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소설가 황석영 ‘내가 희망버스를 타는 이유’

2011.07.28 21:56 입력 2011.07.28 23:56 수정
황석영 | 소설가

누군들 편안할 수 있으랴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정리해고, 청년실업 등등의 단어들은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서 그냥 길 위의 돌멩이처럼 주변에 굴러다니던 물건과도 같았다. 가끔씩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되면 우리는 그래도 민주적인 국가의 복지정책이 있겠거니, 이제는 노조도 있고 시민단체도 많으니까 누군가 개선하고 도움을 주겠거니 하면서 스스로 안도하곤 했다. 지금 이만큼이라도 사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며 남의 참견은 되도록 하지 말고 내 식구들을 위하여 일터로 나가곤 했다. 신문과 잡지마다 서로 주장하고 떠들어대는 위의 단어들은 이제는 너무도 뻔한 ‘세계적 현실’이어서 관념적인 활자 이외에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김진숙’이라는 이름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일상을 급습했다. 처음에는 마치 붕괴된 지하의 어둠 속에서 희미하고 나약한 목소리로 “여기 사람 있어요!” 하는 부르짖음과도 같았다.

[기고]소설가 황석영 ‘내가 희망버스를 타는 이유’

열네살 소녀 때부터 학교는커녕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갖가지 밑바닥 일을 하면서 드디어 최초의 여성 용접공이 되었던 노동자 김진숙은 여기까지는 입지전적인 미담의 주인공일 수 있었다. 그녀는 해고자가 되어버린 뒤에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생존권을 위한 싸움에 나서기 시작했고 이제 쉰이 넘은 머리 희끗한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오늘의 다국적화된 자본은 그 이윤의 극대화를 위하여 노동시장의 조건이 보다 나은 곳을 찾아 국경을 넘나들기 마련이고 그런 과정에서 자국의 노동자를 대량해고하거나 공장을 폐쇄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다.

한진중공업은 지난 몇 년 동안 영도조선소를 사실상의 개장폐업과 다름없는 상태로 방치한 채 필리핀으로 옮겨가서 현지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하여 발주를 계속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도 비정규직이니 정리해고 같은 말은 언제부터인가 ‘고용의 유연성’이라는 점잖고 추상적인 말로 변해버렸다.

김진숙은 앞서 정리해고 철회를 호소하면서 죽어간 김주익, 곽재규 두 사람이 버티었던 바로 그 장소, 지상 35m의 허공에 매달린 크레인 위에서 이백일이 넘도록 항거하고 있는 중이다.

나 같으면 이틀도 못버틸 폭염으로 달구어진 쇳덩어리 크레인 속에서 그녀는 먹을 것과 대소변을 비닐봉지에 매달아 올리고 내리는 극한상황 속에서도 작은 화분에 방울토마토를 키우면서 시간과 싸우고 있다. 벌써 세 차례 계절이 지나도록 우리는 가끔씩 풍편에 흘려듣고 지나쳐버리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정보와 기사의 홍수 속에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신문을 보지 않게 되었고 대부분의 언론들은 기사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트위터를 통해서 세상을 향하여 구조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고 이것이 태풍의 눈이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희망버스’는 그에 대한 최소한의 응답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당신의 존재와 당신이 처해 있는 입장을 이해하고 당신의 주장에 동감한다는 작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백일 이백일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생의 결단을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한 채 내려가면 오히려 못살 거라는 거그게 더 중요해요 제게는.

김주익, 곽재규, 두 사람 한꺼번에 묻고 8년을 허깨비처럼 살았으니까요.

먹는 거, 입는 거, 쓰는 거, 따뜻한 거, 시원한 거, 다 미안했으니까요.

밤새 잠 못들다 새벽이면 미친 듯이 산으로 뛰어가곤 했으니까요.

김진숙의 메시지 가운데 몇 줄이지만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관자놀이를 찌르는 것만 같다. 그녀의 농성이 이백일 가까이 되었을 무렵에야 비로소 사태를 알게 된 나에게도 그것은 오래 잊고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누군들 잠자고 먹고 일어날 때마다 ‘김진숙’의 이름을 잊을 수가 있으랴.

이제 다시 희망버스를 기획한 송경동 시인에게는 체포영장이, 함께했던 젊은 시인 작가들에게는 무더기로 소환장이 발부되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생존권과 표현의 자유를 일방적으로 억압한 그 어느 정부도 무사하게 체제를 유지했던 적이 없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관심 표명은 세계 문명국 어디에서나 사람의 존귀함을 지키려는 당연한 행동이다. 정부는 늦었지만 강경책을 중단하고 사태 해결을 위한 중재에 나서야 한다. 나는 특히 작가 시인들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하고 있는 당국에 대하여 규탄하면서 분노로서 항거하겠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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