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의 그림자…다시 세계의 고민으로 떠오른 ‘난민’

2021.11.18 17:36 입력 2021.11.18 19:17 수정 이윤정 기자

벨라루스-폴란드 국경의 ‘브루즈기 쿠즈니차’ 검문소 인근에서 18일(현지시간) 난민 어린이가 물을 마시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난민 문제가 다시 세계의 고민으로 떠오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경제 위기, 권위주의 득세, 내전·쿠데타와 극심한 기후변화까지 겹치면서 고국을 등지는 사람이 늘어나면서다. 올 상반기에만 2100만명이 고향을 떠나 길 위에 섰다. 하지만 이미 2015 난민 위기를 겪은 유럽은 더욱 굳게 빗장을 걸어잠그고 있다. 경제대국 미국도 난민 수용에는 소극적이다. 세계 각국이 난민을 밀어내는 가운데 벨라루스 등은 난민을 ‘정치적 카드’로 활용하고 있다.

■난민 떠넘기기…국경에 갇힌 난민들

급증하는 난민 문제는 국가 간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최근 영불해협(도버해협)을 건너려는 난민들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중동에서 유럽으로 넘어온 난민들은 ‘브리티쉬 드림’을 꿈꾸며 프랑스 북서부 해안가에서 소형 구명보트를 타고 영불해협의 폭이 가장 좁은 부분(33㎞)을 횡단한다. 올해 영불해협을 건넌 난민 수는 약 2만3500명 정도다. 지난해(8417명)의 3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영국은 ‘프랑스가 영국으로 오는 불법 이민자를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프랑스는 ‘영국 노동계가 불법 이민자를 적극 채용하기 때문에 난민들이 몰려든다’고 맞서고 있다.

프랑스는 영국의 거센 항의에 결국 지난 16일(현지시간) 북서부 항구도시 덩케르크 인근의 난민촌을 폐쇄했다. 이때문에 난민 1500여명이 거처를 잃었다. 가디언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난민 이동을 적극 단속하지 않는 식으로 유럽연합(EU)을 떠난 영국에 일종의 앙갚음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영국에서 퍼지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또한 중남미에서 몰려오는 불법이민자 행렬(캐러밴)을 두고 고심하고 있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적발된 불법 이민자 수는 올해 165만명을 넘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40만명)에 비해 4배 증가한 수치다. 미국 정부가 멕시코 등 중남미 나라들에 미국행 불법 이민자 저지를 압박하면서 올해 초 출발한 캐러밴들은 멕시코에 발이 묶여 있다. 멕시코는 캐러밴을 저지하는 대가로 미국에 비자 확대를 요구하는 등 흥정을 벌이고 있다.

■정치적 카드로 이용되는 난민

최근 유럽으로 향하려는 난민들이 늘어나자 벨라루스는 서쪽의 폴란드 국경으로 이들을 밀어내며 갈등을 부추겼다. 이달 들어 벨라루스-폴란드 국경의 ‘브루즈기 쿠즈니차’ 검문소에서 난민 수천 명이 월경을 시도했고 폴란드 국경수비대는 물대포와 최루가스, 섬광탄 등을 동원해 저지했다. 벨라루스 편에선 러시아와 EU 간의 군사적 긴장까지 고조됐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장악을 비롯해 중앙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지역의 정치 불안과 경제 위기는 유럽행 난민 급증으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들어 현재까지 폴란드로의 불법 월경 시도 건수는 3만건에 달한다. 하지만 벨라루스에서 폴란드로 넘어간 난민들은 즉결 추방됐고, 벨라루스가 송환을 허가하지 않으면서 난민들은 국경 지대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혹독한 겨울을 나야 한다. EU가 중재에 나서면서 17일 벨라루스가 난민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는 데 동의했지만 난민 문제로 EU는 다시 골머리를 앓게 됐다.

뉴욕타임스는(NYT)는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EU의 제재 완화를 노리고 난민을 이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벨라루스 정부가 최근 수도 민스크행 편도 항공권만 가진 사람에게도 비자를 내주고, 이주민 일부를 폴란드 쪽 국경으로 이주시켜 국경을 넘으라고 강요했다는 증언도 나왔다고 NYT는 전했다. 루카셴코 대통령 배후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있다고 알자지라는 지적했다. 폴란드 우파 정부 또한 난민 갈등으로 손해볼 것이 없다. 난민 수용을 거부함으로써 국내 정치적 지지를 확대하고 동시에 EU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난민에 관용 베푼 나라들의 고민

모두가 난민을 거부할 때 이들을 포용한 나라들도 있다. 지난해 베네수엘라 난민 200만명이 콜롬비아로 향했는데 이반 두케 정부는 이들에게 임시 보호 지위를 부여했다. 콜롬비아 공립 병원은 치료비를 내기 힘든 이주민 환자들을 치료했고, 공립학교도 50만명 이상의 이주 아동을 받아들였다. 아메리카 대륙의 경제 대국인 미국 조차 중남미의 인도주의적 위기를 외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콜롬비아의 난민 포용에 유엔난민고등판무관은 “지난 30년 간 중남미에서 가장 위대한 인도주의적 조치”라고 평했다.

하지만 난민에 문을 열겠다는 나라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2015년 유럽 난민 위기 당시 중동·아프리카 난민 200만명을 받아들인 스웨덴은 더이상 난민에 관대하지 않다. 스웨덴 최초 여성 총리에 오르는 막달레나 안데르손 사회민주당 대표는 지난 4일 스웨덴에 정착한 난민들을 향해 “만약 당신이 어리다면 취업·고등 교육을 받아야 한다”면서 “남녀 모두 스웨덴어를 배우고 일하며 복지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북아프리카계 이민 2세를 중심으로 조직폭력배와 마약범죄자들이 증가하자 이를 겨냥한 것이다.

외교 전문매체 포린폴리시는 “유럽 난민 위기 당시 관용적인 포용 정책을 펼친 독일, 스웨덴 등에서도 극우가 득세하면서 난민에 부정적 여론이 커지고 있다”면서 “민주주의적 가치를 헤치는 난민 세력을 억제하는데 실패한 서방국들은 더이상 수천만명에 달하는 난민과 실향민들에 거처를 제공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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