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오늘

1907년 고종 황제 강제 양위식

2010.07.19 17:53 입력 2010.07.20 01:13 수정 유정인 기자

환관 2명이 대역 ‘웃지 못할 촌극’

1907년 7월20일 오전 8시 경운궁(현 덕수궁) 중화전.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기이한 양위식이 열렸다. 대한제국 황위를 물려주는 고종 황제도, 이어받을 순종 황제도 참석하지 않은 자리였다. 참석을 거부한 신·구 황제 대신 환관 두 명이 대역으로 동원돼 용상에 앉았고, 대신들이 하례를 올렸다. 웃지 못할 촌극이었다.

고종 황제 강제 퇴위의 직접적 원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이었다. 그해 4월 고종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3명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했다. 일제의 강압으로 맺은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특사들은 세계 열강의 방관 속에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이후 각국 기자들과 만나 ‘조선을 위해 호소한다’는 연설로 조선의 참상을 전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일제에 눈엣가시 같던 고종 황제를 물러나게 할 좋은 구실이 됐다. 당시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하야시 외무대신에게 이를 보고받고 “한국에 대해 국면일변을 위한 조치를 취할 좋은 기회… 조세권, 병권, 재판권을 차지할 좋은 기회”라고 적어 보냈다. 일사천리로 고종의 퇴위가 추진됐다. 이토는 고종을 알현해 “밀사를 파견하는 행위는 일본에 대해 공공연히 적의를 발표한 것으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포고할 권리가 있다”고 밤을 새워 고종을 위협했다.

잇따라 열린 어전회의에서도 고종에게 힘을 실어줄 이는 없었다. 친일파인 송병준과 이완용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은 폐하께 있습니다. 친히 도쿄로 가서 천황께 사죄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대한문 앞에서 맞아 면박의 예를 다하십시오. 이 두 가지를 차마 못한다면 일본에 선전(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협박하고 나섰다. “폐하가 자결해야 국가가 살 것”이라는 발언까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송병준에게 “경은 누구의 신하냐”고 책망한 뒤 내전으로 들어갔다.

결국 고종은 안팎의 압박 속에 양위식을 하루 앞둔 19일 새벽 3시 순종에게 황위를 ‘대리’한다는 조칙을 내리도록 했다. 역사의 격동기 한가운데 섰던 고종 44년 재위의 쓸쓸한 결말이었다.

원문기사 보기
상단으로 이동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

경향신문 뉴스 앱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