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는 당신 곁에 있다

2020.02.15 18:51 입력 노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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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자마자 숫자 ‘1’을 부여받았다. 주민등록번호 일곱째 자리, 남성이라는 의미다. 8살 무렵일까. 김겨울씨(27)에게 의문이 생겼다. “내가 남들과는 다르구나. 남자는 아닌 것 같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 데뷔한 트랜스젠더 가수 하리수씨를 보며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알았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여성으로 받아들였다. 몸에서 오는 디스포리아(성별 위화감)보다 사회에서 오는 디스포리아가 심했다. 나는 분명 여성인데, 너는 이래서 여성이 아니라고 말하는 잣대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게 고통스러웠다.

‘여성도 인간’ 선언의 확장

학창시절 괴롭힘은 일상이었다. 단지 남성적으로 보이지 않다는 이유였다. 외관은 보통 남성의 모습이었지만 남학교에서 ‘다름’은 은연중 드러났다. 언어·신체적 성폭력에 시달렸다. ‘없는 사람’ 취급도 허다했다. 고교 1학년 봄 자퇴했다. 오래 우울증을 앓았다. 삶을 내치려고도 했다. “내가 남들과 달라서, 건드리기 쉬워서, 만만해서, 여성이기 때문에 이런 걸 겪는 걸까.” 자괴감이 들었다.

부모의 권유로 검정고시와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갔다. 남들 눈에 그는 여성으로 보였다. 여전히 숫자 ‘1’은 따라왔다. 교수나 학생회 임원들은 그가 트랜스젠더라는 걸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그 사회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혹시 트랜스젠더라는 걸 들키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불안했다. 대학은 1년 남짓 다니고 그만뒀다. 야간 식당일 등을 하며 수술비를 모았다. 수술하고 싶은 마음은 크지 않았지만, ‘1’을 지우려면 수술이 필요했다. 험난한 10대 시절, 그와 불화를 겪은 부모도 “네가 행복하면 됐다”고 했다. 2016년 태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수술비와 체류비, 회복하는 기간 쓴 비용까지 3000만원이 들었다. 그리고 숫자 ‘2’를 얻었다.

지금은 평범한 회사원으로 산다. 친구 만나서 술 한잔하고, 소설책을 읽는 걸 즐긴다. 2년 전부터는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트랜스해방전선’도 이끌고 있다. 사회에 넘쳐흐르는 트랜스젠더 혐오는 소소한 일상에 균열을 낸다. 성전환 수술을 이유로 강제 전역당한 변희수 하사, 반대 여론에 숙명여대 입학을 포기한 트랜스젠더 여성 ㄱ씨를 보면서 함께 아파했다. 많은 이들이 “20여 년 간 남성으로서 특권을 누렸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여자가 되냐”고 일축했다. 김씨가 밟아온, 트랜스젠더들의 지난한 삶은 지워졌다.

두 트랜스젠더가 자신을 드러냈다. 변 하사는 1월 22일 기자회견에서 “성별 정체성을 떠나 제가 이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군인 중 한 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숙명여대 법학부에 최종 합격한 ㄱ씨 역시 언론 인터뷰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고 주민등록번호를 바꾼 트랜스젠더도 당당히 여대에 지원하고 합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변 하사는 기자회견 이튿날 강제 전역당했다. 군은 남성 성기가 사라진 신체 변화를 ‘심신장애’로 봤다. 2월 10일 법원은 변 하사의 성별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정정할 것을 결정했다. 변 하사는 이를 근거로 전역이 부당하다는 인사소청을 낼 계획이다.

ㄱ씨의 바람도 꺾였다. 그는 수능을 치르기 전 이미 법적 여성이 돼 여대 입학에 절차적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학내 안팎에서 팽팽한 찬반 논쟁으로 번지자 “작금의 사태가 무서웠다”며 입학을 포기했다. 두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을 던졌다. 일부 페미니즘 단체들은 “생물학적 여성만이 여성”이라며 트랜스젠더의 여대 입학에 반발했다. 혐오가 아니라 여성의 안전한 공간을 지키려는 것이라고 했다. 여성계 내에서도 온도차가 드러났다.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숙명여대 법과대학에 최종 합격한 트랜스젠더의 입학을 두고 학내 찬반 여론이 갈렸다. 2월 6일 학교 게시판에 찬반 대자보가 나란히 붙어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강남순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 교수는 트랜스젠더 배제는 결코 페미니즘과 함께 갈 수 없다고 봤다. 강 교수는 “페미니즘이 ‘여성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하며 출발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그 여성의 자리에 다양한 존재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넣을 수 있어야 한다”며 “내가 이해하니까 오케이고, 그게 아니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방식이라도 존중하고 인정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는 그 대상이 비정상적이며 위험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며 “트랜스젠더가 위협적이라며 가능한 시나리오를 짜고 존재의 배제를 공포와 불안으로 정당화시키는 것 역시 혐오”라고 말했다.

트랜스젠더 ㄴ씨는 “근본적으로 여성 대상 범죄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트랜스젠더를 배제하자는 목소리가 지지를 얻을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다. 이 맥락을 아예 제거하진 않았으면 좋겠다”면서도 “굉장히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법적 성별 정정까지 마쳤는데도 난리가 난 것을 보면서 트랜스젠더의 존재라는 게 어디까지 왔나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숫자 하나 때문에

뉴트로이스(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으로 인식)로 정체화한 ㄷ씨는 “여대나 여군에도 자신이 여성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트랜스 남성이라든가 성별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분명 있다”며 “우리는 사회에 존재하고, 어떻게든 잘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를 혐오하지 않는 게 다양성을 존중하는 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트랜스젠더가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안전망도 고민해야 할 때다. 주민등록번호는 종종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 “본인 맞으세요?” 법적 성별 정정을 마치지 않은 트랜스젠더는 은행·관공서 등에서 신분증을 내밀 때마다 조마조마 한다. 이 때문에 많은 트랜스젠더가 법적 성별과 본인의 성 정체성을 일치시키기 위해 법적 성별 정정에 나선다.

문제는 법원에서 성별 정정 허가를 쉽게 내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06년 6월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성전환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향유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고 적시했다. 이에 따라 성별 정정의 기준이 되는 대법원 예규가 만들어졌다. 예규는 생식능력 제거, 외부 성기 성형수술, 미혼, 미성년 자녀 없음 등 엄격한 요건을 규정했다. 성인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으면서 ‘부모동의서’까지 요구한 규정은 지난해 8월 없앴다. 서구사회에선 성기 수술을 요건으로 내건 경우가 드물다.

법률이 아니기 때문에 성별 정정 허가는 판사의 재량에 달려 있다. 요건을 다 갖춰도 추가 증명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성기 수술을 하지 않아도 성별 정정을 받아들인 판례도 있다. 트랜스젠더 사이에선 어느 법원에 가면 잘 받아준다는 불확실한 소문이 돌기도 한다. 이 때문에 법원행정처는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성별을 변경하는 균일한 심사기준을 연구하고 있다.

성별 정보를 과도하게 요구하는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행정 목적별로 서로 다른 번호를 부여하는 선진국처럼 주민등록번호 제도의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부는 2020년 10월부터 발급되는 주민등록번호엔 지역 차별을 막기 위해 지역 정보가 아닌 임의번호로 바꾸기로 했다. 하지만 성별 정보는 그대로 남는다.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강제 전역당한 변희수 하사가 1월 22일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경례하고 있다./연합뉴스

트랜스젠더의 의료접근성도 매우 취약하다. 한국은 트랜스젠더를 위한 의료 서비스 자체가 부족하다. 법적 성별이 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트랜스젠더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기 어렵다. 법적 성별을 바꾸려면 호르몬 투여와 성전환 수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모든 의료적 조처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비용은 개인이 감당할 몫이다.

이미지가 아닌 삶을 본다면

“트랜스젠더 한번이라도 만나본 적 있으세요? 당신 곁에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이 그들을 배제하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아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할 수도 있어요.”

트랜스해방전선 활동가 데이빗씨는 “트랜스젠더의 실제 삶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이런 사람일 거야’라며 단편적 이미지에 가둬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트랜스젠더는 엄청나게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트랜스젠더 인권활동가들은 무엇보다 ‘차별금지법’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데이빗씨는 “법이 모든 걸 해결해주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차별금지법이 차별인지도 모르는 여러 차별에 대한 언어를 만들 수 있고 고칠 수 있고, 그것이 ‘차별’이라고 말해 줄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활동가 준우씨도 “모두에게 필요한 건 실효성 있는 차별금지법”이라며 “개인뿐 아니라 기관을 향해서도 차별에 대응하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준우씨는 “성별이 분화된 공간에서 트랜스젠더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중간과정을 시도해보고 인프라를 만들 기회를 놓치는 건 트랜스젠더 당사자뿐 아니라 해당 집단 구성원과 사회로서도 손실”이라며 “젠더에 대한 고민을 갖고 토론하며 시스템과 문화 안으로 들일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숙명여대 입학을 포기한 ㄱ씨는 익명 커뮤니티에 이렇게 썼다. “성숙한 사람에게 있어서,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는 더 알아가고자 하는 호기심이 돼야지, 무자비한 혐오여서는 안 된다. 이러한 혐오는 진정한 문제를 가리고, 다층적인 해석을 일차원적인 논의로 한정시킨다. 이러한 무지를 멈추었을 때만, 사회의 다양한 가치들을 이해하고, 보다 건설적인 방향으로 공동체를 발전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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