공직자들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젊은 여성들의 감각에 내가 맞출 수 없다’ ‘젊은 여성들의 요구는 과도하고, 나는 불편하다’고 생각해요. 미투 이후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졌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백래시도 컸습니다. 제 경험에 비춰보면, 새롭게 바뀌어가는 현실에 저항하는 양상을 많이 느꼈어요. 미투 이후 각자의 한계에 대한 냉정한 판단과 집단적 노력이 있어야 했는데, 없었어요.”

- 미투 이후 한국 사회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착시에 불과한가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이 아랫사람과 소통하는 방식입니다. 이게 잘 안 바뀝니다. 아랫사람의 ‘눈치’를 보며 조직문화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지 않으면 문제가 뭔지, 내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요. 사실 고위직 남성들은 여성 직원을 아랫사람으로만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성과 동등하게 대화하고 논의하고, 직급과 상관없이 존중하는 경험이 부족해요. 고위직에 여성이 많이 들어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광역단체장들에게서 성폭력이 잇따라 발생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들의 제왕적 위치 때문입니다. 어떤 성폭력 예방·대응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해도, 결국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주변에서도 경고할 수 있는 감수성이 살아있기 어려운 구조이고요. ‘내가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어렵고, ‘네가 틀렸다’는 말을 듣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거죠. 극복하는 데 오래 걸릴 과정입니다.”

민주당 당헌은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부정부패 사건 등 중대한 잘못으로 그 직위를 상실해 재·보선을 실시하게 된 경우 해당 선거구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박원순 전 시장 사망과 오거돈 전 시장 사퇴로 내년 치러지는 서울·부산시장 보선의 공천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다.

- 민주당이 서울과 부산시장 보선에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일부에선 여성 후보를 내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광역단체장 여성 후보가 제로였어요. 그때 진짜 속상했어요. 사실 ‘후보를 안 내는 일’이 말처럼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내게 된다면, 여성 후보가 나와서 지자체의 관행과 문화를 구체적으로 바꿔나가면 어떨까 싶어요. 이러한 일들을 감당할 능력과 경험을 가진 분들이 많이 계시니까, 변화를 하겠다는 의지로 선택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30대 여성 지도자들이 활약하는 모습도 좋게 보이고요.”

권 의원은 디지털 성범죄 근절에 관심이 많다. 1호 법안으로 ‘온라인 그루밍’ 처벌 법안을 발의했고, 최근에는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해 성폭력방지법, 성폭력처벌법, 아동·청소년성보호법 등 3개 법률 개정안도 발의했다. 불법촬영물에 대한 선제적 삭제대응 체계를 구축하고,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유포·판매 사이트 개설행위를 강력히 처벌하며, 재판과정에서의 2차 피해를 방지하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 초기 의정활동의 초점을 디지털 성범죄 근절에 맞추고 있습니다.

“디지털 성폭력 문제는 범죄의 진화 양상에 비해 규율은 너무나 부족한 상황입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미성년이 많다는 측면에서 더욱 두렵습니다. n번방 사건 가해자 가운데 12세 아동이 있었어요. 피해자들은 더 어리고요. 진지하게, 총체적으로 이 부분에 접근해야 합니다. 20대 여성들에게 불안은 해결해주지 않으면서 ‘과격해지지 말라’고 할 순 없습니다. 빨리 규율을 만들어야 합니다.”

- 최근 법원이 ‘웰컴투비디오’ 사건 주범 손정우의 미국 송환을 불허했습니다. 디지털 성폭력 등 성범죄에 대한 법원 판단에 비판이 많은데요.

“지금의 행태를 보면 일종의 ‘퇴행적 저항’ 같아요. 성범죄를 다루는 사람은 판사든 검사든 전문성이 강조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사회적 통념, 남성적 경험에 의해 판단하면 퇴행적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전문판사 제도를 강화하고, 교육을 섬세하게 오랫동안 실시해서, 교육 결과를 점검받은 사람들이 성범죄 재판을 맡아야 합니다. 대부분 선진국에서도 시행하는 제도입니다. 피해자의 다양한 특수성을 이해하는 능력, 2차 가해를 하지 않는 접근방법, 전반적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 등이 섬세하게 지식화되고 훈련돼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서 관습적·타성적 판결을 내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는 거죠.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결론들이 내려지고, 도대체 법이 왜 존재하는지 분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 코로나19로 인한 고용 충격이 여성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2018년 7월과 지난해 7월엔 여성 실업률이 남성보다 낮았는데, 올해 7월엔 여성이 남성을 추월했습니다. 재택근무·등교 중단 등으로 증가한 돌봄노동 또한 여성들이 더 많이 감당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여성 고용위기를 성평등 차원의 포괄적 사안으로 보고 대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성평등은 자잘한 제도 속에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고, 큰 그림 속에서만 의미 있게 설계될 수 있습니다. 캐나다 같은 경우 중기 재정방향을 논의하면서 성별 임금격차 해소를 중요한 키워드로 잡습니다. 이후 모든 부처가 여기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합리적으로 조율하면서 전 사회적으로 추진해 나갑니다. 이렇게 해야만 겨우 약간의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성평등을 통치원리로 삼고 각 부문에서 세심한 검토를 해야 합니다. 예컨대 육아휴직을 권장할 경우 성별 임금격차가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 고려가 필요합니다. 한국은 다른 부문에 비해 노동시장에서의 여성 이슈는 진전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성별 임금격차, 비정규직의 여성 비율, 경력단절 문제 등 모두 답보상태입니다. 시혜적 제도는 많이 만들었지만, 각각 개별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제도의 혜택은 공공영역이나 대기업의 정규직 여성에게만 한정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큰 시각에서 내려다보며 자잘한 요소들을 통제하지 않으면 해결이 쉽지 않습니다.”

이제 1986년으로 가보기로 한다. 반인권적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된 권인숙은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성고문 사실을 폭로한다.

“나는 많은 선택을 했다. 그중 가장 선택이라고 할 만하지 못한 것은 성고문에 대한 폭로였다. 법적으로 고소가 가능한 일이라면 당연히 세상에 알리고 싸워야 한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자전에세이 <선택>)

권인숙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은 성고문 고발과 여성학을 배운 것”[플랫]

성폭력 피해자는 ‘이래야 한다’는 ‘피해자다움’
성폭력을 경험하면 인생이 망가진다고 생각하는 것
이런 통념에 저항하려 여성학 공부했다



- 인생을 건 결단이 아니었습니까.

“엄청난 결단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 개인을 중심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사회 변화에 도움이 되면 당연히 (고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른바 ‘정조관념’ 같은 통념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던 게 한 축이 되지 않았을까 싶고요. 또 다른 축에서 보면, 제 스스로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해서 주저하지 않았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 기질이기도 한데, 명료하게 옳다고 생각하면 별로 두려움이 없어요. 그다음에는 크게 고민하지 않는 편입니다.”

- <선택>에서 “여성학은 단순한 선택이라기보다 터질 것 같은 머리를 수습하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다”고 밝혔습니다. “내가 여성과 관련하여 부당함을 느낀다면 왜 노동문제에 대한 의식과 달리 냉소당하고 조롱당하는 느낌인지, 항상 의문이었다”며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유학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궁금했어요. 왜 이런 질서가 만들어졌는지. 초기에 해답은 군사주의, 집단주의에서 풀었던 것 같아요. 집단주의나 군사주의가 어떻게 여성혐오로 이어지는지를 들여다봤습니다. 또 관심이 많이 간 부분이 성폭력이었어요. 사람들이 성폭력과 관련해 당연하게 생각하는 통념들이 있거든요. 피해자는 이래야 한다는 ‘피해자다움’, 성폭력을 경험하면 인생이 망가진다고 생각하는 것…. 저는 하나도 해당하지 않는데, 사람들은 그러한 통념에 기대 저를 바라봤습니다. 이런 통념에 대해 저항하고 싶었어요. 그것들이 제 연구 주제가 되고, 공부를 이어올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 대학교수와 국책연구기관장을 지냈습니다. 국회의원이 된 이후, 이전의 삶과 무엇이 가장 크게 달라졌나요.

“사생활이 없고, 가족과 함께하는 삶도 없습니다. 그런 걸 전제로 하는 삶 같아요. 지역구 의원은 더 심하지요. 국회의원이 너무 정신없이 일을 하는 분위기가 바람직한지 의문이 듭니다. 각자 바빠서 다른 의원이 뭘 하는지 몰라요. 법안들을 너무 많이 내고요. 각자 9~10명의 직원을 두고, 계속 무엇인가 생산하고, 새로운 이슈가 등장하면 거기에 맞춰 법안을 만들고…. 정쟁에 의해 아무것도 못하는 국회도 문제이지만, 의원과 보좌진이 모두 정신 없는 국회는 또 맞는 건가 싶어요. 법안 하나 만들 때마다 의원들이 함께 더 꼼꼼히 만들고, 오래 점검하고, 통과시키고, 느리게 가는 분위기가 이상적이지 않을까요. 계속 고민 중입니다.”

- 민주당 의원으로서, 당이 이런 부분은 부족하다 싶은 게 있습니까.

“저는 성평등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어요. 당의 건강함, 전향성, 미래지향성을 위해 중요할 뿐 아니라 실제로 20~30대와 40대까지 여성들이 많이 달라졌거든요. 2018년 조사해보니 20대 여성의 50%가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했습니다. 이후 백래시가 진행됐음에도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비율이 30%는 꾸준히 나옵니다. 30대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여성들의 의식이 전반적으로 바뀐 겁니다. (당에서는) 그걸 아직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그 의미를 제대로 판단하고, 잘 대응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부족해 보입니다.”

- 여성들의 변화는 ‘표’라는 관점에서도 주목해야 할 일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표라는 관점에서도 계속 설득하고 있어요. 이런 변화가 반영되지 않으면 당의 이미지 측면에서 치명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21대 총선에서 이런 변화가 많이 반영됐어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됐어요. 20~30대 여성들이 당의 주요 지지층이었지만 (이들의 지지율이) 최근 많이 빠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거든요.”

옷은 자기표현 위한 좋은 도구
류호정 의원 원피스 논란을 보며
류 의원의 선택이 남성 의원 사이서도 일어났으면



- 류호정 정의당 의원의 ‘원피스’가 논란 아닌 논란거리가 됐습니다.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사실 늘 궁금했던 게…남성들은 어떻게 똑같은 옷을 매일 입을까…였어요. 행정부는 그렇다 쳐도 국회는 다양성을 대변해야 하는 곳이잖아요. 옷은 자기표현의 방식이고요. 남성 의원들은 왜 자기표현을 위한 좋은 도구를 활용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정치인은 눈에 띄고 싶어 몸살하는 사람들인데…(웃음) 류 의원과 같은 선택이 남성 의원들 사이에서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권인숙에겐 다소 엉뚱한 면모가 있다. ‘TV 중독자’다. 1990년대 초반 가난한 유학생 시절에도 31인치 TV를 들여놓을 정도였다. 요즘엔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를 보고 있다. 청춘 남녀들이 ‘썸’을 타고 연예인 예측단이 이들의 심리를 추리하는 예능 <하트시그널>도 즐겨 본다. 20대 딸과 함께 보면서 “우리 둘은 왜 이렇게 추리를 못하냐”며 탄식할 때가 많다.




1986년 7월 권인숙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에 참가한 여성들 주위를 전경들이 둘러싸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6년 7월 권인숙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에 참가한 여성들 주위를 전경들이 둘러싸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독재정권 민낯 폭로하고 여성인권 문제 끌어냈다




“권양-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에게 무엇을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986년 11월21일 인천지법 법정. 변호사 조영래가 ‘피고인 권인숙’의 1심 결심 공판에서 변론 요지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후일 한국 사법사상 최고의 변론으로 꼽히게 되는 명문장이지만, 검찰과 법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날 검찰은 공문서 위조 혐의로 구속 기소된 권인숙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법원은 이후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1985년 서울대 의류학과에 다니던 권인숙은 “더 이상 대학생으로서의 기득권을 유지할 명분을 찾지 못하고”(자전에세이 <선택>) 노동현장에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학기 내내 시험을 치르지 않는 방식으로 제적당한 뒤 경기 부천의 한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에 취업한다. ‘허명숙’이라는 이름의 ‘위장취업’이었다. 이듬해인 1986년 5·3 인천민주항쟁이 발생하자 민주화세력을 탄압하는 광풍이 분다. 권인숙은 6월4일 주민등록증 위조 혐의로 부천경찰서에 연행된다. 그는 혐의를 시인했으나 경장 문귀동은 5·3 인천항쟁 관련자의 행방을 대라며 야만적 성고문을 자행한다.


권인숙은 접견 온 변호사에게 성고문 사실을 알리고 교도소 내에서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7월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하지만, 검찰은 “폭언·폭행은 있었으나 성적 모욕행위는 없었다”며 문귀동을 기소유예했다. 외려 권인숙을 향해 “급진 좌경 사상에 의한 의식화 투쟁의 일환” “혁명을 위해 성마저 도구화하는 행태”라고 비난했다. 전두환 정권은 별도의 ‘보도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검찰이 발표한 내용만 보도할 것 △(1면이 아니라) 사회면에서 취급할 것 △사건 명칭을 성추행이라 하지 말고 성모욕 행위로 할 것 △반체제 측의 고소장 내용은 보도하지 말 것 등이었다.



전두환 정권 조직적 은폐·축소
전국 곳곳서 “처벌하라” 시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 돼





그러나 상황은 정권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전국 곳곳에서 ‘문귀동을 처벌하라’는 규탄 집회가 잇따르고, 166명에 이르는 변호사들이 대리인단을 구성해 서울고법에 재정신청을 냈다. 문귀동을 법정에 세워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법원 역시 권력의 편이었다. 재정신청을 기각하며 “문귀동이 비등한 여론 등으로 인해 형벌에 못지않은 고통을 받았다”는 이유를 댔다. ‘피해자 권인숙’은 감옥살이를 하고 ‘가해자 문귀동’은 거리를 활보하는, 인권과 법치를 농락하는 사태가 계속됐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한 재판이 진행 중이던 1988년 권인숙 의원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한 재판이 진행 중이던 1988년 권인숙 의원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전두환 정권의 총체적 은폐·조작극은 이듬해인 1987년 6월항쟁 이후에야 끝이 난다. 권인숙은 양심수 석방을 촉구하는 여론에 따라 가석방으로 출소한다. 문귀동은 1988년 재판에 회부돼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는다.


22세 여성이 불의하고 폭압적인 권력에 맞서 승리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다층적 함의를 갖는다. 우선 이후 발생한 서울대생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군부독재정권의 추악한 민낯을 폭로하며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동시에 민주화운동 진영 내에서조차 주목받지 못하던 여성인권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도 오랫동안 ‘권양’으로 불렸던 권인숙은 군사주의와 젠더 문제에 천착하는 연구자로 변신했다.






김민아 선임기자 maki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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